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의 <루쉰전>의 서문을 읽다가 선생이 서문에서 번역해 인용한 '루쉰의 유언'중에 오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 선생은 루쉰같은 위대한 사람은 당연히 남을 용서하는 사람과 사귀라고 유언을 했을 것이라는 논리적 전제에 사로잡히셔서 문장의 내용을 간과하여, 잘못 번역하는 실수를 하신 것 같다.

단 한 줄의 작은 오역이지만 '루쉰의 유언'이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글인 바람에, 그리고 신영복 선생이 독자를 많이 가진 분이라서, 불행히도 선생의 오역이 인터넷에서 너무 많이 떠돌고 말았다. 그래서 바로잡고자 포스트를 올린다.

장문의 번역에는 오역이 없을 수 없다는 점에서, 번역하는 일은 참, 힘든 작업이다.

 

참고로 루쉰유언의 원문을 올린다

 

鲁迅遗嘱

鲁迅未留下正式遗嘱,只是在逝世前一个月写的杂文《且介亭杂文附集·死》中提到在病重时曾经想过要立遗嘱,但也没有写下来,在文章中回想起了几条,原文如下:

       “当时好像很想定了一些,都是写给亲属的,其中有的是:
  一,不得因为丧事,收受任何人的一文钱。——但老朋友的,不在此例。
  二,赶快收敛,埋掉,拉倒。
  三,不要做任何关于纪念的事情。
  四,忘记我,管自己生活。——倘不,那就真是胡涂虫。
  五,孩子长大,倘无才能,可寻点小事情过活,万不可去做空头文学家或美术家。
  六,别人应许给你的事物,不可当真。
  七,损着别人的牙眼,却反对报复,主张宽容的人,万勿和他接近。

       此外自然还有,现在忘记了。只还记得在发热时,又曾想到欧洲人临死时,往往有一种仪式,是请别人宽恕,自己也宽恕了别人。我的怨敌可谓多矣,倘有新式的人问起我来,怎么回答呢?我想了一想,决定的是:让他们怨恨去,我也一个都不宽恕。

       但这仪式并未举行,遗嘱也没有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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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오역이 7항에 있으므로 바로잡는다.

 

오역: 7.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하고는 가까이 하지 말고, 복수를 반대하고 인내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도록 하라.

 교정:     七,损着别人的牙眼,却反对报复,主张宽容的人,万勿和他接近。
               이문장은  자신이 잘못한 일에 사과는 커녕  관용의 덕을 내세워 타인의 관용을   

              강요하는 그런 염치없는 사람과는사귀지 말라는 뜻이다.

               즉 바르게 번역하면 "  7.남의 이와 눈을 상하게 해놓고, 오히려 보복에 반대한다면서 관용을 주장하는 그런 따위의 사람들에겐 절대 접근하지 마라" 이다. 뜻이 윗번역과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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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루쉰의 유언을 번역해 올린다.

 

1. 장례식을 위해  누구의 돈이든지   단 한푼도 받지마라. 단, 친구는 예외다.
2. 즉시 입관하여 묻어버려라.
3. 어떤 기념행사도 하지 마라.
4. 나를 잊고 자기 생활을 돌보아라. 그러지 않으면 정말 어리석다.
5. 아이들은 커서 재능이 없다면,  조그만 직업을 택해  살도록 하라. 절대로 실속 없는 문학자나 미술가가 되지 말도록 하라.
6. 타인의 약속을 믿지 마라.
7. 남의 이와 눈을 상하게 해놓고도  보복에 반대한다면서 관용을 주장하는 그런 사람을 절대 가까이 하지 마라

이 밖에도 또 있지만 잊어버렸다. 열이 몹시 심할 때, 유럽 사람들은 임종시에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너그럽게 용서해주길 바라고 자기도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의식을 행한다.  나는 원한을 산 사람들이 많은데, 신식 인물들이 내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끝에 나는 결심했다.

그들이 나를 증오하도록 내버려두어라. 나 역시 하나도 용서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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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펭귄클래식 13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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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헛되고도 무의미하다.

