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무서운 사람들을 위한 책 - 불안 전문 심리치료사가 알려주는 스트레스 없는 대화법
리처드 S. 갤러거 지음, 박여진 옮김 / 현대지성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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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이 책의 원제부터 확인하자.


Stress-Free Small Talk : How to Master the Art of Conversation and Take Control Your Social Anxiety


한국어판 제목은 좀 더 광범위한 '대화'를 말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 책은 스몰 톡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경우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우리는 왜 대화를 해야 할까?

책은 대화의 본질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한다.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 상대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안전한 존재인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신호다.

- 자신과 상대가 비슷한 성향이나 성격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 공통의 관심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 돈독한 인간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대화가 필요한 순간들】

- 네트워킹

- 비즈니스

- 명절, 기념일 등 특별한 행사

- 지역, 취미 등 공동체

- 개인 생활



네트워킹 부분은 IT업계에선 활발한 것으로 아는데 다른 직종에도 이런 기회가 많은지 모르겠다.



북미의 스몰 톡 문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사실상 한국인 입장에선 적용하기 애매하다 느낀 부분도 많았다. 피곤한 출퇴근길 대중교통에서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이와 대화하기? 산책길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대뜸 말 걸기? 이웃과도 대화할 일이 드문 곳에서 이상한 사람이라는 오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다.



저런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론 우리 사회는 타인과 부담 없이 가볍게 대화할 기회 자체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실감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우린 낯선 이들과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소통하며 지내고 있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지 않는다 뿐이지 SNS을 통해 대화하는 경우가 요샌 훨씬 많지 않은가? 댓글 소통도 대화라고 친다면 말이다. 물론 책에선 그런 부분까지 다루지는 않는다.




책 표지에는 전화도 언급하고 있는데 정작 전화 통화에 큰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모든 내용은 사람과 직접 대면해서 대화하는 상황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원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대화를 할 때 종종 잊곤 하는 부분도 환기시켜 준다.



"대화를 할 때 먼저 고려해야 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라는 점"(39쪽) 과 "상대가 당신의 말을 듣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지가 더 중요"(39쪽) 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추가로 참고하면 좋은 부분은 적극적 경청의 4단계였다.



【적극적 경청 active listening 4단계】

- 바꿔 말하기

- 감정 짚어주기

- 타당성

- 동일시



​저자는 수줍음, 내향성, 사회불안을 분류하고 불안으로 인해 대화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돕는 방법도 제시한다.



【수줍음과 내향성, 사회불안은 다르다!】


■ 수줍음

주로 ​불편해하는 태도​로 드러남.

대체로 상황에 따라 단기간 나타남.

그 자리를 벗어나면 괜찮아지는 경우 많음.


​■ 내향성

주로 에너지 고갈로 드러남.

아무리 즐겁게 대화를 나눠도 마지막에는

온몸에 힘이 쏙 빠진다.


​■ 사회불안

주로 공포​로 드러남.

사회적 상황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려 애쓴다.

수줍음이 과도해져 사회불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불안을 유발하는 요소를 파악하는 것이 인지행동치료의 첫 단계"(73쪽)이며 감정, 신체 변화 등 영향을 받는 요소들을 상세하게 파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사회불안장애로 대화가 어렵다면】

- 마음 알아차림

- 감정 적어보기

- 천천히 호흡하기

- 세분화하기 (몸과 마음의 감각을 상세히 기록)

- 목표를 시각화하기


"인지행동치료의 목적은 현실을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93쪽)이라고 강조하며 수집한 케이스를 바탕으로 인지 재조정을 시도하는 방법도 알려준다.



【‘인지 재조정 cognitive restructuring’ 시도하기】

1단계

두려운 생각을 떠올려보고 기록하기

(반드시 손으로 기록한다!)


