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 쉽게 하기 - 기초 드로잉 -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배운다! 스케치 쉽게 하기 2
김충원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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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 시절, 미술 시간은 내게 소외와 굴욕의 시간이었다. 매 첫 시간이면 들어가는 소묘 실습에 선생님이 아무런 언급도 없이 소재를 던져주고 팔짱을 낀 채 가소롭다는 듯 백지 위에서 방황하는 우리의 손을 내려다보곤 하던 광경이 떠오른다. 그 얼마나 진땀나고 울컥 화가 치솟는 시간들이었던가. 반마다 꼭 있는 미술 학원생들의 능숙한 손놀림에 하얀 바탕 위에 윤곽을 드러내는 사물들, 혹은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친구들의 모습은 또 어찌나 애처롭던지. 그래도 해보겠다고 초등학생도 웃고 갈 그림, 아니 교과서 위 낙서나 다름없는 그것들에 심혈을 기울이는 진지한 얼굴들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고 일면 그립기도 하다. 그 친구들에게 이 책을 보여주면 얼마나 놀라워할지 눈에 선하다.

  스케치 쉽게 하기는 말 그대로 스케치를 쉽게 하는 법, 즉 기교를 가르쳐주는 책이다. 미술 시간에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혹은 무시되었던 기술을 자세히 보여준다. 연필을 쥐는 손가락부터 손목, 팔꿈치, 어깨까지 어떻게 움직여서 선을 긋고 명암을 넣는지 등등에 대해 단계적으로 소개해준다. 책의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미술 시간이면 느꼈던 소외감은 온데간데 없고 이것만 따라하면 될 것 같은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이 얼마나 친절한 책인가.

  물론 이것은 기교일 뿐이다. 중요한 건 책에서 말해주는 기교만이 아니라 이제 막 스케치를 하기 시작한 우리들의 마음자세이다. 저자는 잠깐씩이라도 자주 그리는 습관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완성을 위한 그림 그리기가 아닌 스케치를 하는 과정에서의 몰입 상태와 사물과 풍경의 재발견을 통해 창조력과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것에 그림을 그리는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거리를 걷다가 무심코 바라본 풍경에 매혹되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내 손으로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지. 스케치는 그렇게 우리와 거리가 먼 고난이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우리를 주눅들게 한 건 미술이 아니라 미술 시간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닫자. 그리고 각종 디지털 기기가 넘쳐나 너도 나도 디카를 들고 다니며 셔터를 누르는 이 시대에 소소한 연필 스케치가 주는 남다른 감동을 느껴보자. 이 얇은 책이 나와 당신을 도울 것이다. 다만, 욕심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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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
이청준 지음, 전갑배 그림 / 열림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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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임권택 영화 감독의 <천년학>이 개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득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무렵이 떠올랐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작품 치곤 분량이 꽤 많아서 몇 시간에 걸쳐「선학동 나그네」를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 수업 전이었던가, 후였던가.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영화를 보여 주셨다. 바로 <서편제>였다. 꽤 오래된 영화라 그저 수업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기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마음으로 별 기대없이 본 영화였지만 꽤 몰입했던 것 같다. 언덕길을 지나는 여자와 아비의 모습이 사진보듯 그 이미지가 이제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 책 『천년학』에는 남도 사람 연작인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가 실려 있다. 이번에 개봉했던 영화는 세번째 연작인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작품이 영화화되었다니, 참 감회가 새롭지만, 영화는 아직 못 봤으므로 책 이야기나 해야겠다.

책은 아주 얇고 활자도 큰 편이라 읽는 부담이 적어서 좋았다. 게다가 중간중간 삽화 구경까지 할 수 있어 빈약한 상상력을 보충할 수 있기도 했다. 서편제를 읽으며 영화 장면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고 소리의 빛은 영화와 교과서의 간극을 채우게끔 해주었으며 선학동 나그네는 다시 읽어도 그 여운이 남달랐다.