내가 두려워하거나 경외하는 모든 것은 마음의 동요로 인해 일어나는 것일 뿐

그 자체에는 전혀 선과 악이 내재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선이, 즉 전달될 수 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이 없어도 독자적으로 능히 정신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 정녕 존재하는지를 조사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말은 내기 일단 찾아내 얻게 된 다음에는 지속적인 지복을 영원토록 향유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실존하는지를 탐색해보기로 했다는 뜻이다."

 

스피노자의 <지성의 개선 및 지성을 사물의 참된 인식으로 인도하는 방법에 대한 논고>에서(레온 드 빈터,<<호프만의 허기>>,지명숙 옮김, 문학동네, 2012: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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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잖아. 즐거움 따위를 원하는 게 아니야.

광란에 몸을 맡기고 싶은 거야. 고통스런 쾌락과

애증과 늘 되살아나는 좌절에 말이야.

이 가슴은 지식의 갈증에서 나았으니

앞으로는 어떤 고통도 피하지 않으리라.

우리 인류 모두에게 주어진 것들을 다

이 깊은 가슴으로 속속들이 만끽해 보리라.

이 정신으로 지고한 것과 천한 것을 움켜잡고,

인류의 모든 고통과 행복을 이 가슴에 쌓으리라.

나의 자아를 확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궁극에는 그들처럼 나 또한 파멸하리라"

괴테, <<파우스트>>, 김재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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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왜 <파우스트>저술에 평생을 바쳤을까?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나를 떠나지 않는 의문은 아주 평범하고도 중요한 의문 하나였다. 한 작가가 60년의 세월을 바쳐-4번의 발표와 수정을 거쳐- 죽기 직전에 완성한 작품이라면, 평생 그를 따라 다니던 인생의 숙제를 작품을 통해 풀고자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보편적인 문제,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문제에 닿아있을 테고, 그것이 그의 소설을 시대를 초월해 읽히게 하는 고전이 되도록 하였을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댓가로 머리로 사유하는 지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행동하면서 체험하기를 원했다. 메피스토펠레스를 이용해서라도 위로는 신을 향한 정신의 최고정점까지 아래로는 윤리적 체제 속에서는 악이라 불리는 심연 밑바닥의 욕망까지, 인간의 최대 한계점까지 체험해보고자 하였다.

파우스트전설 속의 파우스트는 지상의 욕망과 쾌락의 댓가로 죽음 후에 영혼이 소멸되는 징벌을 받았다. 괴테는 이에 동의할 수 없었다. 파멸과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주어진 필사의 운명에 맞서며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넓힌 자는 죽어서도 사는 불멸을 얻으리라! 그 불멸, 그것이 신이 주는 용서고 구원이다!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정점에 선 파우스트는 바로 괴테 자신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과 자신의 삶을 구원하고 싶었던 괴테! 그 인생의 자서전이자 변명서가 그의 <파우스트>다.

 

<파우스트>를 통해서 괴테는 여러 양극적인 딜레마들을 조화시켜 새로운 가치체계를 완성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계몽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제가치가 함께 만나는 시대에 산 괴테의 소명이기도 하였다. 근대적 개인의 사적욕망을 어떻게 공동체적 윤리체계-공적 욕망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기독교적 선악이분법적 구원관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 기독교적 세계관을 부정하지 않고서!!

 

