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따윈 0.5초만에 생각한다.

 

#. 1
 
창작자로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이 있고, 반대로 감상자로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이 있다. 글에 관한한 나는 감상이 즐겁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대부분은 이미 세상에 있다. 반면 내가 보고 싶은 말의 대부분은 내 안에 없다.
 
한편으로는 언어의 공해가 짜증스럽다. 악다구니, 동어반복, 논리적 오류가 초당 수만 페이지씩 생성되는 이 세계에 단지 사소한 것 하나라도 보태고 싶지 않다. 세상이 각박해서인가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자기 목적에 맞춰 규정하지 않고서는 문장을 맺지 못하는 태도나 정의를 소유물처럼 여기는 태도도 피하고 싶은 요소다.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다. 침묵으로 가능하다면 기꺼이 침묵하리라.
 
무리에 속하지 않으려는 것은 나의 정치색이나 사회적 포지션보다도 근본적이다. 본능에 가깝다. '홀로 살아남는 것'이 어떤 정치적 옳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라 믿는다. 
 

 

#.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이란! 내 안의 불안이란 바다와 같지만 쓰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은 유별나다. 마치 먹은 것이 적체되고, 어쩔 수 없이 밀려 나오는 것과 같이 꾸준하고 번거로우며 당혹스럽다. 그럴 때면 배설의 욕구를 해소하듯 하얀 공백을 띄워 놓고는 정신없이 두드리고 부끄러워하며 아무 폴더에서 쑤셔 박아 놓는 것이다. 하지만 조악하게 꾸며낸 낱말들의 면을 마주하면 괴로워서 다시 열어보지는 않는다. 배설물에 대한 혐오와 비슷한 종류랄까. (그런데 서재의 몇몇 악당들은 자꾸 쓰라고 괴롭힌다. 수치플인가!?)
 

#. 3

 

 

 

 

 

 

 

 

 

 

 

 

 

 

읽는 것도 지지부진하다. 잠들기 전에만 조금 읽는다. 그제는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아직 무명에 가깝던 하루키의 소설이 처음으로 번역되는 대목이었다.

 

또한 서구 각국에서 약진할 수 있었던 큰 요인 중의 하나는, 다행스럽게도 몇 명의 훌륭한 번역자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우선 1980년대 중반에 엘프리드 번바움이라는 수줍어하는 인상의 미국인 청년이 내게 찾아와,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 짧은 것을 몇 개 선정해 번역하고 있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좋지요, 꼭 번역해주세요“라고 얘기가 되었고 그 번역 원고가 점점 쌓이면서,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몇 년 뒤에 ‘뉴요커’진출의 계기가 됐습니다. ‘양을 둘러싼 모험’과 ‘댄스 댄스 댄스’를 ‘고단샤 인터네셔널’에서 출간할 때도 앨프리드가 번역해주었습니다. 앨프리드는 대단히 유능하고 의욕이 넘치는 번역자였습니다. 만일 그가 내게로 그런 얘기를 들고 찾아오지 않았다면 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다는 생각은 그 시점에는 아마 못 했을 것입니다. 나로서는 아직 그런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앨프리드 번바움의 ‘양을 둘러싼 모험’은 좋은 평판을 받았고 뉴욕 타임즈에 대서특필 됐다. 존 업다이크는 뉴요커에 호의적인 논평을 실었고, 하루키의 소설은 세계로 팔려나가기 시작한다. 지금은 5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나.

 

읽으며, 마르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1517년 경의 일이다.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회에 격분한 루터가 97개조 반박문을 내걸자, 교황청에서는 회개를 강권했다. 온갖 정치적 정략관계에 따른 권모술수와, 치열한 신학논쟁이 벌어졌지만,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그 결과 루터는 교회의 권유를 거부하고 도망자 신세가 됐고, 결국 행방불명된다.

