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게 날개 달아주기 - 이외수의 감성산책
이외수 지음, 박경진 그림 / 해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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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이든 사람은 자기가 두 번 다시 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젊은이는 자기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잊고 있다.-14쪽

10 남을 욕하고 싶을 때는 그가 당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자는 아름다운 것들과 결합하고 추악한 마음을 가진 자는 추악한 것들과 결합하게 되며 사랑이 가득한 마음을 가진 자는 사랑이 가득한 것들과 결합하고 미움이 가득한 마음을 가지는 자는 미움이 가득한 것들과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21쪽

18 퇴근길에 일순, 거리가 낯설어 보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고, 망연자실, 내가 누구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가슴 밑바닥에 놀빛으로 흥건하게 고여드는 슬픔 한 사발. 그 슬픔 한 사발의 정체는 무엇일까요.-33쪽

45 예술 아닌 자연은 없다. 당신이 손 대지만 않는다면.-70쪽

52 나무들은 혹독한 추위가 없으면 뿌리가 강인해질 수 없고 찌는 듯한 더위가 없으면 열매가 여물 수가 없다.-87쪽

54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자기밖에 모르는 죄.-89쪽

61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소리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로 그 소리를 밖으로 표출할 수 없다. 하다 못해 실낱같은 소리라도 밖으로 표출하려면 실낱같은 바람 한 가닥이라도 만나야 한다. 이럴 때 만남이란 얼마나 의미 깊고 소중한 것이냐.-98쪽

71 누군가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 후회할 일이 많겠지만 누군가의 행동을 믿고 따르는 자 후회할 일이 적으리라.-111쪽

76 진실로 글을 쓰고 싶다면 놀부처럼 살지 말고 흥부처럼 살아라. 다리가 부러진 제비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껴라. 글을 쓰는 일이 도를 닦는 일과 무엇이 다르랴. 내 마음 밖에 있는 것들을 모두 내 마음 안으로 불러들여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라.-118쪽

78 재주만의 글쓰기를 배우는 일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정신과 영혼이다. 재주만의 글쓰기로는 절대로 정신과 영혼의 글쓰기를 능가할 수가 없다.-120쪽

101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를 하면서 살아가기 위해, 하기 싫은 일 열 가지를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151쪽

160 (무성의한 반복) ‘경험’이란 이름의 학교는 꽤 거친 기관이며, 그곳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 때 훨씬 더 거칠어진다.
한 학교 교장이 적절한 승진 발령을 받지 못했다고 교육감에게 항의했던 경우가 있다.
교장이 말했다.
"결국 내게는 25년의 경험이 있잖소."
그러자 교육감이 말했다.
"아니오, 조. 바로 그 점에서 자네가 틀린 거요. 당신은 한 해의 경험을 25회나 반복했을 뿐이오!"-226쪽

176 교훈은 간직하라고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라고 전해 주는 것이다.-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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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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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감상. 2008년 한 꾸러미가 되어 세상에 나온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을 읽는다. 소설가 김훈이 아닌 수필가(에세이스트) 김훈을 만나는 일을 더 좋아한다는 독자들이 많다. 그의 소설은 대개 읽어 왔지만 수필을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소설보다 더 많이 나와 있는 산문을 독파하는 일은 요원할 듯하다.
수록된 글 열세 편은 다채롭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 맞은편의 어머니, 죽음에 대한 고찰, 글 쓰는 사람 김훈의 모습 등이 전반부를 채우고 있으며 기자 시절 보았던 소방관들의 헌신, 김지하 시인 석방일에 본 박경리 선생의 모습, 화가 오치균과의 대담을 취재한 기록 등이 이어진다. 열한 편의 글에 이어지는 두 편의 글은 강연록을 다듬어 실은 것이다. 전쟁을 겪은 유년기와 대학 시절 『난중일기』를 처음 읽고 훗날 『칼의 노래』를 쓰기까지, 또한 소설가로서 말과 글을 다루는 (김훈 자신의) 의식과 방법이 드러나 있다. 문득 이미 씌어 있는 책을 요약하는 일이 무의미함을 느낀다. 소설에 옮겨간 문장의 흔적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마 만경강에서의 잔상이 소설의 문장을 쓰는 데 실마리가 되었을 것이다.