사적 욕망과 공적 윤리가 불일치하는 경계선에서 개인의 욕망과 권리를 어떻게 어느정도까지 인정할 것인가? 인간 본래의 실존적 삶과 종교윤리가 일치하지 않을 때, 누가 삶을 구할 것인가? 초기에 계몽주의에 경도된 괴테는 공적 제도와 문명의 손을 들었다. 그리하여 공적윤리인 결혼의 신성을 범하는 경계를 넘는 주인공-사적이고 특수한 욕망을 가진 개인-을 자살로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죽음의 댓가를 치뤄야만 자신의 사랑을 구할 수 있었다. 마치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가 잘못된 욕망 때문에 자살이나 다름없이 부친의 손에 죽었듯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도 <친화력>의 오필리아도 자살했다. 기독교 윤리상 자살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지옥의 유황불이다. 이것은 뭔가 불공정하지 않는가? 베르테르와 오필리아 같이 누구보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을 기존의 종교윤리와 도덕으로 단죄할 수 있는가? 파우스트처럼 자신을 믿고 이 지상에 인류를 위한 낙원을 건설하려 한 사람은?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쳐주었다고 하여 벌을 받았던 프로메테우스의 입을 빌어 괴테는 기존의 계몽주의적 신에 항변을 한다. 합리적 이성을 넘어서 비합리적 감정을 가진 살아있는 인간을 용인하라고!

  

"나는 여기에 앉아

내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고 있다

나와 같은 인간을

고뇌하고

눈물을 흘리고

향락을 즐기고

기뻐하는 인간을

그리고 나처럼 그대를 흠모하지 않는 인간을!"

 

“하지만 무감각한 것으로 구원을 바라진 않겠다.

전율을 느끼는 건 가장 인간다운 거야.

이런 감정은 그 대가가 크긴 하지만

전율을 통해서만 비상한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지.(파우스트2부, 김재혁역)

 

괴테는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아놀트의 <교회와 이단의 역사>를 읽고 난 후의 소감을 회상하였다.가시적 교회와 구별된 비가시적 교회를 꿈꿨던 아놀트처럼.자신만의 고유한 종교적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고!

 

"나는 이 책속의 여러 다른 견해들을 열심히 꼼꼼하게 읽어보았으며, 그런데다가 사람이면 누구나 결국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종교를 가져야한다는 말을 늘 들어왔었던 터라, 이번 기회에 나도 나만의 고유한 종교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고, 그래서 나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신플라톤주의가 근간이 되었고, 여기에 연금술적인 것, 신비주의적인 것, 유대교에서 유래한 신비철학적인 것들도 합해졌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내 맘에 드는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내안에 구축하였다."(시와진실, 2부,박종소역:논문에서 재인용)

 

결국 그는 낭만주의의 우산아래서 개인의 특수성, 사적 욕망의 인정을 찾았다. 그리하여 <파우스트>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새로운 개념의 신을 만들었다. 이름부칠 수 없는 신! 괴테의 신은 사랑때문에 어머니와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간 그레트헨을 순수성의 이름으로 구원하였다. 마찬가지로 악마의 도움을 받아 지상의 쾌락을 맛보고 심지어는 간척지의 노파까지 죽음으로 몰아간 파우스트를 끊임없는 탐구로 인간의 영역을 확장시켰다하여 구원하였다. 그에 따르면, 신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와 다르다. 운명에 맞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하여 인간의 한계를 넓힌 자, 신이 될 꿈을 버린 대신에 가슴 속에 신성을 간직하고, 이 땅 이순간을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을 신은 사랑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지상에서는 신을 잊어버린 자를 신은 사랑하는 것이다.

 

"바보라고! 저 위쪽으로 눈길을 던지며

구름 위에 자기 같은 종족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이곳에 다리를 붙이고 주위를 둘러봐,

노력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침묵하지 않아,

왜 자꾸 영원을 기웃거려?

인식한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거야.

이렇게 지상의 나날을 살면 그만이야

유령들이 날뛰어도 자기 길만 가면 되는 거야.

인생길 가다보면 고통도 행복도 만나는 법,

인간에게! 언제 만족이 있을 수 있나(.(2부.359쪽)"

 

괴테는 경제학에서 막스 베버 한 일-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회해-을 소설에서 하였다. 개인의 사적 욕망과 공적 윤리, 인간과 신을 화해시켰다. 이제 괴테의 이 파우스트적 인간의 첫걸음을 의지하여, 근대의 파우스트들은 니체의 위버멘쉬-초인-을 불러와 이 지상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외칠 것이다. 