2단계

떠올린 생각에 담긴 오류 찾아내기

(인지 왜곡 cognitive distortions 찾기 - 과장, 예측, 기대 등)


3단계

왜곡되지 않은 생각으로 다시 써보기

(왜곡된 사고에 반박하기)



【대화는 기술이다!】


저자는 걸음걸이를 배우고 피아노를 익히듯이 대화 또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 장 중간에 등장하는 [연습해보기] 는 앞에서 이해한 내용을 적용할 수 있는 실천 사항들이 적혀있다. 대화의 ‘기술’에 숙달되는 방법은 꾸준한 연습과 반복뿐이라고 하니 바로 시작해도 좋다.



어떤 상황에 떨어져도 곧장 대응할 수 있는 순발력과 요령이 없다면 준비가 필수다. 자연스러운 대화를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만남의 목적을 고려하여 미리 적절한 대화 소재를 준비하라고 일러준다.



【의외라고 느낀 점】


스몰 톡에서 가장 무난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주제인 날씨를 지루하다는 이유로 좋지 않은 대화 주제로 분류한 것이 의외였다.



스몰 톡이 워낙 빈번한 북미 문화에선 판에 박힌 따분한 대화 주제가 될진 몰라도 낯선 이와 좀처럼 대화를 나누지 않는 문화권이라면 날씨 주제는 여전히 대화 소재로 유효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상대방의 인간관계, 이를테면 아내는 잘 지내시냐 자녀들은 잘 지내냐 같은 질문이 상대에 따라 난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혼했거나 사별했을 수도 있고 자녀와의 관계가 나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상대에게 관심을 표하고 싶다면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정도가 적당하다고 한다. 의외로 관성적으로 내뱉기 쉬운 질문이라 실수하기 쉬운데 이렇게 한 번 짚어준 게 좋았다.



반드시 피해야 할 주제는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듯이)

정치, 종교, 비난, 불평이다.



​【티 안 나게 대화에서 빠지는 방법】


나에게 유용했던 부분은 적당히 예의를 갖춰 말을 마무리 지은 후 대화에서 빠지는 법이었다. 나는 거절을 못 해서 원치 않는 회식 뒤풀이에까지 억지로 끌려가기 일쑤였다. 한 번도 빠짐없이 항상 후회했다.



​후회는 '왜 그때 나는 거절을 하지 못했을까'에서 '그러게 왜 나를 끌고 간 거야'라는 원망으로 곧잘 이어졌다. 내가 거절하지 못해 생긴 불편한 감정이 부끄러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남 탓으로 이어졌다. 회피를 방치하면 이런 왜곡이 쉽게 일어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정말 피곤한 사고방식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나를 힘든 상황에서 제때 구출하지 않으면 애먼 사람들만 원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적당히 맺고 끊을 수 있다면 상대에게도 좋은 인상을 남기고 나 또한 만족스럽게 만남을 마무리할 수 있다. 나와 상대 누구도 탓하지 않고!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늘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찾아온다. 역시 모든 문제의 시초는 나라는 진리로(?) 돌아온다.



​【그래도 잘 모르겠으면 따라 하라】


잘 모르겠으면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사람을 관찰하고 배우라는 것도 유용한 팁이었다.



사실 나는 이것을 댓글 쓸 때 활용하고 있다. 워낙 무플로 정보 취득만 해 온 인생이라 이웃의 글을 읽고 감상을 남기는 게 처음엔 쉽지 않았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바로 앞선 사람의 댓글을 참고하는 것!



​소통 초보자인 나는 어떤 식으로 댓글을 남겨야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까 고민하는데 그럴 때 베테랑 블로거들의 댓글 대화가 도움이 된다. 저 정도의 거리와 예의를 갖춰 댓글을 달아야 하는구나라는 걸 배운다. 어디서든 배움의 기회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지구에 처음 오셨나요?

인간과 대화하는 방법을 알려드리죠!

하고 외계의 방문자에게 매뉴얼로 내밀면 좋을 책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경험한 성인이라면 딱히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란 말이다.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하지 말고 마음을 열어두라.