만경강 갯벌 물고랑에서 석양은 빛의 조각들로 퍼덕거렸다. 나는 내 몸으로 흘러 들어오는 시간의 미립자들을 느꼈다. 그 미립자들은 내 생명을 빠져나가 어디론지 또다시 흘러나갔다. 시간이 내 몸을 드나들었지만, 내 몸에는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이 내 몸을 드나들었지만, 몸은 시간으로부터 버려져 있었다. 서해의 석양이 수평선 쪽으로 내려앉았다. 갯벌에서 퍼덕이던 빛의 조각들은 마지막 잔광에 뒤채이면서 어둠 속으로 잠겼고, 이윽고 갯벌도 바다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 곳에도 도달할 수 없었다. (67~68쪽)

시간의 미립자들 틈새로 노을은 스몄는데 노을은 시간의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서 시간에는 노을이 묻지 않았다. (『공무도하』 315쪽)

열세 편의 글을 읽고 나면 어딘지 허전하다. 조금만 더 시일을 늦추어 몇 편의 글을 더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인지 오치균의 그림과 함께 김훈이 지금까지 펴냈던 책의 서문(작가의 말)을 모두 정리해 두었다. 소설로만 봐도 『빗살무늬토기의 추억』부터 『남한산성』까지 13년의 세월이 담겨 있는 셈이다.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 소감 또한 덧붙여져 있다(이외에도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문서화된 소감이 없어 부득이하게 제외된 듯하다). 이 문장들 또한, 허투루 읽을 수 없다. 부록이라는 이름이 조금 민망하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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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일반판)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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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의 이름을 맹신한다. 시인의 이름만 믿고 읽을 수 있는 시집은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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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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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3월 20일 아침. 샌드위치 휴일임에도 출근길에 올랐던 사람들은 원인 모를 고통을 호소하며 지하철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옴진리교가 벌인 희대미문의 ‘집단 살상’은 무고한 피해자 수천 명을 낳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르포르타주 『언더그라운드』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책이었다. 사린 사건이 주는 충격이 그 첫째 이유이고,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르포’라는 점이 둘째 이유이다. 근간 『1Q84』와의 연관성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1995년의 나는 나이도 어렸을 뿐더러 ‘삼풍’의 충격에 압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사린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자랐다. 도쿄 지하철 사린 살포 이전에 마쓰모토 사린 사건이 있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몰랐다. (1994년 우리나라에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양국 모두 사건사고로 인해 침울한 시기였던 것이다.) 하루키가 1년씩이나 사린 사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러 다닌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그가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이 직접 취재를 해야만 했던 이유를 책의 처음과 끝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 가련한 젊은 샐러리맨이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던 이중의 심각한 폭력에 대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이건 이상한 세계에서 온 것’ ‘저건 정상적인 세계에서 온 것’이라고 이론적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들 당사자에게 그것이 무슨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그들에게는 그 두 종류의 폭력을 여기와 저기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보이는 겉모습이야 다를지언정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둘은 같은 지하의 뿌리에서 뻗어나온 동질적인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그 편지를 쓴 여성(들)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또한 그 남편(들)의 사정을 알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이렇게 가혹한 이중의 상처를 생산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도 좀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머리말> 중에서, 13쪽)

범행을 일으킨 자들은 ‘옴진리교’라는 신흥 종교의 일원이다. 옴진리교는 이전에도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 마쓰모토 사린 사건 등을 일으켰으나 그들에 대한 당국의 수사 또는 제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떻게 종교 법인이 될 수 있었으며 아무렇지 않게 세를 확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분노한다. 이러한 경찰(과 공공기관)의 과오는 사건 당일과 사건 발생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살포된 사린이 담겨 있던 봉투는 모두 다섯 개. 다섯 곳의 차량 안에서 살포된 사린은 총 12명 사망 5,500여명 중경상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불러왔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운행을 지속했던 지하철과 동시다발적인 상황 발생에 갈피를 잡지 못했던 구급대, 사건 소식이 보도되지 않은 시점 초기 대응에 미흡했던 병원들로 인해 피해는 더 커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의 분노는 이들보다도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를 저지른 옴진리교를 향해 있고, 분노를 넘어 혐오의 감정까지 드러난다. (각 인터뷰의 말미에 피해자들이 ‘옴’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아마 하루키가 취재를 마무리할 즈음에 질문한 것인 듯하다. 취재에 응한 피해자들은 대개 분노·혐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체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체념적이라고 해서 ‘옴’을 살려두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키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60여명은 전체 피해자의 수를 생각해 볼 때 극히 일부일 뿐이다. 지하철에 탑승하고 있었던 사람들 외에도 쓰러져 있던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있다. 피해자들은 호흡 곤란, 시야 협착, 어지럼증 등의 증세를 겪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대개 시력과 기억력의 감퇴를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신체적 피해는 우연히 사고를 당한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샌드위치 휴일이었음에도 출근을 했던 사람들, 월요일 회의가 있어 평소보다 이른 시간의 차를 택했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날따라 2분 늦은 버스 때문에 다음 차를 탈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고 우유를 사러 가는 날이어서 다른 노선의 지하철을 탔다가 변을 당한 사람도 있다. ‘하필이면’ 그 시각, 그 노선의 지하철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국가는 어떻게 책임져 줄 것인가, 피해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주변 사람들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는 2차 피해, 매스컴의 그릇된 보도 행위로 인한 정신적인 피해라고 한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 혹은 피해자의 가족이 아닌 이상 그들이 보이는 증상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때로는 삐뚠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는 것인데(물론 깊은 이해로 도움을 주는 사람도 있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오해를 사고 만다는 점이 억울할 것이고 그것은 다시 사린 사건에 대한 분노, 혐오를 일깨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스컴의 보도 행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매스컴은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옴’의 행각, 피해자 통계, 수사 과정 등등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에만 집착, 사건을 편집·재생산하여 내보냈다. 흔한 말로 사람을 두 번 죽인다는 얘기가 있는데, 매스컴의 행태로 인해 피해자들은 몇 번이고 같은 고통을 되풀이해야 했던 것이다.