 

* 번역-펭귄판 <파우스트> 

독일인들은 <파우스트>를 곁에 두고 즐거이 애송해왔다. 그런데 우리에게 <파우스트>는 왜 끝까지 읽기 어려운 소설이 되었을까? (나역시 1부는 여러 번 보았지만 2부를 완독한 것은 이번의 펭귄판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 문제를 <파우스트>가 지닌 운문적인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않는 번역과 읽기의 문제라고 본다.

 

최근에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김재혁 번역의 <파우스트>는 원전 텍스트의 시적 운율을 탁월한 현대의 우리 말로 재현함으로써 <파우스트> 번역의 숙제 중 하나였던 시적 운율의 번역불가능성에 도전하였다. 그 결과 종래의 눈으로 읽는 <파우스트>가 아니라 입으로 낭독하는 괴테 당시의 본래의<파우스트>를 복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원작 <파우스트>가 지닌 진지함과 익살까지 잘 살려내어, 끝까지 <파우스트>를 읽는 기쁨을 더하였다. 60권 가량의 독일문학서를 번역한 독문학자에다 우리말 어휘력이 탁월한 시인이기에 가능한 번역이었다. 그의 번역본 괴테의 현란한 스텝에 맞추어 끝까지 발을 삐지 않고 춤을 춘 멋진 번역이라 생각된다. 그자체로도 하나의 문학 작품인!!!

 

<파우스트 2부>에 나오는 말로 번역자에게 찬사를 바친다. 

"누군가 뭔가 해내면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하오!"

 

* 읽기 

<파우스트>가 산문체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희곡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줄거리 파악이 쉽지 않다. 특히 서양고전에 대한 폭넓은 인용, 상징, 복잡하고 모순적 요소의 융합, 경쾌한 풍자와 진지한 주제의식이 담겨있는 <파우스트 2부>의 줄거리를 따라가긴 힘들다. 이때 빨리 읽지 말고 장면이나 대사 하나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전체적인 줄거리가 들어온다. 시집처럼 쉬어가며 음미하며 읽기를 권한다. 그러면 그 많은 인용과 삽입된 이야기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통일된 귀결점을 향한다는 것을 저절로 알 수 있다.

 

*순간을 포착할 줄 아는 남자,

이런 남자야말로 진정한 남자라 하겠네 

*자네 스스로에 대해 믿음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자네를 신뢰할거야 

*헤매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지 못해 

*이순간은 보물입니다. 노다지고 재산이고 담보이죠. 

* 헬레네 나 여기 있다고, 여기

*진귀한 운명을 되새김질 하지 마세요. 

*존재는 의무지요, 비록 한 순간이라도. 

*길은 없어요! 갈 수 없는 곳으로

발을 디딜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거요. 애원을 받아주지도

애원할 수도 없는 곳으로 가는 거요.

 

*저는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 좋아요 

*움켜쥐고 행동하는자 용감한 자 

*태초에 행동이 있었느니라!

 

*잘 들어요, 내 귀여운 사랑!

하느님에게 누가 이름을 붙일까?

어느 누가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누가 또 가슴으로 느끼면서도

감히 나서서 이렇게 말할까?

나는 하느님을 안 믿는다고.

그분은 모든 것을 품어주고,

지상의 모든 것을 감싸니,

그분은 당신과 나, 스스로까지

품어주고 감싸주지 않나?

저 위에 드리운 하늘이 안보여?

우리 발밑엔 이렇게 굳건한 땅이 있고,

영원한 별들은 다정한 눈길로

우리 머리 위에 떠오르잖아.

당신의 눈을 바라보는 내 눈이 보이지,

그러면 아마 보일 거야, 모든 것이

당신의 머리와 당신에게 몰려와

알 수 없는 신비로움 속에

당신 곁에서 보일듯 안 보일 듯

서로 손에 손을 잡는 모습이 말이야.

그것들로 당신의 방대한 가슴을 채워요,

더없는 행복감에 젖어들게 되면,

그것을 당신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요,

행복이든! 가슴이든! 사랑이든! 신이든!

