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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짧은 감상. 2008년 한 꾸러미가 되어 세상에 나온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을 읽는다. 소설가 김훈이 아닌 수필가(에세이스트) 김훈을 만나는 일을 더 좋아한다는 독자들이 많다. 그의 소설은 대개 읽어 왔지만 수필을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소설보다 더 많이 나와 있는 산문을 독파하는 일은 요원할 듯하다.
수록된 글 열세 편은 다채롭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 맞은편의 어머니, 죽음에 대한 고찰, 글 쓰는 사람 김훈의 모습 등이 전반부를 채우고 있으며 기자 시절 보았던 소방관들의 헌신, 김지하 시인 석방일에 본 박경리 선생의 모습, 화가 오치균과의 대담을 취재한 기록 등이 이어진다. 열한 편의 글에 이어지는 두 편의 글은 강연록을 다듬어 실은 것이다. 전쟁을 겪은 유년기와 대학 시절 『난중일기』를 처음 읽고 훗날 『칼의 노래』를 쓰기까지, 또한 소설가로서 말과 글을 다루는 (김훈 자신의) 의식과 방법이 드러나 있다. 문득 이미 씌어 있는 책을 요약하는 일이 무의미함을 느낀다. 소설에 옮겨간 문장의 흔적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마 만경강에서의 잔상이 소설의 문장을 쓰는 데 실마리가 되었을 것이다.
만경강 갯벌 물고랑에서 석양은 빛의 조각들로 퍼덕거렸다. 나는 내 몸으로 흘러 들어오는 시간의 미립자들을 느꼈다. 그 미립자들은 내 생명을 빠져나가 어디론지 또다시 흘러나갔다. 시간이 내 몸을 드나들었지만, 내 몸에는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이 내 몸을 드나들었지만, 몸은 시간으로부터 버려져 있었다. 서해의 석양이 수평선 쪽으로 내려앉았다. 갯벌에서 퍼덕이던 빛의 조각들은 마지막 잔광에 뒤채이면서 어둠 속으로 잠겼고, 이윽고 갯벌도 바다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 곳에도 도달할 수 없었다. (67~68쪽)
시간의 미립자들 틈새로 노을은 스몄는데 노을은 시간의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서 시간에는 노을이 묻지 않았다. (『공무도하』 315쪽)
열세 편의 글을 읽고 나면 어딘지 허전하다. 조금만 더 시일을 늦추어 몇 편의 글을 더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인지 오치균의 그림과 함께 김훈이 지금까지 펴냈던 책의 서문(작가의 말)을 모두 정리해 두었다. 소설로만 봐도 『빗살무늬토기의 추억』부터 『남한산성』까지 13년의 세월이 담겨 있는 셈이다.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 소감 또한 덧붙여져 있다(이외에도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문서화된 소감이 없어 부득이하게 제외된 듯하다). 이 문장들 또한, 허투루 읽을 수 없다. 부록이라는 이름이 조금 민망하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