 

어떻게 된 걸까? 루터가 실종되기 전, 왕실과 교회와 루터, 그리고 루터의 후견인 격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공개재판을 벌였다. 그 결과로 황제는 루터의 공민권을 박탈한다. 공민권의 박탈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 누가 루터를 죽여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중의적 의미다. 마치 러시아가 체포한 소말리아 해적들을 육지에서 500km떨어진 공해상에 ‘훈방’한 것과 같이 실질적인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그 날, 재판이 열렸던 보름스에서 루터는 몸을 숨긴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복면을 쓴 괴한들이 루터를 납치한다. 퍼져나간 소문은 흉흉했고 모두가 루터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했지만, 복면 괴한들은 다행스럽게도 프리드리히 3세 수하들이었다. 그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 루터는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를 받으며 바르크부르트성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있었다능.

 

왜 하필 번역이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시 라틴어 성경은 교황청과 지식인 사회가 독점하는 신적 권위였다. 이것을 일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라틴어와 라틴어 사용자들의 레짐을 거꾸러뜨리는 사상적 혁명이었다. 독일어로 번역된 성경은 영어로, 불어로, 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 세계 각국으로 파견된 예수회 수도사들은 현지어로 다시 성경을 번역했다. 한자로 번역된 성경은 연경으로 파견된 사신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은 그것을 구해 호롱불 아래에서 의미를 더듬었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터졌다. 형제들은 의금부에 끌려가 장에 얻어터지고 약종은 목이 잘렸고, 약전과 약종은 절룩거리며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97개 반박문이 나붙고 282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번역은 살아남았는데, 그 사실은 내게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허무한 기분이 들게도 만든다. 사실은 사실일 뿐이니까.  
 
그날 오전에 쟌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Hola amigo’ 제목 뒤로는 한 페이지가 빼곡한 스페인어가 적혀있었다. 언젠가 페이퍼에 적어둔 꿈 이야기를 모종의 이유로 스페인어로 번역했다고. (http://blog.aladin.co.kr/Escargo/8869875)

 

 

그 낯모를 문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나의 독서는 완전해졌다. 굳이 지난한 성경의 번역사를 떠올릴 필요 없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나에 따르면, 글이란 우선 해석을 통해 받아들여지고, 경험과 융합하여 상상 속에서 완전해진다. 간접 경험으로 이해하던 하루키의 감각을 실제 경험을 통해 근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거다. 그건 쑥스럽게도 퍽 감동적인 느낌이었다.

 

이런 것이었구나.

 

아주 오랜만에 더 읽고, 더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러진 않겠지만.
 


#. 4

 

쓰게 된다면 완전한 글을 쓰고 싶다. 이딴 글, 그러니까 밀려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받아 적는 페이퍼가 아니라, 오래 생각해서 한땀한땀 바느질 하듯 쓰는 글 말이다. 명백한 단어들로 문장을 지어 의미를 만들고, 그런 문장을 엄선해 문단을 만들고, 그런 문단을 조립한 견고한 한 편의 글. 그런 글을 쓰고 나면 더 이상 쓰는 것에 쫓기지 않게 될까? 하퍼 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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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3-24 1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뇨. 글은 영원히 쫓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과 죽음에 그러하듯.

<양을 쫓는 모험>으로 제 하루키 쫓기도 시작되었지요. 아, 밤새서 그렇게 하루키 읽을 때 정말 좋았는데...!

뷰리풀말미잘 2017-03-24 14:28   좋아요 2 | URL
음.. 열일곱 살이었는데, 겨울이었고, 엄청 추웠고, 눈발이 조금 날렸어요. 혼자 집에 있었는데, 책이 너무 읽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가난해서 주머니에는 오천 원밖에 없었죠. 새 책 살 돈은 안 되고 헌책이나 사보려고 길을 나섰답니다.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이나 되는 길을 달려서. 그날 산 책이 ‘양을 쫓는 모험‘이었어요. 사천 원쯤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책에 눈 맞을까봐 품에 품고 그 길을 돌아왔죠. 언 길에 넘어지고 긁히고, 예티처럼 꽁꽁 얼어서. 그래도 그날 참 행복했던 기억이 나네여.

