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 우리시대의 지성 5-011 (구) 문지 스펙트럼 11
주경철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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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약하는 자들은 지식과 사랑을 모두 망쳐놓는 놈들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은 이런 말로 시작되는 작고 얇은 책이다. 이런 책에 약 열 다섯 학자의 저서가 소개되어 있으니 요약본이 분명한데, '책머리에' 가 이런 말로 시작되고 있어 대체 책을 읽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의아스럽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까지 끌어오지 않아도 요약된 텍스트들이 원래의 텍스트를 얼마나 빈약하게 만드는지는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 책은 서양사의 명저들에 대한 단순한 요약본이 아니다. 저자는 전공자가 아니면 읽기 어려운 논문과 책들을 읽고 나름대로 조리해서, 비전공자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었다.

저자가 선택한 재료들은 특히 두 가지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온다. 첫째로, 어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들에 대한 서양 역사학자들의 해석과 논쟁 자체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책을 읽든지 그 안에는 '객관'으로 가장한 저자의 주관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같은 사실을 놓고 벌어지는 학자들의 각기 다른 해석과 치열한 토론 - 때론 싸움에 가까운 - 들을 보여줌으로써, 역사를 보는 시각에 대해서까지 생각하게 해 준다.

두 번째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영역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간 배웠던 역사들에서는 주로 왕조의 이야기, 정치 세력이 바뀌는 이야기가 골격이 되고 그 외의 이야기들은 곁다리들처럼 자리했다. 그러나 이 책의 첫 장을 장식하는 이야기는 '빈민과 걸인의 역사'이다. 또한 저자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사회경제사를 전공했기 때문인지 경제적인 요인이 어떻게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내용들도 찾아볼 수 있다.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연구들도 등장하고,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병균들이 인간사에 미친 영향들도 보여준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본래 학부 수업용으로 준비한 프린트물들이었다고 한다. 역사 속의 새로운 사실들과, 새로운 시각들, 역사학의 거장들의 저서를 간단하게나마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수업은 유익하고 재미있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읽었다면 그가 한 말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여기 적어도 한명이 요약서를 읽고 역사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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