상황을 통제하려는 압박에서 벗어나라.

완벽주의를 버려라.

실수에 관대해져라.

인간적인 면은 호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걱정 마라)

마주하는 상황들에서 항상 배우는 태도를 가져라.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나 멘토가 있다면

접할 수 있는 수준의 조언들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찾을 수 있는 조언들이다.



​너무 당연해서 '이걸 굳이 책으로?'라는 마음이 불쑥 들었지만 때론 너무 힘들어서 이런 삶의 기술을 잠시 잊게 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대화의 감각을 상실한 사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

추천하고픈 독자

​지구에 처음 방문한 외계인

회화와는 평생 담을 쌓은 탓에 입이 안 떨어지는 분

사회성 없다는 소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분

데이트 후 애프터를 항상 거절당하는 분

북미 스몰 톡 문화에 이골이 난 해외 교민




​* 이 서평은 네이버 이북까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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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채우는 일상 철학 - 삶에 영감을 불어넣는 40가지 철학의 순간들
인생학교 지음, 정은주 옮김, 알랭 드 보통 기획 / 오렌지디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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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들어봤는데 지은이가 인생학교라고? 그게 뭐지?

나도 정확히 무슨 활동을 하는지 살펴본 적이 없어 표지의 소개부터 읽었다.




인생 학교 The School of Life는 알랭 드 보통이 주축이 되어 만든 프로젝트 학교다. 2008년 런던에 처음 문을 연 이래 유럽 곳곳에 분교를 세웠고 삶의 본질과 연결된 다양한 질문에 대해 토론하는 공간이라는 게 이곳의 정체다.

 

유튜브 채널 주소가 있길래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바로 들어가 봤는데 인생학교를 소개하는 영상에는 다행히 한글 자막이 달려 있었다. 최근 영상순으로 확인해 보니 안타깝게도 한글 자막이 제공되는 영상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인생학교 유튜브 채널에서 다루는 영상의 주제는 인생학교가 다루는 질문의 수만큼 다양했다. 알기 쉬운 그래픽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영상부터 분량이 좀 더 긴 강의 영상도 포함되어 있다.

 

인생학교의 활동을 번역한 책으로 접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책으로 엮기엔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으니 좀 더 빨리 접하고 싶은 분들은 홈페이지나 유튜브 채널을 확인하면 좋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상당수의 콘텐츠가 영어로 제공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책 얘기를 해야 하는데 서두가 길었다.

 

철학을 주제로 삼는 책 치곤 꽤나 발랄한 느낌이 드는 표지부터 눈길을 끈다. 힐링 에세이류 표지 같기도 하고, 심지어 187쪽 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다. 적은 지면에 무려 40가지 철학적 질문을 담았다고 하니 어떤 책일지 더 궁금해졌다.

 

채널을 먼저 살펴본 것이 책이 이렇게 나온 것을 이해하는 데에 의외의 도움을 주었는데 바로 인생학교가 심오한 질문을 무겁지 않은 톤으로 전달하려 한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받으면 책장 전체를 휘리릭 훑어보고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나름의 의례인데 처음 이 책을 훑어보고는 텍스트가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파본을 받은 줄 알았다.

 

설마 그럴 리가, 이미지만으로 사유해 보라는 깊은 뜻인가? 혼자 별의별 추측을 하다 놀라서 다시 한 장 한 장 떼어서 살펴보니 사진과 사진 사이에 글이 놓여있었다.

 

책을 엮을 때 종이 방향의 영향인지, 아님 인쇄할 때부터 의도한 것인지, 모두 상관없이 내가 받은 책만 우연히 이런 것인지도 모르지만 신기했다.




