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비파행>

 

潯陽江頭夜送客  楓葉萩花秋瑟瑟

主人下馬客在船  擧酒欲飮無管絃

醉不成歡慘將別  別時茫茫江浸月

忽聞水上瑟琶聲  主人忘歸客不發

尋聲闇問彈者誰  瑟琶聲停欲語遲

移船相近邀相見  添酒回鐙重開宴

千呼萬喚始出來  猶抱琵琶半遮面

轉軸撥絃三兩聲  未成曲調先有情

絃絃掩抑聲聲思  似訴生平不得志

低眉信手續續彈  說盡心中無限事

輕攏慢撚抹復挑  初爲霓裳後六么

大絃嘈嘈如急雨  小絃切切如私語

嘈嘈切切錯雜彈  大珠小珠落玉盤

閒關鶯語花底滑  幽咽流泉水下灘

水泉冷澁絃凝絶  凝絶不通聲漸歇

別有幽愁闇恨生  此時無聲勝有聖

銀甁乍破水漿迸  鐵騎突出刀槍鳴

曲終收撥當心畵  回絃一聲如裂帛

東船西舫悄無言  唯見江心秋月白

沈吟放撥揷絃中  整頓衣裳起斂容

自言本是京城女  家在蝦蟆陵下住

十三學得琵琶成  名屬敎坊第一部

曲罷常敎善才服  妝成每被秋娘妒

五陵年少爭纏頭  一曲紅綃不知數

鈿頭銀篦擊節碎  血色羅裙飜酒汚

今年歡笑復明年  秋月春風等閑度

弟走從軍阿姨死  暮去朝來顔色故

門前冷落車馬稀  老大嫁作商人婦

商人重利輕別離  前月浮梁買茶去

去來江口守空船  繞船明月江水寒

夜深忽夢少年事  夢啼妝淚紅欄干

我聞琵琶已歎息  又聞此語重喞喞

同是天涯淪落人  相逢何必曾相識

我從去年辭帝京  謫去臥病潯陽城

潯陽之僻無音樂  終歲不聞絲竹聲

佳近湓城地低濕  黃蘆苦竹繞宅生

其間旦暮聞何物  杜鵑啼血猿哀聲

春江花朝秋月夜  往往取酒還獨傾

豈無山歌與村笛  嘔啞嘲哳難如聽

今夜聞君琵琶語  如聽仙樂耳暫明

莫辭更坐彈一曲  爲君翻作琵琶行

感我此言良久立  郤坐促絃絃轉急

凄凄不是向前聲  滿座重聞皆掩泣

  座中泣下誰最多  江州司馬靑衫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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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이, <<비파행>>, 오세주 역, 다산초당 2006년

 

 

 

 

 

 

 

 

 

늦은 밤 심양강가에서 손님을 보내려니

단풍잎, 갈대꽃 흔들리는 가을이 쓸쓸하다.

주인은 말에서 내리고 손님은 배에 오르며

술 한잔 마시려니 음악이 없다.

취기도 오르지 않았는데 슬픈 이별하려 하니

망망한 강에 달빛만 젖어든다.

이 때 홀연히 강물 타고 들려오는 비파 소리에

주인은 돌아갈 생각을 잊고 손님은 떠나지 못하네.

소리 나는 곳을 향해 비파 타는 사람 누구인가 물었으나

비파 소리 그쳤는데 대답이 없다.

배를 가까이 저어가 서로 마주보고

술 더하고 등불 밝혀 다시 술자리를 열었다.

천 번 만 번 부르니 비로소 나타나는데

여전히 비파를 품에 안은 채 얼굴을 반쯤 가렸다.

줄을 조이고 현을 두 세 번 퉁기는데

곡조도 타기 전에 정이 먼저 담겼네.

줄을 누르고 퉁길 때마다 마음을 울리는 소리

평생 이루지 못한 정을 하소연하는 듯.

고개 숙이니 손끝을 따라 흘러나오는 음악

가슴속에 서린 끝없는 사연을 모두 털어놓는 듯.