나는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느낌이야말로 전부요,

이름이야 소음과 연기에 지나지 않아,

하늘의 불빛을 흐릿하게 하는.(제1부 '마르테의 정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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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이란 자신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장소에 이르는 것이다

 

-나탈리 크나프-

 

---울리히 슈나벨의 <휴식-행복의 중심>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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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펭귄클래식 13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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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의 틀 속에 온갖 속담과 경구, 수많은 주옥같은 시들을 가득 채운 이 책은 인생의 경전처럼 시집처럼 조금씩 음미하며 읽어야 제맛이 난다. 그대로 시집이나 연극대본이 되어도 좋을 만큼 멋진 우리말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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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0.21

오늘은 히로쓰 고지란 청년을 소개합니다.

저는 그 이름을 일본인을 구하고 대신 죽은 이수현씨의 의로움을 다룬 어느 신문의 사설 모두에서 처음 봤어요. 이수현에 대한 이야기의 실마리로 조선인(비하니 뭐니 논하지 말 것)을 구하고 대신 죽은 한 일본인 청년, 즉 히로쓰 고지가 소개되었지요. 보편적 인간애가 국적보다 앞섰던 사례를 거론하면서 긴장 관계에 있는 한일관계를 우호적으로 풀어보려는 의도도 있었지요. 내용인즉, 1941년 일제치하때 청진 앞바다에서 일본상선 기비호가 러시아의 기뢰에 부딪쳐 침몰하게 됩니다. 이 배의 구명보트의 수가 적어 일본 경찰은 일본인만 구조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히로쓰 고지라는 23세의 청년이 자기 자리를 한 조선인에게 양보하고 침몰하는 배에 남아 죽었다는 게 그 스토리의 골잡니다.  이 청년이 조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京都大學 윤리학과(철학과) 3년생이란 것과 죽을 때 칸트의 유명한 유언 뇌까렸다는 일화가 있었어요. 

 

그 히로쓰 고지가 요즘 저를 유혹하는 청년입니다. 의로운 일로 요절해서가 아니라 철학정신을 가지고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살았던 한 철학도로서 말입니다.  그는 죽기 3년 전 20세의 나이에 쓴 일기를 남겼는데, 그의 사후 친구들이 이 일기를 정리해 <어느 철학도의 수기>란 표제로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일기는 수학자 김용운 선생의 번역으로 박영사에서 문고본으로 1978년에 펴낸 적이 있습니다. 참, 오래된 책이지요. 아마 구할 수 없을테니 제 소개가 필요하리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좋은 책을 우리 젊은이들이 계속 읽도록 펴내지 않는 것, 또한 안타까이 생각합니다.

 

20살의 청년이 철학적 고민을 해봤자 얼마나 심도있게 하겠느냐고 의혹을 제기할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일부분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우리의 20살 젊은이도 저 정도로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스스로 진로를 택하는지 묻고 싶었어요. 히로쓰 고지는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격의 완성이라 생각하고 생존적 현실이 문제되는 전쟁통에도  철학을 전공으로 택합니다. 시간의 흐름이 직선적이지 않은 이상, 오늘 날의 학생이 70년전의 학생보다  더 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로마사이야기>에서 읽어 보았듯 당시의 공화정에 대한 토론은 우리보다 더 정치하지 않습니까. 고지의 책을 읽으면서 마흔이 넘은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스무살 그청년이 그대로 했다는 것에 솔직이 놀랐어요. 의롭게 요절해서 영원히 젊음을 얻은 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그 청년은 가슴속에 불타는 생명, 즉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는 치열한 불꽃을 지니고자 했다는 점에서 '영원한 청춘의 사람'이었던 거지요.

저도 고지처럼 '관념의 인간 ', 다시말해 정신의 사람이고자 했지요. 정신의 인간이란 다시말해 철학하며 사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정신적 관념을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사는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현실을 배제하고 추상적 관념 속에서 산다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에 부딪치는 경험들에 맞서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치열하게 사색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안일한 삶을 포기하고 끊임없이 싸우며 사는 것이지요. 고지의 말을 빌면 "끊임없이 과한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말이지요. 이상주의라고 말할 때 그 이상이란 미래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의 배경이 되어 현실을 단련시키는 것을 말한다는 고지의 일기를 읽었을 때, 제게 있어 관념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지요. 