책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

2. 불안에 흔들리지 않는 법

3. 관계에서 중심을 잡는 법

4.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법

 

각 장의 주제에 어울리는 질문을 제시하고 그 질문에 영감을 주는 철학 아이디어가 짧게 실려있다. 글보다 사진을 먼저 접했을 땐 특별한 의미 없이 어울리는 사진을 넣었을거라 생각했는데 글을 먼저 읽고 사진 페이지로 넘어가니 앞서 설명한 내용과 자연스레 연결되는 이미지였다.

 

왜 이렇게 많은 사진을 그것도 양 페이지 가득 채워 넣었을까? 주된 텍스트 한 켠에 첨부로 삽입한 이미지가 아니라 텍스트 분량과 정확히 동일한 분량을 이미지가 차지하는 데는 그만한 편집 의도가 있을 것이다. 책 전체를 읽고 나니 빼곡한 텍스트로는 느낄 수 없는 전면 이미지가 주는 낯선 울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꿈틀거리는 질문을 곱씹은 후 책장을 넘겨 정적인 이미지와 마주하는 순간, 그 장면은 더는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아니라 사유가 뿌리 내릴 수 있는 장면이 된다. 글을 읽고 골똘히 생각한 만큼 이미지를 오래 응시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별 것 없어 보이는 장면, 내 일상에서도 만날 법한 익숙한 장면들에서 나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보통 철학이라하면 까다롭고 장황한 이론과 꼬리를 무는 문답이 연상되는데 이 책을 통해 글과 말을 넘어 이미지 사유를 시도해 볼 수 있다. 인문학 책은 골치가 아프고 따분할 것이라 생각하는 분들에게 우선 추천하고 싶다.

 

 

* 이 서평은 네이버 이북까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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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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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소한 이름이었다. 이 책을 선택하는 데는 사실 서문을 쓴 리베카 솔닛의 이름이 좀 더 결정적이었다. 어떤 이의 책이길래 그가 서문을 써주었을까 하고 흥미가 생겼다. 배리 로페즈의 책 중 한국어로 출간된 것은 2014년에 봄날의책에서 나온 『북극을 꿈꾸다』가 유일한데 그마저도 현재는 품절이다. (다행히 이 책이 나온 북하우스에서 『북극을 꿈꾸다』와 『호라이즌』이 나올 예정이다.) 

 

  지명도 생소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도시에서 생활하고 심지어 여행을 가도 타국의 도시만을 경유하는 현대인이라면 접하기 어려운 지역, 낯선 국가의 더 낯선 강과 시내의 이름들, 숲과 평원과 사막의 이름을 읽을 땐 어렴풋하게나마 연상되는 이미지가 없어서 언젠가 미디어를 통해 접한 재현된 자연에 의지해 읽어 나가야 했다. 내가 직접 볼 수 없을 숱한 생명체들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독서 초반엔 이 낯섦 때문에 미로 중간에 놓인 기분이었다. 어떤 독자에겐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배리 로페즈가 2020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출간된 에세이 모음집이다. 표지의 부제처럼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을 담고 있다. 각 글이 쓰인 시기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시간 순으로 실은 것인지 분명하진 않다. 의도한 배치인지, 4개의 주제별로 나눈 글들의 순서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저자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마지막 글에 다다랐을 때는 벅찬 기분마저 들었다.


그는 자기 시련이 이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구원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더 넓은 인식을 직조해냈다. 그런 관대함은 회고록이 어떤 글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사적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한 호흡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지 어느 장편 회고록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시사했다.

배리 로페즈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2023, 북하우스) p.11 서문 중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사적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한 호흡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지’에 밑줄을 그었다. 그 부분이 이 책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아볼 요량으로.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서문으로 돌아와보니 저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여기에 실린 글 들 중 <초대>(p.192~p198)가 가장 인상 깊었다.

 

  어떤 글을 ‘자연 에세이’라고 부를 때 자연의 범주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단순히 야생 동물과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공간만을 상상할 수도 있다. 자연환경을 외부의 대상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나는 관찰자로 상정하고 쓴 글도 어색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펼치는 이야기는 그보다 더 확장된 자연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연을 통해 얻은 가르침이 결국 그것을 감각하는 신체, 곧 나의 몸 얘기로 연결되는 것이 놀라웠다.