가볍게 눌렀다가 살짝 비틀었다가 다시 퉁기며

예상우의곡을 연주하고 육요를 연주한다.

큰 줄은 세찬 소나기 같고

작은 줄은 절절한 속삭임 같다.

세차고 때로는 절절해

온갖 구슬이 옥쟁반에 떨어지는 듯.

한가한 대문 안, 꾀꼬리 소리 꽃가지 사이로 흐르듯

샘물이 얼음 밑을 흐느끼며 흐르듯.

물줄기 얼어붙듯이 현이 얼어붙으며 소리는 끊기고

얼어붙은 듯 끊어진 소리, 점점 사라진다.

따로 그윽한 슬픔, 남 모르는 한이 되살아나는 듯

비파 소리가 울릴 때보다 더 좋았네.

은병이 갑자기 깨져 물줄기가 치솟듯

철마가 갑자기 뛰어오르고 창칼이 부딪치듯

곡이 끝나고 채를 뽑아 비파를 휙 그으니

비단이 찢어지듯 네 현이 한꺼번에 소리를 낸다.

동쪽 배 서쪽 배 사람들 모두 할 말을 잊고

강 한가운데 밝은 가을달만 바라보았네.

침울하게 채를 거두어 줄에 꽂고

옷차림을 정돈하고 일어나 얼굴을 가다듬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본래 장안 여자로

하마릉 아래에 살았는데

열 세 살에 이미 비파를 익혔고

교방에서도 으뜸이었습니다.

한 곡조 타면 스승들도 탄복하고

화장을 하면 기녀들의 질투를 받았습니다.

오릉의 청년들이 다투어 찾아왔고

한 곡 끝날 때마다 붉은 비단, 셀 수 없이 받았습니다.

자개 박은 은비녀 장단 맞추다 다 부러지고

붉은 색 비단 치마 술에 얼룩졌습니다.

올해도 기뻐 웃고 이듬해에도 기뻐 웃으며

가을달 봄바람 한가롭게 보냈습니다.

남동생 싸움터로 가고 양모 또한 죽고 나니

저녁 가고 아침 오면 얼굴빛도 시들어갔소.

대문 앞은 말 타고 찾아오는 이 없이 쓸쓸해지고

늙은 이 몸 장사치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장사치는 잇속에만 밝고 이별은 가벼이 여기는 지라

지난달 부량으로 차를 사러 떠났습니다.

강나루 오가며 빈 배만 지키는데

뱃전에 달은 밝고 강물은 차가워

깊은 밤 홀연히 어린 시절을 꿈에서 보니

꿈 속에서도 서러워 화장한 얼굴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미 비파 소리에 탄식하였는데

다시 이 이야기 듣고나니 거듭거듭 탄식이 나오네.

그대와 나 하늘 아래 떠도는 몸으로

이렇게 서로 만났는데 어찌 본디 아는 사이어야 하는가.

이 몸은 지난해 장안을 떠나

심양으로 귀양 와 병들어 누웠다네.

심양은 외진 땅이라

일 년이 다 가도록 음악 소리 한 번 듣지 못했다오.

사는 곳이 가까운 분강 땅이라, 땅은 낮고 습하여

누런 갈대 마른 대나무만이 집 둘레에 우거졌다오.

여기서 아침저녁 무엇을 듣겠는가.

피 토하는 두견새와 애절한 원숭이 울음소리뿐.

강가에 꽃이 피는 봄날 아침, 달 뜨는 가을 밤

때때로 술 가져와 혼자 술잔을 기울인다네.

어찌 산촌에 노랫소리 피리소리 없으련만

벙어리 말 배우고 새 웃음 짓듯 알아듣기 어려워라.

오늘밤 그대의 비파소리 들으니

신선의 음악 들은 듯 귀가 밝아지네.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조 타주시면

난 그대 위해 비파행을 지으리다.

내 말에 감격하여 한참 서 있더니

다시 앉아 현을 고르고 급히 비파를 탄다.

전보다 더 처연해진 소리에

사람들 모두 눈을 가리고 울었노라.

그 중 누가 가장 많이 눈물 흘렸던가.