옴진리교의 사린 살포 사건은 우리에게도 일깨우는 바가 많다. 시기상으로 본다면 앞에서도 말했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사건의 배경을 본다면 지하철 참사 등을 떠오릴 수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의 경우 ‘눈에 보이는’ 참사였다는 점, 일본의 경우 ‘보이지 않는’ 피해를 유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가 겪은 붕괴·지하철 사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을 애도했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위로했다. 공공기관보다는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시민들이 힘을 모아 그들을 도왔다. 사고를 겪지 않은 사람들도 마음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내가 그 현장에 있지 않았어도 그 고통이 어떠했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어요,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쿄의 지하철 사린 사건은 어떠한가. 그것은 현장에 있지 않고서는 혹은 사린 가스를 들이마셔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진술에서 ‘사람이 쓰러져 있었지만 간질 발작인 줄 알았다’ ‘오늘따라 그런 사람이 많다고만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선이 조금 일찍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을 지연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피해자가 아닌 자들, 그러니까 사건의 방관자들은 이보다 더 협소한 시선으로 생각하고 만다. 단적으로 직장에서 피로를 호소하면 ‘꾀부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시선을 던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고는 타인의 이해를 얻기 힘들고 결과적으로 피해자들의 고통을 배가시킨다. 마치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추리와도 같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고 배려의 마음을 갖는 것,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고 다른 영역으로 내치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사건사고의 주체 또한 차이를 보이지만,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끔찍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는 그에게 있어서 그리고 일본 사회에 있어서도 중요한 저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루키는 일본 사회에 대한 깊은 고찰을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시도했고, 그 결과물로서의 『언더그라운드』는 다시 일본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흉악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물론 사린의 경우처럼 ‘집단’에 의한 계획적인 ‘집단 공격’, 즉 테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살인, 성범죄, 방화 등은 물론 ‘힘의 논리’에 따른 피해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아마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을, 기억 속에 놔두었다가 언젠가 잊히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것 또한 모두가 같은 생각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르포’가 보다 접하기 쉬운 분야가 되어 더 많은 결과물을 낳고 또한 그것이 널리 읽혀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분노하기를, 그 분노가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서의 분노로 작용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간절한 것은 끔찍한 사건 사고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일, 바로 그것이다. (더불어 하루키에 대한 편견 혹은 불만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언더그라운드』의 앞뒤에 있는 <머리말>과 <지표 없는 악몽>만이라도 일독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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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절판


나는 이제야 내 욕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천장 높이까지 맞춤 책장을 만들어 책을 가득 채우고 싶은 나의 욕망은 느긋하게 그 책들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욕망함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여전히 살아 있음에 유효한 희망 사항이 있다.-1장쪽

나는 책을 읽으면서 살고 싶다. 책을 읽을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하기 싫다고 말한다면 별 핑계도 다 있다고 하겠지만 나한테는 그것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나의 진실이다. 문제는 책 읽을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일을 하지 않으면 책을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균형, 그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1장쪽

지금 이 상태가 최상은 아니지만 나빠질 가능성보다는 나아질 가능성이 많다.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많은 문제는 지나고 나면 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기다리지도 소원하지도 노력하지도 않는다. 다만 책을 읽고 또 읽을 뿐이다. 이것이 내 방식이다.-1장쪽

오래되고 일관된 관계라고 해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것들만 남겨야 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위대하고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것에는 관심 없는 우리이기에 있으나 마나한 이 우정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있으나 마나하다’는 것의 최대 장점은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당히 부담 가는 지나간 이별의 사연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듣고 있게 된다.-2장쪽

막연한 것,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이 스물을 향해 가는 이들과 서른을 향해 가는 이들의 차이인지도 모른다.-3장쪽

정말로 강한 인간은 상처 없는 인간이 아니라 상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일지도 모르겠다.-5장쪽

