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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6년에서 1987년 사이 약 석 달 동안 남부 유럽에서 전화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써내려간 소설이다. 그리고 이후 쌓인 소설의 여러 가지 유명세야 새삼 들춰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재작년쯤 유종호 교수가 일간지상에서 상당히 강하게 비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나도 그때 가던 길을 멈추고 잠깐 앉아서 이건 그렇고 저건 조금 아니고 식으로 혼자서 기사 속 주장에 나름의 동의와 이의를 달았었다.(고 하면 좋겠지만 사실은 그냥 조금 끌끌 웃었다고 하는 편이 더 사실에 가깝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야 너무 익숙하고 친숙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어떻게 새롭게 설명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소설을 통해 동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그 시대 역시 사회와 개인의 테두리 사이에서 싸우고 있는 젊은이들의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세대 혹은 시대 간 소통의 토대로서의 친숙함이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나 "좁은 문"의 제롬도 알고 보면 당 세대의 젊은이들이었고 이 작품들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것도 시대를 초월해서 이루어진 젊은이들의 공감이었다. 다만 청춘의 방황이라는 것도 시대의 영향 아래서 자유롭지 못한 관계로 그 형태와 모양이 이전 세대의 것과는 어쩔 수 없이 차이가 지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동급생들이 데모를 하는 동안에도 강의를 듣고 있지만 교수가 부르는 출석 확인에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거나, 남보다 월등한 능력을 갖고 외무성이라는 국가 최정예 시스템에 들어가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조차 힘들고, 오늘날의 사회에 비록 노예제는 없어졌다지만 자본의 유무에 따라 여전히 다른 세계에 속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차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형태로 하나 둘 사라져 가는 와중에서도 주인공 와타나베는 '올바르게 살겠다고' 결정하고 이미 죽어버린 고교 시절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난 지금껏은 열일곱, 열여덟인 채로 있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아. 나는 십 대의 소년이 아니니까. 난 책임이란 것을 느낀다. 아아, 기즈키, 난 너와 함께 있었을 때의 내가 아냐. 난 이미 스무 살이 된 거라구. 그래서 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실의 시대"는 1998년 6월에 나온 2판 63쇄인데, 1989년에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메세지가 책의 앞뒤에 붙어 있다. 저자의 특별한 애정이 당시로서는 신선했을 거라고 짐작이 된다. 이 메세지의 말미에서 그는 젊은 세대 한국인 독자들의 감상을 편지로 보내준다면 기쁠 거라면서 영어나 일어로 편지를 써서 한국의 출판사로 보내달라고 그 주소까지 상세하게 적어둔 것을 볼 수 있다. (영어판이나 프랑스어판에서는 볼 수 없는 메세지다.)아마도 대체로 비슷한 사회적 상황을 겪으며 청춘의 날들을 보낸 한국 젊은이들의 생각을 무척 궁금했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국의 모 일간지와 나눈 인터뷰에서 '한국에 매우 오고 싶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왔다 가고 싶다'고 말해 놓은 것을 보았다. 그 말처럼 정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국에 도착해서 어느 도시의 풍경 속에 미끄러져 들어가 한 손에는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익숙한 시선으로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작가를 상상하면 괜히 즐거워진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소설은 당대의 젊은이들을 고독하게 존재하는 가운데에서도 서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게 했다. 소설이 출간된 이후로는 약 20년, 저자가 보낸 스무 살 시절 이후로는 약 40년이 지났지만, 계속 살아가기로 결정한 젊은이들이 사회에 바치는 대가는 여전히 지불되고 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