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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근대 여명기의 거인들 1:라블레
이환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7년 8월
평점 :
품절
사실 라블레라는 이름은 얼핏 들어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숙제로 읽게된 이 책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해 해답의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만일 내가 전공 공부를 계속한다면 그것이 무엇에 쓸모가 있나 하는 의문이었는데, 모든 일이 쓸모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삶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블레의 이력은 특이했다. 처음에는 수도사로 시작해서, 의사가 되고, 나중에는 소설가가 된다. 하지만 그다지 관계없어 보이는 직업들 사이에는 '위마니슴'이라는 일관된 정신이 깔려있다. 하지만 라블레가 자유롭게 그의 모든 생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6세기의 프랑스에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라블레는 그저 침묵하고만 있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고자 했고, 소설이라는 장르, 풍자라는 방법을 택하였다고 보여진다.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라블레는 비겁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쩌면 그는 그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한번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리고 죽음을 택하는 것 보다, 살아남아서 어떤 식으로든 계속 비판하고 글을 남기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다. 몇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라블레는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젊은이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라블레는 중세의 잠에서 깨어나 두리번거리고 있던 시대에, 새로운 인간상을 탐구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인간은 신에게 독립을 선언했지만 그 다음 길은 아직 정해진 바가 없었다. 사실, 신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은 부자유스러울 지 모르지만, 대신 책임져 줄 대상도 있고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뇌하지 않아도 된다. 라블레는 외롭고 불안한 인간의 모습과 그가 가야할 길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지식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 이환 선생님께서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셨던 것일까? 선생님께선, 라블레 연구를 통해 오늘날 한국의 문제를 짚어내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소설을 쓴 라블레나, 라블레를 연구하신 이환 선생님이나, 그 연구의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학생들이나 결국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개인의 학문적 호기심 충족을 넘어서, 인문학이 가야할 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