 

자기 도덕의 기준이 완화될까 사랑과 용서란 말을 쉽게 뱉지 못한다는 청년, 사랑한다는 것이 때론 도끼날을 들고 내리찍는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청년, 운명을 사랑하는데 앞서 운명과 싸우겠다는 청년, 그 싸움이 오히려 살아있는 운명을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청년. 그 청년을 시험에 찌들어 수동적 삶을 사는, 그리고 먼 이상보다는 가까운 현실을 덜컥 손에 잡는 오늘날의 또래의 청년이 만나기를 나는 바라는 것입니다. 대학이 기업 인력공급의 인큐베이터로 전락해 사회의 방향을 설정할 인문학조차 위태로운 이 때 철학도의 글을 권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치열한 고민이야말로 작게는 인생의 비젼을 수립하게 하는 밑걸음이고, 크게는 한 사회의 방향에 대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눈을 기르는 시기인 것입니다.

 

철학적 사고란 어떤 것인지 고지의 글을 토대로 한 번 예를 들어 볼께요.

<요즘 길거리에서 흔히 아름다운 사람을 많이 본다. 이 도시는 발전의 결과 오히려 경박한 것으로 타락해버렸다. 그러나 반면에 도회적 색채가 짙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것 때문에 비교적 세련된 근대적인 미를 지닌 사람이 많아졌다. 그런 사람을 보면 하나의 피가 통하는 형상으로서 그 아름다움에 도취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을 그 대상에 넣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벌거벗은 벌레, 요염한 아미도 그 순간에흙덩어리나 다름없어진다....중략...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람이 인간 세계에서 자신의 인간성과 인정을 교차시키며 끝내는 그것을 넘어선 점이 있기 때문이다.>

고지의 생각을 하나 더 소개하지요. 고지는 당시의 문화인 혹은 인텔리겐차의 생활이 단순히 외적 자극에 반응할 뿐 극히 단순하고 유치한 감각에 의지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생활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진정한 문화가 아니라고 평합니다. 문화란 비록 '그것이 좁은 것일지라도 깊은 것'에서 발생한다는 것이죠.

 

외적 감각 생활에 쫒겨 내적 생명을 망각할 때 그것은 자기 상실이며 자기 생명의 상실이랍니다. 즉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음악회를 다니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스파게티를 먹는다해도 그것이 내적 생명을 길러주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문화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야인이 되겠다고 고지는 말합니다. 이러한 고지의 생각은 평소의 제 생각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자신이 생활속에서 공명하지 못하는 문화적 행사의 향유가 문화는 아니라는 생각요. 음악회에 졸면서 앉아 있는 것이 문화가 아니라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즐기며 듣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일 수 있다는 거 말입니다.

 

죽음에 직면해서 결단을 요구받았을 때 고지는 평소의 사색하던 바대로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es ist gut"이라 외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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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운명은 그에게 살아날 기회를 줬지요. 일본인들이 다 구조되기에 그 또한 그 일원이 되면 별다른 죄책감없이 살았을 거예요. 그러나 철학도였던 고지는 그 운명에 맞서 조선인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죽음을 결단합니다. 안일을 경계하고 치열하게 진리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일기의 내용처럼요. 그런 자신의 철학적 죽음이기에 '이것으로 좋다'고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살기도 힘들며 하나의 생각만을 견지하며 살기도 힘듭니다. 오히려 하나의 일관성 있는 관념만 추구하며 사는 것은 독선과 편견이 될 때도 있고요. 하지만 안락한 일상을 경계하고 정신의 날을 갈며 때론 시대와 불화하며 사는 것도 젊을 땐 필요하다고 봅니다. 젊은이가 너무 둥글한 것은 보기 좋잖습니다. 날선 정신이 세월따라 둥글고 깊게 갈아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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