알다시피, 이 세 연작은 오누이의 여정을 쫓는 것을 주 뼈대로 하고 있다. 아비에 의해 눈이 멀어버린 여자가 한 마리 비상학이 되어 사라져간 이야기. 이 설화적인 이야기엔 한국인의 주요 정서인 한(恨)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한은 소리를 통해 표출된다. 요즘, 클래식을 듣는 이들은 많아도 국악이나 판소리를 듣는 이들은 확실히 적다. 이는 공간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클래식이야 꼭 음악회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도 얼마든지 감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국악이나 판소리는 듣는 것만으론 모자라다. 소리를 하는 이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소리만 하는 게 아니다. 표정과 몸짓으로 그야말로 온몸으로 연기를 한다. 쥐어뜯는 듯한, 혹은 햇덩이를 품은 듯한. 그 햇덩이가 바로 한이며 그것이 뿜어져나올 때 거대한 울림으로써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다.

그 햇덩이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간 이가 이 작품에 나오는 오라비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멀게한 아비에 대한 원한을 삭히고 소리로서 승화시킨 누이. 오누이는 서로의 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서로 갈 길을 가기로 한다. 아비의 유골을 묻고 사라진 누이는 후에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오라비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그들이 사라져간 언덕 위로 백학 한 마리가 하늘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이제 어딜가도 한이 맺힌다느니 한스럽다느니 하는 말을 듣기가 힘들어졌다. 그런 와중에 가슴속에 한덩어리를 품고 그것을 조금씩 갈아 마시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설화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정서가 사라져간 것은 아닐 것이다. 포구가 들판이 되어 더 이상 학이 비상하는 형상을 볼 수 없어져버렸지만 한 여자의 소리가 마을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한 마리 학이 되어 떠도는 것처럼 우리의 가슴 속 어딘가에도 한의 깊은 뿌리는 심어져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편제를 보고 천년학을 본 이들의 가슴이 묵직해져 오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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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아내의 불안 범우문고 115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범우사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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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 흑과 백의 자아 분열

대서양 한복판 여객선 위, 체스 외에는 아무 것도 할줄 모르는 체스 마이스터 첸토비치와 체스를 실제로 만져본 일이 거의 없는 B박사와의 체스 대결이 펼쳐진다. 시합이 진행될 수록 휴식시간이 길어지고 B박사는 예의 침착과 여유를 잃고 극심한 조급증에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이상행동을 보이는 것은 시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상황을 예견까지 하고 있다. 그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상대가 수를 놓기까지의 시간이 길어질 수록 그는 점점 미쳐간다. 그는 절대 체스를 만져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도대체 그의 머릿 속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던 것일까?

이야기는 과거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장악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치 군인에 의해 B박사는 어느 날 호텔 감방에 갇히게 된다. 다른 수용자들과 같은 육체적인 가학이나 고문은 전혀 없지만 그곳은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적합한 공간이었다. B박사는 그곳에 철저히 격리되어 고립과 침묵이라는 폭력을 온몸과 맨정신으로 감당해야만 했다. 그의 하루하루는 그가 지내는 작은 방만큼이나 끔찍할 정도로 똑같았고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 그는 우연히 손에 넣은 체스학습서를 계기로 자신과의 체스를 두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역시 체스는 서로 다른 두 명이 서로 다른 전략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혼자 한다는 건 절대 무리다. B박사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흑과 백으로 철저히 나누고 실재하는 체스가 아닌 숫자로 이루어진 가상의 체스를 둔다. 이러한 인위적인 자기 분열의 결과 그는 결국 정신분열로 치닫게 되고 의사로부터 다시는 체스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을 경고받는다.

다시 여객선 위로 돌아와, 의사의 경고를 잊은 B박사는 다시 정신분열의 증세를 보이고 만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그는 체스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떠난다. 소설은 B박사가 우연히 체스 대결에 끼어들고 마이스터와의 일대일 대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사이 자신이 체스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본인의 경험담에서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다음 이야기 「아내의 불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불안 - 악몽 속에서 발견한 인생의 진정한 의미

아내의 불안의 원인은 그녀 자신의 외도에 있다. 그녀는 부유한 중산층 계급의 부인으로 남편 몰래 젊은 피아니스트를 정부로 두고 밀애를 갖는다. 그녀는 연인을 만나면서도 늘 불안해하는데 마침내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녀가 만나고 있는 남자의 애인이라 밝힌 젊은 여자를 연인의 집앞에서 만나고 그때부터 그 여자로부터 협박에 시달린다. 이 이야기는 끝에 반전이 있으므로 길게 말하지 않겠다.

