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중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400
홍정선.강계숙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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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의 강한 중력, 앞으로도 한국 시단의 무한한 중력이기를 바랍니다. 시의 배치는 발간호 순이 아니라 시인의 연배 순인 듯하네요. 황동규에서 유희경까지, 응축된 힘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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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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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꾸 가슴이 떨려요…… 가슴이 아프도록 뛰어요……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이러다 죽을 것만 같은데……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요.’
‘나도, 나도 그래, 가슴이 자꾸 뛰어. 가슴이 저리도록 뛰는데 멈출 수가 없어……’-33쪽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그러니까 너는,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50쪽

"하지만 가끔은,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라서 좋은 점에 대해 생각해요. 세상에 하느님만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따로 있다면, 정말 그렇다면, 거꾸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도 따로 있지 않을까 하고…… 그게 결코 하느님을 능가할 만한 일은 못되더라도, 하느님도 부러워할 만한 몸짓들이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고요."-136쪽

터무니없단 걸 알면서도, 또 번번이 저항하면서도, 우리는 이해라는 단어의 모서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인간은 이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리게 된 걸까? 그리고 왜 그토록 자기가 느낀 무언가를 전하려 애쓰는 걸까? 공짜가 없는 이 세상에, 가끔은 교환이 아니라 손해를 바라고, 그러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또 왜 존재하는 걸까.-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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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독서 - 책을 읽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여행자의 독서 1
이희인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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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독서, 독서가의 여행

#1 나는 제대로 된 여행을 한 적이 있을까. 지금부터 나에게 묻는다. 여행을 잘 짜여진 계획 아래 그곳의 풍광과 별미를 맛보는 행위로 정의하자, 너는 여행을 한 적 있는가? “없다.” 여행을 어느 날 갑자기 너를 덮친 충동이 이끄는 대로, 제대로 된 행장도 없이 몸을 움직이는, 종내에는 그곳에 마음을 빼앗기는 행위로 다소 장황하게 정의하자, 너는 여행을 한 적 있는가? “없다.” 한 번만 더 묻자. 여럿이든 혼자서든, 장소를 불문하고, ‘여행’이라 부름직한 여행을 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는가? “없다.”

#2 나는 여행을 한 적 없다. 단발성 관광을 즐겼을지언정 여행이라 부를 만한 짓을 여태껏 하지 못했다. 물론 마음먹지 않은 건 아니다. 나는 수없이 떠나고 싶어했고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었다. 문제는 돈도 시간도 주변 상황도, 함께할 사람도 아니었다. 무작정 여행하는 데 돈은 문제되지 않는다. 급전을 당기면 되니까. 시간도 문제되지 않는다. 모든 일을 내팽개치면 되니까. 주변 상황 또한 마찬가지. 딱히 함께할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떠나고 싶어, 노래만 부를 줄 알았지 그건 막연한 몽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때마다 어디로든 떠났더라면 나는 지금 다른 곳에 있거나, 이곳에 있어도 다른 일을 하고 있거나, 이곳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여행한 적 없는 사람이란, 나 자신이 그렇지만, 척박한 토양일 뿐이다.

#3 『여행자의 독서』를 택한 이유는, 그런 이유로 간단했다. 대리만족, 간접경험 따위의 구태스러운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못할(못한) 바에야 남의 여행이라도 훔쳐보자는 심정. 여행하는 와중에 독서까지 한다는 것은 풍광과 별미를 동시에 즐기는 일과 다를 게 무엇인가. 목차를 펼친 뒤에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한 여행지는 기껏해야 북미나 유럽 같은, 돈 있다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오가는 ‘상품 여행’의 표준이었지 책의 저자가 택한 곳들이 아니었다. 저자의 여행지는 실로 다양했고,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북반구와 남반구, 동과 서를 단숨에 오갈 수 있다는 것이 책을 읽기 전부터 나를 긴장시켰다. 더욱이 도중 등장하는 미얀마, 라오스 같은 이름을 볼 때 스친 의문들. 그곳을 어떻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인지, 시간을 쪼개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나 한지……. 나는 궁금하고 또 궁금했다. 나는 목차만 보고도 이 책을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책이라 믿게 되었다.

