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헛되고도 무의미하다.
내가 두려워하거나 경외하는 모든 것은 마음의 동요로 인해 일어나는 것일 뿐
그 자체에는 전혀 선과 악이 내재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선이, 즉 전달될 수 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이 없어도 독자적으로 능히 정신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 정녕 존재하는지를 조사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말은 내기 일단 찾아내 얻게 된 다음에는 지속적인 지복을 영원토록 향유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실존하는지를 탐색해보기로 했다는 뜻이다."
스피노자의 <지성의 개선 및 지성을 사물의 참된 인식으로 인도하는 방법에 대한 논고>에서(레온 드 빈터,<<호프만의 허기>>,지명숙 옮김, 문학동네, 2012: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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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잖아. 즐거움 따위를 원하는 게 아니야.
광란에 몸을 맡기고 싶은 거야. 고통스런 쾌락과
애증과 늘 되살아나는 좌절에 말이야.
이 가슴은 지식의 갈증에서 나았으니
앞으로는 어떤 고통도 피하지 않으리라.
우리 인류 모두에게 주어진 것들을 다
이 깊은 가슴으로 속속들이 만끽해 보리라.
이 정신으로 지고한 것과 천한 것을 움켜잡고,
인류의 모든 고통과 행복을 이 가슴에 쌓으리라.
나의 자아를 확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궁극에는 그들처럼 나 또한 파멸하리라"
괴테, <<파우스트>>, 김재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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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왜 <파우스트>저술에 평생을 바쳤을까?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나를 떠나지 않는 의문은 아주 평범하고도 중요한 의문 하나였다. 한 작가가 60년의 세월을 바쳐-4번의 발표와 수정을 거쳐- 죽기 직전에 완성한 작품이라면, 평생 그를 따라 다니던 인생의 숙제를 작품을 통해 풀고자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보편적인 문제,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문제에 닿아있을 테고, 그것이 그의 소설을 시대를 초월해 읽히게 하는 고전이 되도록 하였을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댓가로 머리로 사유하는 지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행동하면서 체험하기를 원했다. 메피스토펠레스를 이용해서라도 위로는 신을 향한 정신의 최고정점까지 아래로는 윤리적 체제 속에서는 악이라 불리는 심연 밑바닥의 욕망까지, 인간의 최대 한계점까지 체험해보고자 하였다.
파우스트전설 속의 파우스트는 지상의 욕망과 쾌락의 댓가로 죽음 후에 영혼이 소멸되는 징벌을 받았다. 괴테는 이에 동의할 수 없었다. 파멸과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주어진 필사의 운명에 맞서며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넓힌 자는 죽어서도 사는 불멸을 얻으리라! 그 불멸, 그것이 신이 주는 용서고 구원이다!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정점에 선 파우스트는 바로 괴테 자신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과 자신의 삶을 구원하고 싶었던 괴테! 그 인생의 자서전이자 변명서가 그의 <파우스트>다.
<파우스트>를 통해서 괴테는 여러 양극적인 딜레마들을 조화시켜 새로운 가치체계를 완성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계몽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제가치가 함께 만나는 시대에 산 괴테의 소명이기도 하였다. 근대적 개인의 사적욕망을 어떻게 공동체적 윤리체계-공적 욕망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기독교적 선악이분법적 구원관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 기독교적 세계관을 부정하지 않고서!!
