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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아내의 불안 ㅣ 범우문고 115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범우사 / 1994년 7월
평점 :
품절
체스 - 흑과 백의 자아 분열
대서양 한복판 여객선 위, 체스 외에는 아무 것도 할줄 모르는 체스 마이스터 첸토비치와 체스를 실제로 만져본 일이 거의 없는 B박사와의 체스 대결이 펼쳐진다. 시합이 진행될 수록 휴식시간이 길어지고 B박사는 예의 침착과 여유를 잃고 극심한 조급증에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이상행동을 보이는 것은 시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상황을 예견까지 하고 있다. 그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상대가 수를 놓기까지의 시간이 길어질 수록 그는 점점 미쳐간다. 그는 절대 체스를 만져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도대체 그의 머릿 속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던 것일까?
이야기는 과거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장악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치 군인에 의해 B박사는 어느 날 호텔 감방에 갇히게 된다. 다른 수용자들과 같은 육체적인 가학이나 고문은 전혀 없지만 그곳은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적합한 공간이었다. B박사는 그곳에 철저히 격리되어 고립과 침묵이라는 폭력을 온몸과 맨정신으로 감당해야만 했다. 그의 하루하루는 그가 지내는 작은 방만큼이나 끔찍할 정도로 똑같았고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 그는 우연히 손에 넣은 체스학습서를 계기로 자신과의 체스를 두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역시 체스는 서로 다른 두 명이 서로 다른 전략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혼자 한다는 건 절대 무리다. B박사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흑과 백으로 철저히 나누고 실재하는 체스가 아닌 숫자로 이루어진 가상의 체스를 둔다. 이러한 인위적인 자기 분열의 결과 그는 결국 정신분열로 치닫게 되고 의사로부터 다시는 체스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을 경고받는다.
다시 여객선 위로 돌아와, 의사의 경고를 잊은 B박사는 다시 정신분열의 증세를 보이고 만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그는 체스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떠난다. 소설은 B박사가 우연히 체스 대결에 끼어들고 마이스터와의 일대일 대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사이 자신이 체스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본인의 경험담에서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다음 이야기 「아내의 불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불안 - 악몽 속에서 발견한 인생의 진정한 의미
아내의 불안의 원인은 그녀 자신의 외도에 있다. 그녀는 부유한 중산층 계급의 부인으로 남편 몰래 젊은 피아니스트를 정부로 두고 밀애를 갖는다. 그녀는 연인을 만나면서도 늘 불안해하는데 마침내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녀가 만나고 있는 남자의 애인이라 밝힌 젊은 여자를 연인의 집앞에서 만나고 그때부터 그 여자로부터 협박에 시달린다. 이 이야기는 끝에 반전이 있으므로 길게 말하지 않겠다.
츠바이크는 이 여자가 처한 상황 역시 인물의 심리묘사에 치중하여 서술하고 있다. 여자는 남편에게 발각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불안한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얻는다. 사소한 다툼 없이 지내왔던 8년간의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며 그녀는 처음으로 남편을 제대로 알았던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고요한 밤 바라본, 책을 읽는 남편의 얼굴은 몹시 낯설게 느껴진다. 속을 전혀 알 수 없기에 그녀는 온갖 추측으로 자신을 괴롭히며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그녀의 아이들 역시 그녀와 친하지 않고, 늦게서야 그것을 자각한 그녀는 문득 소외감을 느낀다.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에서 산보와 사교활동에만 전념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까지의 정신적 행보가 이 소설을 이루고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 - 편집증을 가진 인간에 대한 관심
「체스」전반부에서 작가는 화자를 통해 한 가지 일에 생각을 집중하는 편집증을 가진 인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전기 작가로 유명한 그는 한 인물에 초점을 두고 그 인물의 내면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심리소설이라 명한 이 소설 두 편에서 그는 프로이트 심리학을 기반으로 체스중독자와 외도로 인해 불안에 떠는 여성을 내세워 인간의 심리를, 특히 극한 상황까지 자신을 내모는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해보인다.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외부의 상황에 의해 어디까지 내몰릴 수 있는지 알아가는 재미를 츠바이크의 소설을 통해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