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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역사 - 알지 못하거나 알기를 거부해온 격동의 인류사
피터 버크 지음, 이정민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4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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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 유럽에 관한 혁신적인 주제와 연구 방법론으로 문화사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피터 버크는 1937년 런던 출생으로 예수회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서식스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강의했고 현재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이매뉴얼 칼리지 종신 석학교수다. 국내에 먼저 소개된 책으로는 『폴리매스』, 『지식의 사회 1·2』, 『지식은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하는가』, 『문화 혼종성』, 『문화사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무지가 유용하다는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결국 ‘누구에게 유용한 것인가?’라는 통찰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무지의 부정적인 면이 긍정적인 면보다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터 버크 『무지의 역사』 (한국경제신문, 2024) 21쪽
『무지의 역사』는 부제처럼 ‘알지 못하거나 알기를 거부해온 격동의 인류사’를 이야기한다. 책은 1부 사회의 무지와 2부 무지의 결과로 나뉜다. 1부에서는 인간 사회에 자리한 무지를 살펴본다. 무지의 종류, 철학자들의 견해, 개인의 무지와 집단의 무지, 무지의 연구, 종교·과학·지리학의 무지 등 무지의 역사를 다룬다. 2부에서는 전쟁·비즈니스·정치 분야에서 찾을 수 있는 실패의 흑역사를 줄줄이 나열하며 저자가 앞서 언급한 무지의 부정적인 면들을 낱낱이 보여준다.
무지의 사회학은 ‘누가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와 같은 질문에서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무지하다. 다만 무지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독자들은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이 명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피터 버크 『무지의 역사』 (한국경제신문, 2024) 24쪽
역사란 반복되어서는 안 될 흑역사를 갈무리한 부분이 많고 흑역사란 필연적으로 무지와 떼려야 뗄 수 없기에 서구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 상당수가 예시로 등장한다. 대부분은 시간 순으로 끌고 가지만 주제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는 서술도 있어 읽다가 집중을 잃으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이렇게 어리석은 와중에도 용케 여태 생존해 왔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든다. 인류의 역사가 그동안 얼마나 허접하게, 근근이 이어져 왔는지를 깨닫고 겸손해지기까지 한다. 치명적인 재앙을 피하기 위해 과거를 거울 삼아 현재의 무지를 돌아보기에도 바쁜 와중에 안타까운 점은 지금도 이런 무지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한 의사결정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과거는 과거고 지금은 지금’이라는 오만으로 무장한 무지는 여전하다.
정보가 너무 없어도 문제고(소문, 음모) 정보가 너무 많아도 문제(필터링)라는 부분에서도 무지에 있어서 정답은 없다는 것에서 조금 답답해지기도 했다. 모든 걸 안다고 해서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있긴 한가? 애초에 안다는 것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안다는 것인가? 무지가 말끔히 해소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결정이란 없으니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다.
인용이 많은 만큼 각주의 양도 상당한데 언급한 책들 중 한국어로 번역된 책의 제목도 함께 실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애당초 이런 주제에 흥미를 가질 독자라면 각주를 그냥 넘길 리 없을 텐데 왜 이렇게 실었을까? 출간 일정상 시간이 없어서 생략한 것인지, 알고도 굳이 전부 실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여 싣지 않은 것인지, 이런 부분에서 깊은 아쉬움을 느낄 독자를 고려하지 못한 편집부의 무지 탓인지?
서구 역사 속의 의도적 무지를 접하고 보니 우리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무지에 파묻힐 위기에 처한 사건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이 환기시킨 무지의 영역. 광주 5.18과 제주 4.3처럼, 그리고 세월호 참사와 더 가깝게는 이태원 참사와 같이 무지가 초래하고 무지로 은폐하려 하는 사건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을 들게하는 책이었다.
추천하고픈 독자
피터 버크의 책을 접한 적 있는 독자
무지의 종류가 많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사람
가짜 뉴스나 왜곡된 진실 등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
우리 역사 속 의도적 무지에 대해 고찰해 보고 싶은 사람
인간은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궁금한 사람
* 네이버 이북 카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