사적 욕망과 공적 윤리가 불일치하는 경계선에서 개인의 욕망과 권리를 어떻게 어느정도까지 인정할 것인가? 인간 본래의 실존적 삶과 종교윤리가 일치하지 않을 때, 누가 삶을 구할 것인가? 초기에 계몽주의에 경도된 괴테는 공적 제도와 문명의 손을 들었다. 그리하여 공적윤리인 결혼의 신성을 범하는 경계를 넘는 주인공-사적이고 특수한 욕망을 가진 개인-을 자살로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죽음의 댓가를 치뤄야만 자신의 사랑을 구할 수 있었다. 마치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가 잘못된 욕망 때문에 자살이나 다름없이 부친의 손에 죽었듯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도 <친화력>의 오필리아도 자살했다. 기독교 윤리상 자살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지옥의 유황불이다. 이것은 뭔가 불공정하지 않는가? 베르테르와 오필리아 같이 누구보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을 기존의 종교윤리와 도덕으로 단죄할 수 있는가? 파우스트처럼 자신을 믿고 이 지상에 인류를 위한 낙원을 건설하려 한 사람은?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쳐주었다고 하여 벌을 받았던 프로메테우스의 입을 빌어 괴테는 기존의 계몽주의적 신에 항변을 한다. 합리적 이성을 넘어서 비합리적 감정을 가진 살아있는 인간을 용인하라고!
"나는 여기에 앉아
내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고 있다
나와 같은 인간을
고뇌하고
눈물을 흘리고
향락을 즐기고
기뻐하는 인간을
그리고 나처럼 그대를 흠모하지 않는 인간을!"
“하지만 무감각한 것으로 구원을 바라진 않겠다.
전율을 느끼는 건 가장 인간다운 거야.
이런 감정은 그 대가가 크긴 하지만
전율을 통해서만 비상한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지.(파우스트2부, 김재혁역)
괴테는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아놀트의 <교회와 이단의 역사>를 읽고 난 후의 소감을 회상하였다.가시적 교회와 구별된 비가시적 교회를 꿈꿨던 아놀트처럼.자신만의 고유한 종교적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고!
"나는 이 책속의 여러 다른 견해들을 열심히 꼼꼼하게 읽어보았으며, 그런데다가 사람이면 누구나 결국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종교를 가져야한다는 말을 늘 들어왔었던 터라, 이번 기회에 나도 나만의 고유한 종교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고, 그래서 나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신플라톤주의가 근간이 되었고, 여기에 연금술적인 것, 신비주의적인 것, 유대교에서 유래한 신비철학적인 것들도 합해졌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내 맘에 드는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내안에 구축하였다."(시와진실, 2부,박종소역:논문에서 재인용)
결국 그는 낭만주의의 우산아래서 개인의 특수성, 사적 욕망의 인정을 찾았다. 그리하여 <파우스트>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새로운 개념의 신을 만들었다. 이름부칠 수 없는 신! 괴테의 신은 사랑때문에 어머니와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간 그레트헨을 순수성의 이름으로 구원하였다. 마찬가지로 악마의 도움을 받아 지상의 쾌락을 맛보고 심지어는 간척지의 노파까지 죽음으로 몰아간 파우스트를 끊임없는 탐구로 인간의 영역을 확장시켰다하여 구원하였다. 그에 따르면, 신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와 다르다. 운명에 맞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하여 인간의 한계를 넓힌 자, 신이 될 꿈을 버린 대신에 가슴 속에 신성을 간직하고, 이 땅 이순간을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을 신은 사랑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지상에서는 신을 잊어버린 자를 신은 사랑하는 것이다.
"바보라고! 저 위쪽으로 눈길을 던지며
구름 위에 자기 같은 종족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이곳에 다리를 붙이고 주위를 둘러봐,
노력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침묵하지 않아,
왜 자꾸 영원을 기웃거려?
인식한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거야.
이렇게 지상의 나날을 살면 그만이야
유령들이 날뛰어도 자기 길만 가면 되는 거야.
인생길 가다보면 고통도 행복도 만나는 법,
인간에게! 언제 만족이 있을 수 있나(.(2부.359쪽)"
괴테는 경제학에서 막스 베버 한 일-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회해-을 소설에서 하였다. 개인의 사적 욕망과 공적 윤리, 인간과 신을 화해시켰다. 이제 괴테의 이 파우스트적 인간의 첫걸음을 의지하여, 근대의 파우스트들은 니체의 위버멘쉬-초인-을 불러와 이 지상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외칠 것이다.