사실 책에 대한 취향은 사람에 대한 취향과 비슷한 데가 있다. 책의 경우에도 첫눈에 반할 수 있고, 남들이 좋다고 해서 나도 기대했다가 실망할 수도 있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매력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 나만의 사람으로 품고 있기가 어렵다. 오직 나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사람이 세상에 있다면 아마도 오직 나만을 위해서 쓰인 듯한 책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어쩌면 그런 책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6장쪽

다음으로 읽을 책은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아주 많지만 그것에 관해 특별한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그 순서는 무작위이다. 그러나 때로는 무작위로 선택되는 책이 마법처럼 내 상황과 맞아떨어지거나 내 소소한 고민을 해결해 주기도 한다. 분명 내 스스로 발견해 해는 것이겠지만 어떤 때는 그 책이 나를 찾아온 것만 같은 때가 있다.-9장쪽

소설의 가치는 읽는 독자가 결정한다. 평론가들이 뭐라고 쓰든 언론이 뭐라고 떠들든 소설은 읽는 자의 몫이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피력할 수는 있으나 독자가 그것대로 읽지는 않는다. 독자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다가선다. 채린처럼 연애소설에서 위안을 얻을 수도 있고, 어려운 학술 책에서 문학 책 못지않은 예술적 문장들을 찾아내는 이도 있으며, 시대를 따라가는 유행하는 책에서 동질감을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똑같은 책을 읽고도 우리는 저마다 다른 감정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 것이다.-11장쪽

사랑에 빠진 자를 설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사랑에 빠진 자들은 정상이 아니다.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는다. 그들이 자신들 이외의 것을 살필 수 있다면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 사랑도 유효기간이 있다. 이성을 잃을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시기는 반드시 지나간다. 진짜 사랑이 문제가 되는 건 그 다음부터인 것이다.-12장쪽

책을 이해하는 것은 쉽다. 책은 이미 한 사람을 완전히 통과해서 정리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작가처럼 일관된 어조로 자신을 설명할 수도 없고 상황을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일지 다만 짐작할 뿐이다.-12장쪽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은 내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바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며 내가 없는 거기에서 나를 사랑한다.’-16장쪽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인가. 저마다의 케이스가 있어 어떤 경우에도 정확히 대입시킬 수 없는 것. 그래서 저 자리에서는 용서해도 될 일이 이 자리에서는 죽이고 싶을 만큼의 일이 되기도 하고, 저 자리에서는 이 사람의 잘못이 이 자리에서는 저 사람의 잘못이 되는지도 모른다.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할 일은 가까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밖에 없다. 이 세상에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게 지치도록 많은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18장쪽

이 작은 기계의 세계는 오묘하고도 기이하다. 몇 자 이내로 할 말을 요약해야만 한다. 가능한 한 간결해야 한다. 세계는 점점 작아지고 요약돼 간다. 책 한 권으로 쓰일 만한 인생이 끝내는 몇 줄의 묘비명으로 요약되는 것처럼. 그러나 짧고 단순하고 강렬하게, 라는 모토는 내 삶과 거리가 멀다. 나는 주절거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살고 싶다.-19장쪽

코니 팔멘은 『자명한 이치』에서 ‘삶이 나를 필요로 했다. 내가 없으면 삶도 없다.’라고 썼다. 이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책이 나를 필요로 했다. 내가 없으면 책도 없다.’ 나에게 읽힘으로써 비로소 나의 인생에 온전히 자기 몫의 시간을 가지게 될 책들. 향기롭고 고약하고 나약하고 강하고 습하고 건조하고 슬프고 즐겁고 위태롭고 나른하고, 결국은 저마다의 거역할 수 없는 매력으로 나를 사로잡을 나의 책들.-25장쪽

내가 읽는 책의 대부분은 소설이다. 어쩌다가 시집이나 인문학이나 철학 책을 읽기도 하고, 병원이나 은행에서 기다리는 시간에는 잡지를 읽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언제나 소설만 읽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왜 책을 읽으면서 무얼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미 다른 시간에 다른 방법으로 배울 만큼 배우고 있으면서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연애하는 법, 돈 버는 법, 여행하는 법까지 모조리 책을 통해 배우기를 원한다. 그래서 2주 안에 혹은 한 달 내 그것들을 정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책을 읽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다 알다시피 나는 그런 목표를 가진 인생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꼭 이루어야 할, 남들과 똑같은 인생의 목표는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소설을 읽을 것이다.
소설에는 철학도 있고 여행도 있고 인문학적 지식도 있고 과학도 있고 역사도 있고 우주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 나는 소설이 가진 포괄성과 유연성이 아주 마음에 든다. 가능하다면 나는 소설 같은 인간이 되고 싶다.-25장(계속)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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