 

  현대인의 피상적인 경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선주민과 보낸 대화가 필요 없는 시간에서 알게 된 깨달음. 왜 우리는 점점 더 빠른 피드백에, 더 빠른 정보의 공유에 집착하게 되었는가, 그 부산함에서 획득할 수 있는 앎이란 종종 얼마나 얄팍한가. 그와 대비되는 기나긴 침묵과 오로지 누적된 경험과 감각으로 체득하는 지식의 존재. 우리는 그런 것을 기다릴 인내심을 잃고 있는 건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추천하고픈 독자

시간 있으시면 모두 읽어주세요 제발

 

 

* 이 서평은 네이버 이북까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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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 카네기 인생경영론
데일 카네기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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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계발서를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독자가 처음 이 장르에(?) 입문하고자 할 때 가장 많이 추천되는 저자는 과연 누구일까? 아마 데일 카네기이지 않을까. 『인간관계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에 이 책으로 데일 카네기를 만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이후 현대지성에서 나온 데일 카네기 시리즈로 『자기관리론』, 『성공대화론』도 읽어보았다. 『인간관계론』 만큼 인상적이진 않았지만 자기 계발서라는 것의 속성을 맛보고 싶다면 한 번씩 읽어볼 만한 내용이다. 『인생경영론』은 앞서 세 권의 책에 이은 국내 유일 1937년 초판 완역본이라고 한다.



  사실 이 책의 원제는 ‘5분 전기 Five Minute Biographies’이다. ‘누군가에게 5분의 시간을 주고서 당신의 인생을 한번 요약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아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부터 먼저 이야기할 것이다.’라는 책 소개에 이끌렸다. 데일 카네기가 엄선한 인물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 소개가 책의 내용과 동떨어진 과대 포장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책이 궁금해서 이 리뷰를 찾아 읽게 될 분들에게 일단 한 마디 먼저 내뱉고 시작하고 싶다. ‘잘 오셨습니다. 이 책은 거르세요.’ 



  바로 위에 한 마디 뱉고 시작하겠다고 썼지만 솔직히 시작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내가 이 책의 리뷰를 굳이 써야 하는가? 그렇다. 반드시 써야 한다. 서평 게시라는 의무에 임하고자 책을 증정 받았기 때문에. 아무리 그래도 증정 도서에 이렇게까지 실망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적당히 좋은 점을 착즙해서 잠재 독자를 위한 추천의 말로 마무리하는 것이 출판사에게도 나와 정반대로 이 책을 인상 깊게 읽은 독자에게도 이상적이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지난 일주일 동안 나를 괴롭게 했지만 이것이 나의 최선이다. 다른 분들이 이 책의 장점을 발굴하여 구원의 빛을 비춰주셨으리라 기대한다.



  책에서 언급하는 60명의 인물 중엔 익숙한 이름도 있고 미국 문화계에서는 원로급 인사일 테지만 다소 생소한 이름도 많다.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간 그들의 인생 태도는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에도 절대 변하지 않는 성공 원리를 보여줄 것이’라고 소개하지만 주요 인물들의 사적 특징―타고난 기질, 성정, 때로는 기벽 등―을 묘사하는 부분이 많아 신변잡기로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사실상 목차에 나열된 소제목이 각 글의 주제로 제시되지만 글 자체에서 뽑아낸 주제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의도로) 이런 내용으로 수렴되길 희망하는 주제’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읽으면서 이 책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쓰인 건지 궁금해서 서문을 다시 확인하려 했는데 이 책엔 서문이 없고 역자의 말만 실려 있을 뿐이다. 일러두기를 보니 1937년에 출간한 책과 1944년에 출간한 책 두 권의 내용을 합쳐 60명의 얘기를 실은 것이라고 한다. 어딘가 연재했던 이야기를 하나로 모은 것인가 싶을 정도로 일화들이 중구난방이다. 작가, 배우, 기업인, 과학자, 발명가, 탐험가, 전쟁 영웅 등의 일화 간 연결성을 찾기 어렵고 각 장의 주제와도 적절하게 부합하지 않는다. 역사적 인물들의 여담 모음집 같다. 