푸른 적삼이 눈물에 다 젖은 강주사마였더라.

 

<다산초당.2006>

 

*백거이(白居易 772~846)

중국 당나라 시인으로 자는 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이다.

같은 시대 한유와 더불어 李痘韓白으로 불린다.

낙양에서 태어나 32세에 황제의 친시에 합격하였으며

'장한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후 구강의 사마로 좌천되어

'비파행'을 지었다.

 

---------------------------------------------------------------------------------------번역이 가장 현대적이어서  위의 시집을 골랐습니다.

이 시의 묘미는 다음 한 구절입니다. "同是天涯淪落人 相逢何必曾相識 ." 이것을  "이렇게 만났는데 어찌 본디 아는 사이어야 하는가"로 옮기면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지요. 약간만 손질하면 운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상봉이 어찌 아는 사이만의 일이랴"는 뜻이예요. 즉,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떠돌다 이렇게 만나도 의미있는 만남이라는 뜻이지요.

강주자사로 좌천된 백거이와 세파에 지쳐 장사치의 아내가 된 늙은 기생의 만남. 달빛아래 비파줄을 튕기는 여인에게 답례로 비파행시를 바치는 백거이. 운치있지요. 사람간의 길고 질긴 만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란 생각이 저절로 들어요. 잠시지만 영혼을 울리는 만남. 비파음 한 자락에 인생을 퉁기고 그것을 알아듣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 그로써 충분한 거지요.

추기:

 同是天涯淪落人 相逢何必曾相識 을 해석하는 여러 버전이 있네요.

1. 모두 다 아득히 먼 곳을 떠도는 외로운 사람들, 어쩌자고 서로 만나 알게 되었는가!

2.그대와 나 하늘 아래 떠도는 몸으로 이렇게 서로 만났는데 어찌 본디 아는 사이어야 하는가.

3. 모두 아득히 떠도는 외로운 사람들. 만남이 어찌 반드시 본디 아는 사람간의 일이런가.(제 해석)

4. 모두다 천애에 떠도는 외로운 사람 어쩌자고 일치감치 만나서 알게 되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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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3-09-12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 사람들은 한시의 싯구를 일상생활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저리도 의미있는 구절이라면 꽤나 자주 언급되어질것 같네요.

지금 중국 직원한테 물어보니 엄청 유명한 구절이라고 하네요.

rosenkranz 2013-09-12 23:21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비슷한 예를 하나 들까요! 원호문의 <안구사>에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問世間, 情爲何物?直敎生死相許? "묻노라, 세상사람들아, 정이란 무엇이관대 저토록 생사를 걸도록 하였는가?" ...그외에도 많지요.
 

 

 

 

 

 

 

 

 

 

 

 

 

 

 

비탄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 모든 것이 어찌 그리 멀리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을까.
지금 내게 빛을 던지는
저 별도
벌써 수천 년 전에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내 옆을 스쳐간 배에서
무슨 불안스런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집에서는 시계가
종을 쳤다……
어느 집일까? ……
나의 가슴을 박차고
커다란 하늘 밑으로 걸어가고 싶다.
그리고 기도하고 싶다.
그러면 모든 별들 중에서 하나가
정말로 살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별 하나가
혼자 살아남아 있었음을
알 것만 같다.
하얀 도시처럼
구천(九天)에 떠서 마지막 빛을 던질 별 하나가……


 

-----책세상에서 펴낸 릴케전집 2권 <형상시집>에서 (김재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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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ent는 주로 사람이 죽었을 때 비통함을 표현하는  시의 제목이다.

 

새벽 두 시의 고요 속에 바람소리가 유난히 펄럭인다.

잠들기 전에 읽은 시 한 편이 좋아 옮겨 놓는다.

 

'모든 것을 견뎌내고 홀로 살아남은 별 하나'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이 별이 되어 하늘에 모여사는 것은 아닐까.

