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재를 견디는 것은 망각인가? 사랑인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不在를 느낀다면 그것은 그가 사랑에서 있어서 약자란 뜻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부재를 느끼지 않습니다. 부재를 견뎌내는 방법은 롤랑바르트식으로 말하면 망각이고 카프카식으로 말하면 버리고 떠나는 것이지요. 사랑의 불균형은 늘 존재합니다. 따라서 스스로 단념하고 체념해내지 않으면 부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성복은 사랑이 깊어야 이 부재의 허전함을 견딜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만큼 자기를 비우고 타인을 배려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얘기겠지요. 심지어 자신을 온통 비워 망각하고 단념하는 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것이든 부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그런 번민을 할 필요도 행위를 취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자 역시 부재를 느끼는 사랑의 약자인 것입니다. 떠나든 머물든 말이지요.
---------------------------------
자 먼저 카프카의 글을 한 편 소개하지요. 카프카의 단편 <조그마한 여자>입니다.
저명한 작가인 주인공은 한 조그마하고 외견상 여린 여자의 집착-여인의 입장에선 사랑이고 남자의 입장에선 집착-의 대상이 됩니다. 그녀는 작가에게 사랑의 행위나 배려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늘 그를 비난하고 자신이 피해자인 것 마냥 굽니다. 주인공은 몸이 아프다고 전갈하는 그녀의 행위조차도 그의 무관심을 타인에게 알려서 비난하려는 구실로 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기분은 유쾌하지 않지만 상대가 표면화시키지 않으니 드러내놓고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 모든 일이 여자가 떠나면 해결될 일이라 여겨집니다. 둘 사이엔 아무런 관계나 인연이 없는데 여자가 주인공을 비난함으로써 스스로 만든 관계라는 것이지요.
< ...중략...그런데 이 조그마한 여인은 나를 몹시 못마땅해 한다. 늘 뭔가 비난의 구실을 내게서 찾아넨다. 언제나 부당한 짓을 그 여자에게 하는 것은 나이며, 한 발짝마다 나는 노여움을 나에게 만들고 만다.
생활이라는 것을 극히 작은 부분으로 가르고, 각각의 단편을 따로따로 판단할 수 있다면, 내 생활의 어느 단편이든지 아마도 그여자에게 있어서는 짜증의 불씨가 될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그 여자를 그토록 노엽게 만드는지 나는 종종 생각해 보곤 했다. 나의 모든 것이 그 여자의 심미감, 정의감, 습관, 전통, 기대 같은 것에 어그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서로 반발하는 성질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왜 그 여자는 그 때문에 저토록 괴로와하는 것일까? 나 때문에 괴로와해야만 하는 그런 관계는 우리들 사이에 전연 없는 것이다. 그 여자는 다만 나를 생판 남으로 간주하는 결심만 하면 된다. 나는 실지로 그러하며 그러한 결심을 환영하면 했지 반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는 나의 존재를 잊어버릴 결심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나라는 것을 그여자에게 강요한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이렇게 해서 모든 고뇌는 끝장을 고할 것이다. 이 경우에 나는 자신의 일, 그 여자의 태도는 말할나위도 없이 나에게 괴로운 일이라는 것은 전혀 고려에 넣지 않는다. 이 괴로움은 모두 그 여자의 고뇌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고려에 넣지 않는 것이다....중략> (홍경호 번역, 금성출판사)
아예 아무런 시작을 안한 사이면 모르겠지만 사랑이 지나갔다해서 상대로부터 이렇게 여겨진다면 슬프겠지요. 하지만 내가 아직 사랑하고 있는데 타인이 떠난 것으로 겪는 괴로움, 즉 상실의 괴로움보다 이젠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상대의 사랑을 계속 받고 있는 것이 더 괴로운 일이라니, 이해해야지요. 단념과 망각을 배우라는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요.
----------------------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중 <부재 (absence)> 글은 흥미로워요.
