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년학
이청준 지음, 전갑배 그림 / 열림원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얼마전, 임권택 영화 감독의 <천년학>이 개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득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무렵이 떠올랐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작품 치곤 분량이 꽤 많아서 몇 시간에 걸쳐「선학동 나그네」를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 수업 전이었던가, 후였던가.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영화를 보여 주셨다. 바로 <서편제>였다. 꽤 오래된 영화라 그저 수업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기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마음으로 별 기대없이 본 영화였지만 꽤 몰입했던 것 같다. 언덕길을 지나는 여자와 아비의 모습이 사진보듯 그 이미지가 이제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 책 『천년학』에는 남도 사람 연작인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가 실려 있다. 이번에 개봉했던 영화는 세번째 연작인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작품이 영화화되었다니, 참 감회가 새롭지만, 영화는 아직 못 봤으므로 책 이야기나 해야겠다.
책은 아주 얇고 활자도 큰 편이라 읽는 부담이 적어서 좋았다. 게다가 중간중간 삽화 구경까지 할 수 있어 빈약한 상상력을 보충할 수 있기도 했다. 서편제를 읽으며 영화 장면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고 소리의 빛은 영화와 교과서의 간극을 채우게끔 해주었으며 선학동 나그네는 다시 읽어도 그 여운이 남달랐다.
알다시피, 이 세 연작은 오누이의 여정을 쫓는 것을 주 뼈대로 하고 있다. 아비에 의해 눈이 멀어버린 여자가 한 마리 비상학이 되어 사라져간 이야기. 이 설화적인 이야기엔 한국인의 주요 정서인 한(恨)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한은 소리를 통해 표출된다. 요즘, 클래식을 듣는 이들은 많아도 국악이나 판소리를 듣는 이들은 확실히 적다. 이는 공간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클래식이야 꼭 음악회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도 얼마든지 감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국악이나 판소리는 듣는 것만으론 모자라다. 소리를 하는 이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소리만 하는 게 아니다. 표정과 몸짓으로 그야말로 온몸으로 연기를 한다. 쥐어뜯는 듯한, 혹은 햇덩이를 품은 듯한. 그 햇덩이가 바로 한이며 그것이 뿜어져나올 때 거대한 울림으로써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다.
그 햇덩이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간 이가 이 작품에 나오는 오라비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멀게한 아비에 대한 원한을 삭히고 소리로서 승화시킨 누이. 오누이는 서로의 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서로 갈 길을 가기로 한다. 아비의 유골을 묻고 사라진 누이는 후에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오라비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그들이 사라져간 언덕 위로 백학 한 마리가 하늘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이제 어딜가도 한이 맺힌다느니 한스럽다느니 하는 말을 듣기가 힘들어졌다. 그런 와중에 가슴속에 한덩어리를 품고 그것을 조금씩 갈아 마시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설화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정서가 사라져간 것은 아닐 것이다. 포구가 들판이 되어 더 이상 학이 비상하는 형상을 볼 수 없어져버렸지만 한 여자의 소리가 마을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한 마리 학이 되어 떠도는 것처럼 우리의 가슴 속 어딘가에도 한의 깊은 뿌리는 심어져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편제를 보고 천년학을 본 이들의 가슴이 묵직해져 오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