 

2011/08/09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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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2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2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재를 견디는 것은 망각인가? 사랑인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不在를 느낀다면 그것은 그가 사랑에서 있어서 약자란 뜻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부재를 느끼지 않습니다.  부재를 견뎌내는 방법은 롤랑바르트식으로 말하면 망각이고 카프카식으로 말하면 버리고 떠나는 것이지요.  사랑의 불균형은 늘 존재합니다. 따라서 스스로 단념하고 체념해내지 않으면 부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성복은 사랑이 깊어야 이 부재의 허전함을 견딜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만큼 자기를 비우고 타인을 배려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얘기겠지요.  심지어 자신을 온통 비워 망각하고 단념하는 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것이든 부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그런 번민을 할 필요도 행위를 취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자 역시 부재를 느끼는 사랑의 약자인 것입니다. 떠나든 머물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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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먼저 카프카의 글을 한 편 소개하지요. 카프카의 단편 <조그마한 여자>입니다.

 

저명한 작가인 주인공은 한 조그마하고 외견상 여린 여자의 집착-여인의 입장에선 사랑이고 남자의 입장에선 집착-의 대상이 됩니다. 그녀는 작가에게 사랑의 행위나 배려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늘 그를 비난하고 자신이 피해자인 것 마냥 굽니다. 주인공은 몸이 아프다고 전갈하는 그녀의 행위조차도 그의 무관심을 타인에게 알려서 비난하려는 구실로 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기분은 유쾌하지 않지만 상대가 표면화시키지 않으니 드러내놓고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 모든 일이 여자가 떠나면 해결될 일이라 여겨집니다. 둘 사이엔 아무런 관계나 인연이 없는데 여자가 주인공을 비난함으로써 스스로 만든 관계라는 것이지요.

  

< ...중략...그런데 이 조그마한 여인은 나를 몹시 못마땅해 한다. 늘 뭔가 비난의 구실을 내게서 찾아넨다. 언제나 부당한 짓을 그 여자에게 하는 것은 나이며, 한 발짝마다 나는 노여움을 나에게 만들고 만다.

생활이라는 것을 극히 작은 부분으로 가르고, 각각의 단편을 따로따로 판단할 수 있다면, 내 생활의 어느 단편이든지 아마도 그여자에게 있어서는 짜증의 불씨가 될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그 여자를 그토록 노엽게 만드는지 나는 종종 생각해 보곤 했다. 나의 모든 것이 그 여자의 심미감, 정의감, 습관, 전통, 기대 같은 것에 어그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서로 반발하는 성질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왜 그 여자는 그 때문에 저토록 괴로와하는 것일까? 나  때문에 괴로와해야만 하는 그런 관계는 우리들 사이에 전연 없는 것이다. 그 여자는 다만 나를 생판 남으로 간주하는 결심만 하면 된다. 나는 실지로 그러하며 그러한 결심을 환영하면 했지 반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는 나의 존재를 잊어버릴 결심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나라는 것을 그여자에게 강요한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이렇게 해서 모든 고뇌는 끝장을 고할 것이다. 이 경우에 나는 자신의 일, 그 여자의 태도는 말할나위도 없이 나에게 괴로운 일이라는 것은 전혀 고려에 넣지 않는다. 이 괴로움은 모두 그 여자의 고뇌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고려에 넣지 않는 것이다....중략> (홍경호 번역, 금성출판사)

 

아예 아무런 시작을 안한 사이면 모르겠지만 사랑이 지나갔다해서 상대로부터 이렇게 여겨진다면 슬프겠지요. 하지만 내가 아직 사랑하고 있는데 타인이 떠난 것으로 겪는 괴로움, 즉 상실의 괴로움보다 이젠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상대의 사랑을 계속 받고 있는 것이 더 괴로운 일이라니, 이해해야지요. 단념과 망각을 배우라는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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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중 <부재 (absence)> 글은 흥미로워요.

 

카프카가  不在를 느끼기는 커녕  상대로부터의 원치 않는 관심을 어쩌지 못해 고민하는 인물의 입장을 다룬 것이라면 바르트의 그것은 연인들 사이에 발생한 저울 추의 기울기를 다룬 것이지요. 마음이 가벼운 쪽보다 무거운 쪽이 당연히 부재를 더 느끼겠죠. 여기서도 부재를 느끼는 쪽만 떠나든 남든, 잊든 기억하든 행동의 선택을 강요 받아요. 토마스 만의 저 유명한 말대로 사랑은 권력이지요.

