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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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방법: 농담과 환멸

갑작스러웠다. 그날, 늦잠을 갓 떨친 부스스한 정신에 처음 접한 소식은 이게 무슨 농담인가 싶을 정도로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아주 오래된 농담』이었다. 떠올렸다기보다 그것은 절로 떠올랐다. 그때 왜 『아주 오래된 농담』이 떠올랐을까. 꿈이었으면, 하는 생각보다 농담이었으면, 싶은 마음을 가진 것도 이 소설 때문인지 모른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읽은 『아주 오래된 농담』은 나에게 ‘박완서’라는 이름이 마냥 교과서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 소설이기도 하며, 시간을 쪼개면서 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 소설이기도 하다. 한창 추운 날 못 가본 길로 떠나신 분을 추억하며,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다독은 아니더라도, 이 책 저 책 가리지 않고 읽다 보면 내용을 잊기 쉽다. 하물며 그것이 소설투성이라면 저마다의 세계가 뒤죽박죽이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오래 전에 읽은 책이 기억에 남기란 어려운 일이다. 큰 충격을 받거나 주체 못할 감동을 얻거나 하지 않는 이상 ‘내 인생의 책’이라는 서가에 꽂히는 일은 쉽지 않다. 『아주 오래된 농담』은 그런 점에서 예외였다. 읽은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작품의 디테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책을 읽는 순간의 느낌이 고스란했다. 어릴 적 현금이 살던 집의 능소화, 진한 주홍빛 능소화의 이미지. 영빈과 현금이 중년 나이에 만나 쾌락을 즐길 때의 위태로움. 영묘의 억눌린 울분과 경호의 죽음이 주는 허탈감. 새로 읽으며 희미해진 맥락을 바로잡고 이면의 의미를 깨치는 것이 새삼 다시 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게 했다.

초등학교 동창인 영빈과 광은 현금에게 ‘점찍혔다’는 착각을 한 모양이다. 그건 두 사내의 은근한 경쟁을 일으켰을 테지만, 세 사람은 저마다의 삶으로 흡수되고 만다. 세월이 흘러 영빈은 그를 찾아온 광으로부터 현금의 소식―그녀가 이미 결혼했다는 것―을 듣게 된다. 다시 시간이 지나, 자신의 병원에서 우연히 현금을 마주한 영빈은 ‘일탈의 예감’을 느낀다. 그 예감은 적중하여 영빈과 현금은 위험한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현금은 이혼했다).
영빈과 현금의 이야기가 소설의 한 축을 이루고 영빈의 여동생 영묘의 이야기가 다른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묘는 영빈의 여동생, 하지만 그녀는 유복녀로 영빈과의 나이 차도 크다. 자칭 재벌가의 며느리로 들어가게 된 영묘는 남부럽잖은 삶을 살아도 되련만 남편인 경호가 병을 얻게 되면서 그 노릇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영묘의 부탁으로 경호의 진찰을 맡은 영빈은 암의 가능성을 진단하지만 송씨가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구태의 때를 벗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은근히 영묘의 자기 주장을 억누르는 송씨 집안 사람들의 행태는―그것이 영묘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 아니더라도 읽는 이로서도 충분히 느낄 만한― 박완서 문학의 핵심 중 하나인 억압된 여성의 삶과도 상통한다. 영빈 본인은 의식하려 들지 않지만 수경(영빈의 아내)을 통해 드러나는 아들에 대한 은근한 욕심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할 것이다.

이러한 핵심을 하나 더 찾자면 작가의 말에서도 일렀듯 자본주의일 것이다. 그것이 소설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영빈의 형, 영준을 통해 마치 구원자의 모습으로 표상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영준은 모교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한 잠시의 귀국 기간 동안 영빈이 해결하지 못했던 영묘의 문제를 정리한다. 영묘의 두 자식과 영묘를 유학길에 오르게 만드는데, 그것은 영준의 재력에 송씨가가 몸을 낮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영준의 말처럼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듯 구는 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일 것이다. 영준은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번 강자이고 그 앞에서 송씨가는 약자일 뿐이다. 영묘는 단숨에 약자에서 강자의 편으로 옮겨 간다. 영묘의 억압을 바라보던 이들에게 영묘의 구원은 통쾌한 일일 테지만 송씨가의 굴복은 씁쓸함을 남긴다.

하지만 허영 가득한 돈 장난도 죽음 앞에는 무력할 뿐이다. 장차 기업을 물려받게 될 경호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재벌가 며느리의 평온한 생활을 꿈꾸던 영묘는 과부가 되었다. 송씨가의 할머니는 그래서 섬뜩한 존재인지 모른다. 미련을 놓지 못하고 연명하는 듯 보이는 송씨가의 실질적인 군주, 경호의 죽음으로 더욱 두드러지는 그 존재가 실상 송씨 집안의 상징이지 않을까. 죽음을 목격하고서도 무력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영빈과 현금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 영원한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의 이별은 전혀 신파스럽지 않다. 소설 내내 보아왔던 현금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도 그녀가 깔끔하고 시원스럽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이별보다는 퇴출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환멸이다. 술기운에 들려온 현금의 마지막 말소리를, 다음날 술에서 깬 영빈은 기억해낼까? 『아주 오래된 농담』이 말하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환멸이다.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라는 현금의 말에 기대자면, 이 소설은 농담이 될 수 없다. 술에서 깬 영빈은 환멸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한 환멸이 소설이 나온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면, 그것은 농담일까 혹은 악몽일까. 짐짓 심란한 체를 하며 『아주 오래된 농담』의 책장을 덮었다.

그날 이후 시간이 꽤 흘렀다. 설이 지났고 이번 달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아직도 그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 남겨진 책으로 언제든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또 그 방편(책)이 많다는 것은 더욱 다행한 일이다. 그래, 그렇게 여기며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조만간 여러 문예지에서 추모 지면을 마련할 예정이다. 전집을 출간한 바 있는 세계사는 내년 결정판 전집(25권)을 준비하고 있다. 부디 아름다운 자리를 만들어 주시기를 독자로서 바란다. (2011.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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