#4 요즘 ‘책에 대한 책’의 인기가 높다고 한다. 재생산된 텍스트인 셈인데 사람들은 원전보다는 ‘친절한’ 텍스트를 선호하는 모양이다. 그런 책을 읽으면 왠지 원전까지 함께 읽은 듯한 착각을 가져다주기 때문일까. 아니, ‘책을 부르는 책’을 찾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마치 이미 읽은 듯 으스대려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책을 소개받고(추천받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자의 독서』가 그렇다. 이 책은 ‘책을 부르는 책’이라 부르기 좋다. 책의 목차를 자세히 보면 여행지 못지않게 소개되는 책 또한 다채로운 것을 볼 수 있다. 일찍부터 세계문학(외국문학)에 흥미를 갖지 못한 데다 읽기만 하면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울렁증―이게 고쳐지질 않는다―때문에 나의 독서는 주로 우리 문학 위주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소개하는 책들(주로 문학작품)은 생소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새로운 책을 소개받는 일은 즐거운 일이니까. (개중에는 이미 읽은 책도 더러 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할레드 호세이니의 두 소설,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정도. 너무 적다!)

#5 독서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여행 안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책을 부르는 책’에만 그치지 않고 ‘여행을 부추기는 책’이기도 하다. 각 꼭지의 첫머리에 실린 그 나라의 자연, 도시나 작은 마을의 모습, 사람들의 얼굴을 담아낸 사진이 매우 인상적이다. 물론 책 이야기에 비하면 비중이 적긴 하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그의 발길을 따라 걷는 것은 하나의 좋은 여행 경로가 될 것이다. 저자의 문장은 책을 먼저 읽은 지인이, 여행 다녀온 친구가 나긋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편안하다. 여행지에서 책을 읽는 일이 내게는 앞으로도 꽤 오래 불가능할 테지만 정말로 ‘여행할’ 날이 온다면 부디 저자처럼 움직이고, 생각해 보고 싶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뒤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여행한 적 없는 사람이란 척박한 토양이다. 하지만 굳이 여행을 하지 않아도 좋다. 책을 읽자. 독서하지 않는 사람이란 작은 토양마저 갖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여행자의 독서』는 곧 ‘독서가의 여행’이 되었다. 빨간 장정의 책 한 권이 마음을 달뜨게 한다.

#6 인상적인 여행지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미얀마, 라오스와 남미의 국가들.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은 『그리스인 조르바』와 『내 이름은 빨강』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 책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독자들의 평도 굉장히 좋은 책이라 믿음이 간다. 책을 고를 땐 베스트셀러 목록이 아닌 독자들의 입소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법. 그리고 오르한 파묵. 그의 책 중에서 제대로 읽은 것은 『순수 박물관』뿐이다. 『새로운 인생』은 두 번이나 읽으려다 3분의 1을 넘지 못하고 덮은 적이 있다. 『하얀 성』도 읽었지만 이해가 부족한 탓에 온전히 읽었다고 말하기 부끄럽다. 그의 책을 읽는 일은 녹록지 않다. 아무쪼록 여행 이전에, 독서에 더욱 골몰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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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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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방법: 농담과 환멸

갑작스러웠다. 그날, 늦잠을 갓 떨친 부스스한 정신에 처음 접한 소식은 이게 무슨 농담인가 싶을 정도로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아주 오래된 농담』이었다. 떠올렸다기보다 그것은 절로 떠올랐다. 그때 왜 『아주 오래된 농담』이 떠올랐을까. 꿈이었으면, 하는 생각보다 농담이었으면, 싶은 마음을 가진 것도 이 소설 때문인지 모른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읽은 『아주 오래된 농담』은 나에게 ‘박완서’라는 이름이 마냥 교과서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 소설이기도 하며, 시간을 쪼개면서 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 소설이기도 하다. 한창 추운 날 못 가본 길로 떠나신 분을 추억하며,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다독은 아니더라도, 이 책 저 책 가리지 않고 읽다 보면 내용을 잊기 쉽다. 하물며 그것이 소설투성이라면 저마다의 세계가 뒤죽박죽이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오래 전에 읽은 책이 기억에 남기란 어려운 일이다. 큰 충격을 받거나 주체 못할 감동을 얻거나 하지 않는 이상 ‘내 인생의 책’이라는 서가에 꽂히는 일은 쉽지 않다. 『아주 오래된 농담』은 그런 점에서 예외였다. 읽은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작품의 디테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책을 읽는 순간의 느낌이 고스란했다. 어릴 적 현금이 살던 집의 능소화, 진한 주홍빛 능소화의 이미지. 영빈과 현금이 중년 나이에 만나 쾌락을 즐길 때의 위태로움. 영묘의 억눌린 울분과 경호의 죽음이 주는 허탈감. 새로 읽으며 희미해진 맥락을 바로잡고 이면의 의미를 깨치는 것이 새삼 다시 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게 했다.