한수철 2017-03-25 14: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쨌든 움직이라구, 자네는 시간을 너무 허비하는군. 자신이 처한 입장을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네, 자네를 그런 입장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바로 자네 자신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뷰리풀말미잘 2017-03-26 11:12   좋아요 0 | URL
어떻게 해볼게. 잘될지 어떨지는 자신이 없지만 말야.

한수철 2017-03-25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아직 접하지 못한 알라디너는 오해할 수도 있겠군, 싶어 재접속. 니미랄.

양을 쫓는 모험, 신태영 옮김, 문학사상사, p199-200

그럼 전 운동하러 가겠슴니다. 가능한 한 평온한 오후 보내십시용, 뷰리풀말미잘 님.^^

AgalmA 2017-03-25 18:26   좋아요 0 | URL
매우 이해되는 상황ㅎ 댓글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죠. 맞춤법부터 글 문맥에 따른 생각정리부터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려하는 것까지. 잘못 전달되고 끝나면 그야말로 헬)))
아 하면 어 받아쳐주는 청자라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ㅜ

뷰리풀말미잘 2017-03-26 11:18   좋아요 0 | URL
양을 쫓는 모험, 신태영 옮김, 문학사상사, p224

ㅋㅋ 의외의 소심함!

저는 방금 스팀 다리미의 증기 소리와 옷감에 열이 가해지는 독특한 냄새를 즐기면서 세 벌의 셔츠를 다리고, 주름이 잘 편인걸 확인하고 나서 옷장 안의 옷걸이에 걸었습니다. 머리가 어느정도 상쾌해진 것 같은 주말 오전입니다.

오늘은 어찌 지내시나요. 등산? 조기축구? 모쪼록 관절에 가해지는 물리적 충격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

뷰리풀말미잘 2017-03-26 11:28   좋아요 0 | URL
굿모닝 아갈마님! 저는 최근에 아갈마님에 대한 꿈을 두 차례 꿨는데요. 첫번째 꿈은 아갈마님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세차장을 개업해서 제가 그리로 놀러가는 꿈이었어요. 저는 종종 예지몽을 꾸는데 혹시 정말 개업했다거나 하실 생각이 있는건 아닌가 여쭤보고 싶고여.

두번째 꿈은 저와 아갈마님과 한수철님이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팟캐스트를 안 듣는데 최근에 우연히 듣게된 ‘지대넓얕‘(유명 팟캐스트죠)이 인상적이었나봐요. 아무튼 팟캐스트는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한수철님은 대체로 나몰라라 하시고 저와 아갈마님이 열띤 대화를 이어가는 꿈이었습니다. 쩔었죠.

SUR 2017-03-2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도저도 잘 안되는 어중간한 이중언어 사용자라 스페인어 번역을 눈여겨 봅니다.
스페인분이 하셨구나 했다가, 외국인이 한국말을 일케까지 잘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일 거라는 둥, 영어를 원본으로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까지. 언어능력의 기준이 본인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링크해주신 꿈 이야기까지 보고 두 언어와 문장의 ˝싱크로˝가 놀라워서 댓글 달려고 로그인했어요.
언젠가 <양을 쫒는 모험>을 읽은 날 꿈에 양사나이 나왔더랬죠. 삿뽀로 맥주를 한잔 하며 작품을 고민하던 하루키의 몽롱한 의식에 펼쳐진 홋카이도의 설원과 맥주캔의 별, 그리고 양사나이... 이런 그림이 파바박 떠오른 건 처음 삿뽀로 맥주를 접했을 때.
의지와 의욕이 바닥일 적에 댓글 달 의욕을 주는 글 감사해요. 시간을 두고 반복해 읽고 싶은 글이 이 서재에 여럿 있다는 사실도 더불어 말이죠.


