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독서 - 책을 읽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여행자의 독서 1
이희인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자의 독서, 독서가의 여행

#1 나는 제대로 된 여행을 한 적이 있을까. 지금부터 나에게 묻는다. 여행을 잘 짜여진 계획 아래 그곳의 풍광과 별미를 맛보는 행위로 정의하자, 너는 여행을 한 적 있는가? “없다.” 여행을 어느 날 갑자기 너를 덮친 충동이 이끄는 대로, 제대로 된 행장도 없이 몸을 움직이는, 종내에는 그곳에 마음을 빼앗기는 행위로 다소 장황하게 정의하자, 너는 여행을 한 적 있는가? “없다.” 한 번만 더 묻자. 여럿이든 혼자서든, 장소를 불문하고, ‘여행’이라 부름직한 여행을 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는가? “없다.”

#2 나는 여행을 한 적 없다. 단발성 관광을 즐겼을지언정 여행이라 부를 만한 짓을 여태껏 하지 못했다. 물론 마음먹지 않은 건 아니다. 나는 수없이 떠나고 싶어했고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었다. 문제는 돈도 시간도 주변 상황도, 함께할 사람도 아니었다. 무작정 여행하는 데 돈은 문제되지 않는다. 급전을 당기면 되니까. 시간도 문제되지 않는다. 모든 일을 내팽개치면 되니까. 주변 상황 또한 마찬가지. 딱히 함께할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떠나고 싶어, 노래만 부를 줄 알았지 그건 막연한 몽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때마다 어디로든 떠났더라면 나는 지금 다른 곳에 있거나, 이곳에 있어도 다른 일을 하고 있거나, 이곳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여행한 적 없는 사람이란, 나 자신이 그렇지만, 척박한 토양일 뿐이다.

#3 『여행자의 독서』를 택한 이유는, 그런 이유로 간단했다. 대리만족, 간접경험 따위의 구태스러운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못할(못한) 바에야 남의 여행이라도 훔쳐보자는 심정. 여행하는 와중에 독서까지 한다는 것은 풍광과 별미를 동시에 즐기는 일과 다를 게 무엇인가. 목차를 펼친 뒤에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한 여행지는 기껏해야 북미나 유럽 같은, 돈 있다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오가는 ‘상품 여행’의 표준이었지 책의 저자가 택한 곳들이 아니었다. 저자의 여행지는 실로 다양했고,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북반구와 남반구, 동과 서를 단숨에 오갈 수 있다는 것이 책을 읽기 전부터 나를 긴장시켰다. 더욱이 도중 등장하는 미얀마, 라오스 같은 이름을 볼 때 스친 의문들. 그곳을 어떻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인지, 시간을 쪼개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나 한지……. 나는 궁금하고 또 궁금했다. 나는 목차만 보고도 이 책을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책이라 믿게 되었다.

#4 요즘 ‘책에 대한 책’의 인기가 높다고 한다. 재생산된 텍스트인 셈인데 사람들은 원전보다는 ‘친절한’ 텍스트를 선호하는 모양이다. 그런 책을 읽으면 왠지 원전까지 함께 읽은 듯한 착각을 가져다주기 때문일까. 아니, ‘책을 부르는 책’을 찾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마치 이미 읽은 듯 으스대려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책을 소개받고(추천받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자의 독서』가 그렇다. 이 책은 ‘책을 부르는 책’이라 부르기 좋다. 책의 목차를 자세히 보면 여행지 못지않게 소개되는 책 또한 다채로운 것을 볼 수 있다. 일찍부터 세계문학(외국문학)에 흥미를 갖지 못한 데다 읽기만 하면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울렁증―이게 고쳐지질 않는다―때문에 나의 독서는 주로 우리 문학 위주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소개하는 책들(주로 문학작품)은 생소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새로운 책을 소개받는 일은 즐거운 일이니까. (개중에는 이미 읽은 책도 더러 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할레드 호세이니의 두 소설,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정도. 너무 적다!)

#5 독서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여행 안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책을 부르는 책’에만 그치지 않고 ‘여행을 부추기는 책’이기도 하다. 각 꼭지의 첫머리에 실린 그 나라의 자연, 도시나 작은 마을의 모습, 사람들의 얼굴을 담아낸 사진이 매우 인상적이다. 물론 책 이야기에 비하면 비중이 적긴 하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그의 발길을 따라 걷는 것은 하나의 좋은 여행 경로가 될 것이다. 저자의 문장은 책을 먼저 읽은 지인이, 여행 다녀온 친구가 나긋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편안하다. 여행지에서 책을 읽는 일이 내게는 앞으로도 꽤 오래 불가능할 테지만 정말로 ‘여행할’ 날이 온다면 부디 저자처럼 움직이고, 생각해 보고 싶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뒤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여행한 적 없는 사람이란 척박한 토양이다. 하지만 굳이 여행을 하지 않아도 좋다. 책을 읽자. 독서하지 않는 사람이란 작은 토양마저 갖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여행자의 독서』는 곧 ‘독서가의 여행’이 되었다. 빨간 장정의 책 한 권이 마음을 달뜨게 한다.

#6 인상적인 여행지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미얀마, 라오스와 남미의 국가들.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은 『그리스인 조르바』와 『내 이름은 빨강』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 책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독자들의 평도 굉장히 좋은 책이라 믿음이 간다. 책을 고를 땐 베스트셀러 목록이 아닌 독자들의 입소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법. 그리고 오르한 파묵. 그의 책 중에서 제대로 읽은 것은 『순수 박물관』뿐이다. 『새로운 인생』은 두 번이나 읽으려다 3분의 1을 넘지 못하고 덮은 적이 있다. 『하얀 성』도 읽었지만 이해가 부족한 탓에 온전히 읽었다고 말하기 부끄럽다. 그의 책을 읽는 일은 녹록지 않다. 아무쪼록 여행 이전에, 독서에 더욱 골몰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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