  ‘뭐지? 어쩌라고? 여기에 무슨 교훈 포인트가 있는 거지?’ 싶은 어이없는 내용에서 의미를 쥐어짜는 역자의 인생경영 포인트 부분도 짚고 넘어가자. 처음엔 정신 없는 내용을 적절히 요약을 해주었나 보다 하고 읽어나갔는데 갈수록 역자의 의미 짜 맞추기에 거꾸로 주제가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데일 카네기가 이야기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지 않고 사실상 데일 카네기의 허울을 쓴 역자표 자기 계발서 같다.  (물론 그럼에도 각자에게 와 닿는 메시지를 찾아 삶에 반영하는 사례는 있을 수 있다. 나도 어떤 문장엔 밑줄을 그었다.)



  역자가 선택한 번역어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23년도 출간 도서에서 처녀작 같은 단어를 보게 될 줄이야. 순화하자는 논의가 시작된 지도 족히 10년은 넘은 듯 한데 역자가 성차별어 바로 잡기에는 문제의식이 부족한 것 같다. 사실 오랜 경력의 역자가 관성적으로 이런 번역어를 선택했어도 편집자가 수정을 제안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이 책인 쓰인 시기와 저자의 한계―개신교 배경의 백인 남성―때문에 낡은 느낌이 드는 책이 다듬어지지 않은 번역 덕분에 더욱 고루해졌다. (설마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 의도적 선택이라면? 그런 심오한 의도가 있었다 한들 이런 단어는 정말 그만 보고 싶다.)



  누군가 이 책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저는 현대지성에서 나온 훌륭한 고전과 양서가 많으니 다른 책을 읽으라고 권할 것입니다. 데일 카네기가 제 인생의 5분 전기를 쓸 일이 없다는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모릅니다. 그간 읽어온 데일 카네기의 책들과 확연히 다른 책입니다. 항상 사례를 토대로 구체적 실행법을 제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 책은 다릅니다. 책을 다 읽고서 표지의 문구가 새삼 다르게 보입니다. 그간 번역이 되지 않았던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이 서평은 네이버 이북까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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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다가가기 - 우정과 상실 그리고 삶에 관한 이야기
후아 쉬 지음, 정미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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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원제인 Stay True는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대강 번역기에 넣어보면 진실을 지키다, 진실을 유지하다 등으로 번역되는데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Stay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뜻이 있었다. 고어인 경우에만 통하는 부분도 있고 특정한 맥락에서 선택되는 표현도 있겠지만 책을 읽고 난 후 사전에 제시된 어떤 의미에 True를 연결시켜도 미묘하게 맥락이 통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 책에서 저자는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과 함께 머무르고 망각을 멈추려 애쓰고 다른 이들이 모두 앞으로 나아갈 때조차 가만히 있는다. 때론 진실에서 파생되는 슬픔을 억제하기도 하고 사건에서 파생되는 다른 해석을 막아낸다. 이 책은 압도하는 상실에 멍하니 과거를 곱씹는 것 밖에는 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던―아니 거부했던― 한 청년이 슬픔에 깊이 침잠했다 떠오르는 이야기다. 사실 떠오르는 순간의 비중은 극히 적고 그 정체된 시간, 고여있고 유예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True라는 단어도 처음 접했을 땐 ‘진실’이라는 명사가 즉각 떠올랐는데 이 외에도 정확한, 조금도 틀림없는, 참으로, 올바르게, 정확하게, 진리 등의 뜻이 있다. 이 역시 책의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정확한 기억만을 남기고자―실패할 것이 자명한― 홀로 분투하는 여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올바르게 사건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고자 애쓰는 모습 아니면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상태―진실로 추모하는 사람의 태도라 믿었던―를 고집했던 이야기로 봐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많아 꽤나 고심하여 정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어판 제목을 『진실에 다가가기』라고 지은 것 또한 흥미로웠다. 번역자와 편집자의 판단을 모두 거친 정해진 제목일 텐데 어떤 의도에서 이런 제목을 택했을까? 번역자의 말이 실려있지 않아 의사 결정 과정은 알 수가 없다. 다만 Stay True 만큼 짧고 인상적이지 않아 아쉽다. 하지만 번역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소실이라고 생각한다. 이 또한 책에서 저자가 고민한 부분과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자로 옮기기 어려운 감정 앞에서 무력해지는, 나에게 진실인 부분이 과연 모두의 진실일까 의심해 보는 부분도 떠올랐다.




