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어도 우리 사이의 언어는 매우 인색하다. … 우리 사이의 언어는 인색했을 뿐 아니라 매번 연약했고 무력했다. 아니, 언어란 애초부터 내 의도를 비껴 가고 있었다는 걸 나는 너를 만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감정을 꿰뚫는 언어는 없었고 그래서 한순간에만 존재하는 무한대의 감정은 정제되고 정제되어 다만 몇 마디로만 남아 불투명하게, 불완전하게 발화되는 것이리라.-17쪽
그날을 기점으로 우리는 다시 타인이 되기 위해, 혼자 남기 위해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 물론 환청과 실제를 가르는 정확한 지점을 표현할 언어는, 내겐 없다. … 그날 우리는 분명 비겁했다고, 서로에게 필요한 것은 배려를 가장한 침묵이 아니라 만지면 느낄 수 있는 체온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른 체하고 있었다고, 우리는 비겁함의 대가로 서로를 깊이 헤라이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타인의 지옥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얻었던 거라고.-21쪽
불안과 집착의 공통점은 절대로 현실을 배반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아닐까. 어제보다 더 큰 불안을 끌어와 배팅해도 현실은 그보다 더 큰 절망을 준비해 놓게 마련이고, 어제의 어제보다 더 강렬한 집착을 키우며 스스로를 소모해도 현실에서 내 손에 닿는 건 한 줌의 공기뿐이다. 어쩌면 나는 우리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을 만큼 나빠질 수 있는 그런 사건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큰 절망과 더 큰 공허를 회피하기 위해 나는 미련한 곰처럼 한껏 몸을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게 미래가 없듯, 우리의 관계에도 미래가 없었으므로.-23쪽
사람이 이전에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내는 힘은, 상처 이후가 아니라 상처의 시간을 견뎌낼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난 후에야 습득된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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