뷰리풀말미잘 2017-03-26 12:50   좋아요 1 | URL
SUR님, 저는 1.6개 언어 사용자라 (영어가 0.5정도 되고요... 일본어가 0.1정도 되는 듯 하네요..) 검은 건 글이요 흰 건 종이로 보이는군요. 번역한 이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는 이 시대의 참 공부인입니다. 엑셀로 정리한 스페인어 공부 흔적을 보고 왠지 숙연해졌던 기억이 아련하군요.

삿뽀로에서 삿뽀로 맥주를 마시며 이 소설을 떠올리지 못한 지난날을 반성합니다. 댓글 달아주신 분들 덕에 오랜만에 꺼내서 보는데 역시 참 좋네요.

빡치면 하루키의 아무 책이나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읽곤 하는데, 묘하게 기분이 완화되곤 합니다. 두통이 오거나 할 때 욕조에 물 가득 받아서 들어가 앉아있으면 왠지 조금 아픔이 둔감해질 때 있잖아요. 하루키 글의 온도와 포근함이 따듯한 물 같아서 그럴까 싶네요. 의지와 의욕이 바닥이라고 하시니 펴 놓은 책 한 대목 읽어드리죠.

. . .

“이상한 말 같지만 도저히 지금이 지금이라고는 생각되지가 않아. 내가 나라는 것도 어쩐지 딱 와 닿지를 않아. 그리고 여기가 여기라는 것도 말이야. 언제나 그래. 훨씬 뒤에 가서야 겨우 그게 연결되는 거야. 지난 10년 동안 줄곧 그랬어.”

“왜 하필이면 10년이죠?”

“끝이 없기 때문이지. 그뿐이야.”

그녀는 웃으며 고양이를 안아 살짝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아줘요.”

우리는 소파 위에서 서로 끌어안았다. 고가구점에서 사들인 고색 창연한 소파는 천에 얼굴을 가까이 대면 옛날 냄새가 났다.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그런 냄새와 잘 어울렸다. 그것은 희미한 기억처럼 부드럽고 따듯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뒤로 넘긴 다음 귀에 입술을 댔다. 세계가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작은, 정말로 작은 세계였다. 거기에서는 시간이 온화한 바람처럼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셔츠 단추를 모두 풀고 손바닥을 가슴밑에 놓고 그대로 그녀의 몸을 바라보았다.

“마치 살아있는 것 같죠?” 라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 말이야?”

“네, 내 몸과 나 자신 말이에요.”

나는 “그래, 아닌게아니라 살아 있는 것 같군” 하고 대답했다.

나는 정말 고요하다고 생각했다. 주위는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가을의 첫 번째 일요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있잖아요, 참 좋아요”하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응.”

“어쩐지, 꼭 피크닉 온 것 같아요.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니까요.”

“피크닉?”

“그래요.”

나는 두 손을 등뒤로 돌려 그녀를 꼭 안았다. 그리고 입술로 이마의 앞머리를 치운 다음 다시 한 번 귀에 입을 맞췄다.

“그 10년은 길었어요?”

그녀가 내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글쎄, 아주 길었던 것 같은 느낌이야. 아주 길었고, 무엇 하나 끝나지 않았어.

내가 대답했다.

그녀는 소파의 팔걸이에 올려놓은 목을 아주 조금만 구부리고 미소 지었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웃음이었는데, 그것이 어디서 그리고 누가 지었던 웃음인지는 통 생각나지 않았다. 옷을 벗어 버린 여자들에게는 겁이 날 만큼 공통된 부분이 많아 그것이 언제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우리 양을 찾아요, 양을 찾아내면 모든 일이 잘될 테니까요.”

나는 잠깐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나서 두 귀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이 오래된 정물화처럼 그녀의 몸을 포근히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