  작가 후아 쉬는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 아래 미국서 나고 자란 이민 2세대로 1977년 일리노이주 어배너 섐페인에서 태어났다. 현재 뉴욕의 예술대학인 바드 칼리지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이 책 『진실에 다가가기』는 2022년 미국에서 출간된 회고록으로 2023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회고록 부문, 23년 퓰리처상 전기·회고로 부문 최종 수상작이다.




  책은 저자 후아 쉬의 대학생 시절 짧은 우정을 나눴던 친구의 충격적인 죽음 이후 이어지는 오랜 회상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글로 적어 책으로 엮을 만큼 소중한 우정이라니 오래 사귄 친구일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심지어 처음부터 잘 통한다고 생각한 적 없는, 나와 너무 다르고, 달라서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친구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읽을수록 ‘아니, 아무리 그래도 대학 시절에 잠깐 사귄 친구에게 이 정도로 과몰입을 한다고?’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과몰입 지점 그러니까 사건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 나만이 사건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자의식 과잉, 자기 파괴적이면서 자아도취적이기까지 한 죄책감의 발현 등에서 숭고한 느낌보다는 소위 중2병 감성, 손발 오그라드는 느낌에 괴로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애석하게도 그게 바로 나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건 내가 더 이상 이 감정에 깊이 공감하기 어려울 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구나!’




  왜 나는 가슴 절절한 우정의 회고록을 읽으면서조차 냉소적인 태도를 놓지 못할까. 내겐 이렇게 솔직하고 간절하게 감정을 쏟아 본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내가 여전히 음악 취향으로 사람을 가려 사귀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런 감정의 유효기간은 짧다. 아니 어쩌면 끝나지 않는다. 저자와 비슷한 나이대에 문학과 예술에 조금씩 발을 담가보고 동일한 정도는 아니어도 비슷한 감정의 진폭을 헤쳐온 내게 이 글은 감추고픈 흑역사를 들추는 기분마저 자아냈다.