카프카가 不在를 느끼기는 커녕 상대로부터의 원치 않는 관심을 어쩌지 못해 고민하는 인물의 입장을 다룬 것이라면 바르트의 그것은 연인들 사이에 발생한 저울 추의 기울기를 다룬 것이지요. 마음이 가벼운 쪽보다 무거운 쪽이 당연히 부재를 더 느끼겠죠. 여기서도 부재를 느끼는 쪽만 떠나든 남든, 잊든 기억하든 행동의 선택을 강요 받아요. 토마스 만의 저 유명한 말대로 사랑은 권력이지요.
<부재 absence>
<사랑의 대상의 부재를 무대에 올리는 언어의 에피소드는 모든 그 부재의 이유나 기간은 어떠하든 부재를 버려짐의 시련으로 변형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 작품에서 사랑의 대상인 로테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 멀어지는 것은 바로 사랑의 주체인 베르테르이다. 그런데 부재에는 항상 그 사람만의 부재만이 존재한다.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고 남아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 사람은 끊임없는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다. 그의 천직은 철새,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나, 나의 천직은 그 반대로 칩거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않고 미결 상태로 앉아 있는, 마치 역 한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마냥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사랑의 부재는 일방통행이다. 그것은 남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 떠나는 사람으로부터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앞에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그 사람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가끔 부재를 잘 견디어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소중한 이'의 떠남을 감수하는 '모든 사람'의 대열에 끼게 되는 것이다. 일찍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있도록 훈련된 그 길들이기에 나는 능숙하게 복종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 (거의 미칠 지경이었던) 그 길들이기에. 나는 젖을 잘 줄 땐 주체처럼 행동한다.어머니의 젖가슴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 동안 양분을 취할 줄도 안다.
이 잘 견디어낸 부재, 그것은 망각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간헐적으로 불충실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망각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기에. 가끔 망각하지 않는 연인은 지나침, 피로, 추억의 긴장으로 죽어간다. (베르테르처럼.)
부재는 지속되고 나는 그것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부재를 조작하는 것, 그것은 이 순간을 연장하려는, 그리하여 그 사람이 냉혹하게도 부재에서 죽음으로, 기울어질지도 모르는 순간을 되도록 오래 늦추려는 것이다.
부재의 담론은 두 개의 표상문자로 씌어진 텍스트이다. 한쪽에는 욕망의 치켜진 팔이, 다른 한쪽에는 필요의 내민 팔이 있다. 나는 치켜진 팔의 음경의 이미지와 내민 팔의 음문의 이미지 사이에서 흔들거리며 망설인다.
그 사람의 부재는 내 머리를 물 속에 붙들고 있다. 점차 나는 숨이 막혀가고 공기는 희박해진다. 이 숨막힘에 의해 나는 내 '진실'을 재구성하고, 사랑의 다루기 힘든 것을 준비한다. >
--------------------------------
마지막으로 이성복의 시 한편을 올립니다. 사랑만 어디 서럽겠습니까. 사는 일이 다 서러운 일이고, 그 서러움때문에 아름답기도 한걸요.
<숨길 수 없는 노래 2>....이성복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
카프카의 <조그만 여자>를 읽고 상념이 깊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가 날 사랑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내가 베푼 사랑과 친절, 호의 이런 것들을 상대의 채무로 기억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대를 비난하고 괴로워합니다. 그 괴로움이 클수록 자신의 사랑이 깊었다고 착각하는 거지요. 그러나 들여다 보면 사랑의 이름으로 한 일이 고작 상대를 원망한 일 밖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얄밉도록 카프카는 그것을 잘 간파해 저 소설을 썼어요.
마음이 하는 일을 물을 수는 없고 우리는 다만 그 행위만을 물을 수 있을 뿐이지요. 부재를 조작해가면서까지 관계를 연장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가여워요. 그게 상대를 괴롭히는 것이란 걸 카프카는 객관적으로 돌아보도록 하는데, 그래도 저 주인공의 눈에 그 마음이 그토록 폄하되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픕니다.
*다른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옛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