초등학교 동창인 영빈과 광은 현금에게 ‘점찍혔다’는 착각을 한 모양이다. 그건 두 사내의 은근한 경쟁을 일으켰을 테지만, 세 사람은 저마다의 삶으로 흡수되고 만다. 세월이 흘러 영빈은 그를 찾아온 광으로부터 현금의 소식―그녀가 이미 결혼했다는 것―을 듣게 된다. 다시 시간이 지나, 자신의 병원에서 우연히 현금을 마주한 영빈은 ‘일탈의 예감’을 느낀다. 그 예감은 적중하여 영빈과 현금은 위험한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현금은 이혼했다).
영빈과 현금의 이야기가 소설의 한 축을 이루고 영빈의 여동생 영묘의 이야기가 다른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묘는 영빈의 여동생, 하지만 그녀는 유복녀로 영빈과의 나이 차도 크다. 자칭 재벌가의 며느리로 들어가게 된 영묘는 남부럽잖은 삶을 살아도 되련만 남편인 경호가 병을 얻게 되면서 그 노릇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영묘의 부탁으로 경호의 진찰을 맡은 영빈은 암의 가능성을 진단하지만 송씨가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구태의 때를 벗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은근히 영묘의 자기 주장을 억누르는 송씨 집안 사람들의 행태는―그것이 영묘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 아니더라도 읽는 이로서도 충분히 느낄 만한― 박완서 문학의 핵심 중 하나인 억압된 여성의 삶과도 상통한다. 영빈 본인은 의식하려 들지 않지만 수경(영빈의 아내)을 통해 드러나는 아들에 대한 은근한 욕심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할 것이다.

이러한 핵심을 하나 더 찾자면 작가의 말에서도 일렀듯 자본주의일 것이다. 그것이 소설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영빈의 형, 영준을 통해 마치 구원자의 모습으로 표상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영준은 모교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한 잠시의 귀국 기간 동안 영빈이 해결하지 못했던 영묘의 문제를 정리한다. 영묘의 두 자식과 영묘를 유학길에 오르게 만드는데, 그것은 영준의 재력에 송씨가가 몸을 낮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영준의 말처럼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듯 구는 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일 것이다. 영준은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번 강자이고 그 앞에서 송씨가는 약자일 뿐이다. 영묘는 단숨에 약자에서 강자의 편으로 옮겨 간다. 영묘의 억압을 바라보던 이들에게 영묘의 구원은 통쾌한 일일 테지만 송씨가의 굴복은 씁쓸함을 남긴다.

하지만 허영 가득한 돈 장난도 죽음 앞에는 무력할 뿐이다. 장차 기업을 물려받게 될 경호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재벌가 며느리의 평온한 생활을 꿈꾸던 영묘는 과부가 되었다. 송씨가의 할머니는 그래서 섬뜩한 존재인지 모른다. 미련을 놓지 못하고 연명하는 듯 보이는 송씨가의 실질적인 군주, 경호의 죽음으로 더욱 두드러지는 그 존재가 실상 송씨 집안의 상징이지 않을까. 죽음을 목격하고서도 무력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영빈과 현금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 영원한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의 이별은 전혀 신파스럽지 않다. 소설 내내 보아왔던 현금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도 그녀가 깔끔하고 시원스럽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이별보다는 퇴출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환멸이다. 술기운에 들려온 현금의 마지막 말소리를, 다음날 술에서 깬 영빈은 기억해낼까? 『아주 오래된 농담』이 말하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환멸이다.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라는 현금의 말에 기대자면, 이 소설은 농담이 될 수 없다. 술에서 깬 영빈은 환멸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한 환멸이 소설이 나온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면, 그것은 농담일까 혹은 악몽일까. 짐짓 심란한 체를 하며 『아주 오래된 농담』의 책장을 덮었다.

그날 이후 시간이 꽤 흘렀다. 설이 지났고 이번 달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아직도 그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 남겨진 책으로 언제든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또 그 방편(책)이 많다는 것은 더욱 다행한 일이다. 그래, 그렇게 여기며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조만간 여러 문예지에서 추모 지면을 마련할 예정이다. 전집을 출간한 바 있는 세계사는 내년 결정판 전집(25권)을 준비하고 있다. 부디 아름다운 자리를 만들어 주시기를 독자로서 바란다. (2011.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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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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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도 여전히 유효한, 그래서 더 허탈할 수밖에 없는 ‘농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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