  짧은 우정 뒤에도, 죽음 이후에도 우정은 이어질 수 있을까. 상호 호혜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선물은 유효할까. 저자는 대학 생활을 끝내지 못한 친구를 위해 자신의 남은 대학 생활을 공유하기도 한다. 자기가 인상 깊게 읽은 책과 논문들, 직접 찾아가 들은 강의, 새롭게 듣기 시작한 음악들을 알려준다. 일방적으로 정보만 전하는 게 아니라 친구와 함께 읽기도 했던 책, 함께 쓴 시나리오, 기약 없는 약속과 담배를 태우며 나눴던 대화들과 연결하며 의미를 만들어내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우정에 관한 이야기라면서 부모님 얘기는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의아하기도 했다. ‘이민 1세대는 생존을 고민하고 이민 2세대는 부모가 겪어 온 삶을 이야기한다.’ (p.35)라는 문장에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이 정체성을 빼놓고서는 우정의 시작과 그가 겪은 불안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외부인들은 생김새로 아시안 아메리칸을 같은 부류로 뭉뚱그리지만 부모 혹은 조부모의 이주와 정착 시기에 따라 아시안 아메리칸들 사이에도 미묘한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 출신 국가에 따른 문화적 차이, 부모와의 문화적 괴리가 여타 미국인들과는 다른 특질을 형성하도록 영향을 준다는 것. 그 배경을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론 내가 ‘그걸 굳이 왜 언급하지’라며 따질 주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 국가에서 나고 자라 내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나고 자라 그 나라말을 쓰면서도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감각을 이해할 수조차 없다. 다인종 다문화 국가의 일원이자 소수자인 입장에서 어쩌면 자신의 뿌리와 그에 따를 수밖에 없는 혼란을 정의하며 글을 써나가는 것은 ―나처럼 그 감각에 무지한 독자를 깨우치기 위해서라도― 일견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전쟁으로 인해 미래가 창창한 젊은 친구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사회학자의 말을 인용하는 부분에서도 이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과 배경은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과거의 메시지를 참고하려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가 넌지시 암시하듯, 이 논문은 이렇게 전사한 동료들에게 우리가 진 빚이다. 논문에서 전 세계의 선물들을 잇달아 추적하며 역사적 사실로 과거를 깊이 있게 파헤쳐 가는 것은 지금 서 있는 현재의 가능성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진실에 다가가기』 (후아 쉬, RHK코리아, 2023) p.157



<사회학 연보> 특별판에 실린 모스의 <증여론>을 읽고 ‘일련의 불가능한 가능성을 꿰뚫어 보며 잃어버린 세계를 구하려 했다.’(p.157)는 해석을 이끌어 낸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이 책에서 인용하는 몇몇 책들은 저자가 제시하는 해석 덕분에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도 그중 하나다.



진실한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침울하기보다 큰 기쁨을 주게 될 테고 기쁨에 굴복하는 게 내가 너를 버린다는 뜻은 아닐 거야. 단지 분노와 증오의 이야기가 아닌 사랑과 의무의 이야기가 되고, 꿈, 한때 미래를 기대했던 기억, 다시 꿈꾸고픈 갈망이 가득할 거야. 지루할지도 몰라. 네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테니까. 그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라 시가 될 거야. 

『진실에 다가가기』 (후아 쉬, RHK코리아, 2023) p.278



  처음 읽고 나서 책장을 덮고는 뭐야 좀 시시하네라고 생각했는데 서평을 쓰기 위해 밑줄 친 부분을 다시 읽어보면서 이상하게 질문이 점점 늘어났다. 이를테면 역사의 편찬 행위와 자신의 강박적인 기록 행위를 겹쳐 보며 이것이 단 하나의 진실일 수 있는가 돌이켜보는 부분, 지나간 일화를 반복해서 떠올릴수록 점점 흐릿해지고 더 불분명해지는 기억의 불완전성 같은 것에서 대해 나도 덩달아 물음표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비극 앞에서 사람들은 슬픔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동시대의 역사적인 비극을 사람들은 저마다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왜 누구는 진실을 외면하려고만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 글 쓰는 행위가 결국 그를 데리고 가는 곳은 어디인지, 피해자들에게 좀 더 수월하게 감정을 언어로 받아쓸 수 있는 사람이 친구로, 가족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서술된 슬픔과 문자로 옮겨지지 못하고 사라진 슬픔에 대해서도 나아가 이런 글을 읽으며 나는 희생자와 생존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추천하고픈 사람


때이른 죽음과 갑작스러운 상실에 슬퍼하고 있는 사람


시간이 지나도 지금의 슬픔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불안과 기대로 뒤엉킨 20대를 지나고 있는 사람


이민 2세대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혼란을 이해해 보고 싶은 사람


90년대 미국 대학생이 즐겨듣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찾는 사람




* 이 서평은 네이버 이북까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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