* 번역-펭귄판 <파우스트>
독일인들은 <파우스트>를 곁에 두고 즐거이 애송해왔다. 그런데 우리에게 <파우스트>는 왜 끝까지 읽기 어려운 소설이 되었을까? (나역시 1부는 여러 번 보았지만 2부를 완독한 것은 이번의 펭귄판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 문제를 <파우스트>가 지닌 운문적인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않는 번역과 읽기의 문제라고 본다.
최근에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김재혁 번역의 <파우스트>는 원전 텍스트의 시적 운율을 탁월한 현대의 우리 말로 재현함으로써 <파우스트> 번역의 숙제 중 하나였던 시적 운율의 번역불가능성에 도전하였다. 그 결과 종래의 눈으로 읽는 <파우스트>가 아니라 입으로 낭독하는 괴테 당시의 본래의<파우스트>를 복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원작 <파우스트>가 지닌 진지함과 익살까지 잘 살려내어, 끝까지 <파우스트>를 읽는 기쁨을 더하였다. 60권 가량의 독일문학서를 번역한 독문학자에다 우리말 어휘력이 탁월한 시인이기에 가능한 번역이었다. 그의 번역본 괴테의 현란한 스텝에 맞추어 끝까지 발을 삐지 않고 춤을 춘 멋진 번역이라 생각된다. 그자체로도 하나의 문학 작품인!!!
<파우스트 2부>에 나오는 말로 번역자에게 찬사를 바친다.
"누군가 뭔가 해내면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하오!"
* 읽기
<파우스트>가 산문체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희곡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줄거리 파악이 쉽지 않다. 특히 서양고전에 대한 폭넓은 인용, 상징, 복잡하고 모순적 요소의 융합, 경쾌한 풍자와 진지한 주제의식이 담겨있는 <파우스트 2부>의 줄거리를 따라가긴 힘들다. 이때 빨리 읽지 말고 장면이나 대사 하나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전체적인 줄거리가 들어온다. 시집처럼 쉬어가며 음미하며 읽기를 권한다. 그러면 그 많은 인용과 삽입된 이야기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통일된 귀결점을 향한다는 것을 저절로 알 수 있다.
*순간을 포착할 줄 아는 남자,
이런 남자야말로 진정한 남자라 하겠네
*자네 스스로에 대해 믿음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자네를 신뢰할거야
*헤매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지 못해
*이순간은 보물입니다. 노다지고 재산이고 담보이죠.
* 헬레네 나 여기 있다고, 여기
*진귀한 운명을 되새김질 하지 마세요.
*존재는 의무지요, 비록 한 순간이라도.
*길은 없어요! 갈 수 없는 곳으로
발을 디딜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거요. 애원을 받아주지도
애원할 수도 없는 곳으로 가는 거요.
*저는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 좋아요
*움켜쥐고 행동하는자 용감한 자
*태초에 행동이 있었느니라!
*잘 들어요, 내 귀여운 사랑!
하느님에게 누가 이름을 붙일까?
어느 누가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누가 또 가슴으로 느끼면서도
감히 나서서 이렇게 말할까?
나는 하느님을 안 믿는다고.
그분은 모든 것을 품어주고,
지상의 모든 것을 감싸니,
그분은 당신과 나, 스스로까지
품어주고 감싸주지 않나?
저 위에 드리운 하늘이 안보여?
우리 발밑엔 이렇게 굳건한 땅이 있고,
영원한 별들은 다정한 눈길로
우리 머리 위에 떠오르잖아.
당신의 눈을 바라보는 내 눈이 보이지,
그러면 아마 보일 거야, 모든 것이
당신의 머리와 당신에게 몰려와
알 수 없는 신비로움 속에
당신 곁에서 보일듯 안 보일 듯
서로 손에 손을 잡는 모습이 말이야.
그것들로 당신의 방대한 가슴을 채워요,
더없는 행복감에 젖어들게 되면,
그것을 당신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요,
행복이든! 가슴이든! 사랑이든! 신이든!
나는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느낌이야말로 전부요,
이름이야 소음과 연기에 지나지 않아,
하늘의 불빛을 흐릿하게 하는.(제1부 '마르테의 정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