츠바이크는 이 여자가 처한 상황 역시 인물의 심리묘사에 치중하여 서술하고 있다. 여자는 남편에게 발각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불안한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얻는다. 사소한 다툼 없이 지내왔던 8년간의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며 그녀는 처음으로 남편을 제대로 알았던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고요한 밤 바라본, 책을 읽는 남편의 얼굴은 몹시 낯설게 느껴진다. 속을 전혀 알 수 없기에 그녀는 온갖 추측으로 자신을 괴롭히며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그녀의 아이들 역시 그녀와 친하지 않고, 늦게서야 그것을 자각한 그녀는 문득 소외감을 느낀다.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에서 산보와 사교활동에만 전념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까지의 정신적 행보가 이 소설을 이루고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 - 편집증을 가진 인간에 대한 관심

「체스」전반부에서 작가는 화자를 통해 한 가지 일에 생각을 집중하는 편집증을 가진 인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전기 작가로 유명한 그는 한 인물에 초점을 두고 그 인물의 내면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심리소설이라 명한 이 소설 두 편에서 그는 프로이트 심리학을 기반으로 체스중독자와 외도로 인해 불안에 떠는 여성을 내세워 인간의 심리를, 특히 극한 상황까지 자신을 내모는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해보인다.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외부의 상황에 의해 어디까지 내몰릴 수 있는지 알아가는 재미를 츠바이크의 소설을 통해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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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앤 아버스 - 금지된 세계에 매혹된 사진가
퍼트리샤 보스워스 지음, 김현경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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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들어낸 금기는 흔히 인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금지된 세계는 그만큼 유혹적이다. 한 여성의 삶을 그것에 모두 걸 만큼. 다이앤 아버스의 전기인 이 책의 표지엔, 금지된 세계에 매혹된 사진가라고 적혀 있다. 어떠한 세계가 그녀를 매혹했을까, 그 금지된 세계로 나를 이끈 것은 그 문구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책을 접하기 전, 나는 그녀의 사진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찍은 사진은 없었다. 이 책은 그녀의 삶을 조명하는 전기니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아주 꼼꼼하게 그녀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한 편의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저자는 그녀와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수많은 인용부호를 사용하여 책을 썼다. 더불어 그녀의 가족, 친구, 지인의 삶에 대해서도 꼼꼼히 쓰여 있다. 이것은 다소 짜증스러움을 유발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들을 통해 다이앤 아버스라는 한 인물의 다각적인 면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겠다는 생각에, 일면적으로 한 인물을 조명하는 여타의 전기문과는 또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기도 했다.

다이앤 아버스는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부유했고, 다이앤은 그것들 사이에서 보호받으며 자랐다. 그녀는 이 '보호받음'에 일종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자신이 부르주아라는 사실은 그녀를 썩 유쾌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세계, 특히 보지 말것을 명령받은 세계에 무한한 호기심을 가졌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은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어릴적부터의 특이한 행동과 성격은 이미 많은 것을 예견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전 손택의 『우울한 열정』에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고 얘기하는 발터 벤야민을 다룬 부분이 있다. 그것은 그를 이루는 우울한 감정에 대한 점성술적인 개념이다. 하이퍼크라피아는 창조적인 열병을 말한다. 그러한 열병은 흔히 우울한 상태에서 일어난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것을 경험했고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좀 더 남다른 감성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닐까. 다이앤 아버스는 우울증을 가졌고 또한 자살을 했으며, 어릴적부터 '위대하고 슬픈 예술가'를 꿈꿨다.

광기 어린 그녀의 카메라는 쉴새없이 셔터를 터뜨렸다. 점잖은 사람들의 본성을 향해, 모두들 외면하는 기형인들을 향해 그녀는 거침없이 다가갔다. 수줍음을 드러내는 그녀의 내부엔 이러한 광기와 열정이 어려있었고 그녀의 강렬한 눈빛 같은 카메라는 그것들의 배출구였던 셈이다.