 

<부재 absence>

<사랑의 대상의 부재를 무대에 올리는 언어의 에피소드는 모든 그 부재의 이유나 기간은 어떠하든 부재를 버려짐의 시련으로 변형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 작품에서 사랑의 대상인 로테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 멀어지는 것은 바로 사랑의 주체인 베르테르이다. 그런데 부재에는 항상  그 사람만의 부재만이 존재한다.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고 남아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 사람은 끊임없는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다. 그의 천직은 철새,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나, 나의 천직은 그 반대로 칩거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않고 미결 상태로 앉아 있는, 마치 역 한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마냥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사랑의 부재는 일방통행이다. 그것은 남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 떠나는 사람으로부터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앞에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그 사람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가끔 부재를 잘 견디어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소중한 이'의 떠남을 감수하는 '모든 사람'의 대열에 끼게 되는 것이다. 일찍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있도록 훈련된 그 길들이기에 나는 능숙하게 복종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 (거의 미칠 지경이었던) 그 길들이기에. 나는 젖을 잘 줄 땐 주체처럼 행동한다.어머니의 젖가슴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 동안 양분을 취할 줄도 안다.

이 잘 견디어낸 부재, 그것은 망각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간헐적으로 불충실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망각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기에. 가끔 망각하지 않는 연인은 지나침, 피로, 추억의 긴장으로 죽어간다. (베르테르처럼.)


부재는 지속되고 나는 그것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부재를 조작하는 것, 그것은 이 순간을 연장하려는, 그리하여 그 사람이 냉혹하게도 부재에서 죽음으로, 기울어질지도 모르는 순간을 되도록 오래 늦추려는 것이다.

부재의 담론은 두 개의 표상문자로 씌어진 텍스트이다. 한쪽에는 욕망의 치켜진 팔이, 다른 한쪽에는 필요의 내민 팔이 있다. 나는 치켜진 팔의 음경의 이미지와 내민 팔의 음문의 이미지 사이에서 흔들거리며 망설인다.

그 사람의 부재는 내 머리를 물 속에 붙들고 있다. 점차 나는 숨이 막혀가고 공기는 희박해진다. 이 숨막힘에 의해 나는 내 '진실'을 재구성하고, 사랑의 다루기 힘든 것을 준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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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성복의 시 한편을 올립니다. 사랑만 어디 서럽겠습니까. 사는 일이 다 서러운 일이고, 그 서러움때문에 아름답기도 한걸요.

 

<숨길 수 없는 노래 2>....이성복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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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조그만 여자>를 읽고 상념이 깊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가 날 사랑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내가 베푼 사랑과 친절, 호의 이런 것들을 상대의 채무로 기억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대를 비난하고 괴로워합니다. 그 괴로움이 클수록 자신의 사랑이 깊었다고 착각하는 거지요. 그러나 들여다 보면 사랑의 이름으로 한 일이 고작 상대를 원망한 일 밖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얄밉도록 카프카는 그것을 잘 간파해 저 소설을 썼어요.

마음이 하는 일을 물을 수는 없고 우리는 다만 그 행위만을 물을 수 있을 뿐이지요. 부재를 조작해가면서까지 관계를 연장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가여워요. 그게 상대를 괴롭히는 것이란 걸 카프카는 객관적으로 돌아보도록 하는데, 그래도 저 주인공의 눈에 그 마음이 그토록 폄하되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픕니다.

 

 

*다른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옛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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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논쟁
정혜용 지음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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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둘러싼 논쟁을 아주 잘 정리해 소개했다. 관련서 중 가장 마음에 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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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구조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후고 프리드리히 지음, 장희창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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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주의에서 현대시의 특징을 찾은, 시문학 하는 사람들의 고전! 흥미진진하고 일목요연 발췌본! 저절로 발췌하지 않은 원텍스트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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