이제 나는 그녀가 찍은 사진들을 보고 싶다. 그녀가 말한 비밀에 대한 비밀인 사진을 통해 그녀를 사로잡은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다. 이 책은 풍성하지만 금지된 세계에 매혹된 사진가에 대한 내 호기심을 완전히 충족시켜주지는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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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마을 이야기 1
제임스 캐넌 지음, 이경아 옮김 / 뿔(웅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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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꿈꾸었던 낙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고 이 책의 저자 제임스 캐넌은 묻는다. 소설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 이 질문이 소설에 드러난 온갖 일들의 동기를 하나로 압축시켜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이 사라지고 여자들만 남은 마을 이야기라는 발칙한 상상은 결코 가벼운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았다. 바로 전쟁이라는, 인간의, 특히 남성들의 정복욕에 의해 갈라진 인간 사회와 전선으로 떠난, 혹은 떠밀려간 사람들의 이야기와 남겨진 자들의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을 마리키타라고 하는 작은 마을을 초점으로 진행된다.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는 한 신문의 기사를 접하고 이 책의 모티프를 잡았다. 기사 내용인즉, 공산주의 게릴라들이 어느 산간마을의 남자들 대부분을 끌고 갔다는 것이었다. 끌려간 남자들에 초점을 맞춘 기사와는 달리 작가는 남겨진 여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무려 5년에 걸쳐 이 소설을 썼다.

마리키타라고 하는 평범한 마을에 어느 날 무장한 게릴라들이 들어선다. 그들은 마을의 남자들을 전투에 끌어들이고 저항하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무참히 학살한다. 목숨이 붙은 남자들이 강제로 끌려 나간 자리에 이제 남은 건 거의 여자들뿐이다. 남자들에 의해 유지되었던 마을의 질서는 깨지고 여자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며 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와중 한 군인에 의해 우연히 로살바라고 하는 한 과부가 치안판사에 임명되고 그녀는 사명감을 가지고 마을을 위해 일하기로 다짐한다. 바야흐로 마리키타는 저만의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말이지 온갖 사건들이 일어났다. 거의 유일한 남자였던 신부는 출산 장려 운동에 실패하고 나중에 마을에 남은 소년들마저 독살하고 마을을 떠난다. 그가 떠난 후 마을의 시계는 멈춰버리고 로살바는 독창적인 여성달력을 만들어낸다. 이름하야, 여자 시간 달력. 의미없는 월명 대신 마을 여자들의 이름을 집어넣고 사다리꼴로 만든 이 달력에 의해 시간은 거꾸로 흘러간다. 아마, 이 시간개념의 혁명이 마리키타의 가장 혁신적인 사건이 아닐까. 로살바는 모든 사유물을 공동화시키기까지 한다. 마을의 여자들은 모두 역할을 부여받고 일을 하며 사유재산은 인정받지 않는다. 나중에 전쟁에서 도망친 남자들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도 이 제도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제 마을은 여자들 것이 되었으니까.

어찌 보면 상당히 혁명적인 소설로 보이는 이 책은 기존의 개념을 모두 뒤엎는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자들에 예속되어 살아오던 여자들이 공동사회를 꾸려나가며, 거꾸로 가는 시간 개념을 도입하고 나체로 거리를 활보하며 여자들끼리 사랑을 나누기까지 한다. 자신들의 비참함을 내버려두는 신을 더 이상은 믿지 않으며 꾸준히 해오던 예배까지 없앤다.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고 엉뚱해 보이기까지도 하다. 거기에는 유머와 농담도 충분히 배여 있어 그 모든 게 거대한 농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의 비참함에 굴욕당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자신만만한’ 사회를 꾸려나간 여자들에게 그 누가 돌을 던지랴. 또한, 그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책을 집어던지기에 이 사회는, 지금까지의 역사는 얼마나 ‘말이 되는’ 일들만 있었던가.

각 챕터마다 짤막하게 이어놓은 남자들의 이야기는 전쟁의 그 비참함과 현실성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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