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벗어나는가? 무엇이 우리를 우리 마음대로 되돌릴 수없다는 필연성
속에 위치시키는가? 분명 우리 한계 때문이다. 우리는 한계지어진 존재이다.
우리가 정면을 바라 볼 때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저기 있는 것을 포기한다는 조건에서이다. 한계는 우리를 붙들고 우리를
매어두고, 우리를 우리인 것으로 향해 밀어내며, 우리로 향해 되돌리고, 우리를
다른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벗어난 존재로 만든다. 또 다른 곳에
다가가는 것, 그것은 따라서 한계로부터 자유로운 것의 자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여기와 지금에서 벗어난 존재가 아닐까?
나는 어쩌면 내 앞에 있는 것만 본다. 하지만 내 뒤에 있는 것도 그려볼 수도 있다.
의식을 통해서 나는 언제든지 내가 존재하는 곳과 다른 곳에, 언제나 주인으로
타자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의 불행이기도 하다. 의식을 통하여 우리는 현전하는 것을 벗어나기도
하지만, 우리는 표상으로 넘어간다. 표상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밀성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구속 상태를 되살린다. 우리는 우리 앞에 서 있다. 우리가 절망적으로
우리 밖을 바라볼 때라 하더라도.
"운명이라 불린다. 마주한다는 것은
오로지 그것 뿐, 언제나 마주하여(두이노의 비가 전집 2권 476쪽)"
----출처: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이달승 역, 그린비, 2010, 182-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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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들은 언제나 마주하는 위험, 끝까지 사람이 더이상 계속할 수 없는 지점까지
이끌고 간 경험의 산물 "이라고 릴케는 아내 클라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썼지요.
운명이란 한계지워진 것이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욕망이 바로 예술의 역할이라면,
예술작품은 그 작품을 가능케 한 자에게 희생을 강요한다고요.
불행이 예정되어 있지만,그게 의미로운 일이고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릴케는 보았죠.
비단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운명에 마주선 사람이라면 위험 속에 스스로를 가두며
살지 않나요. 삶의 무게를 극한으로 밀면서.
"어찌 너는 기다리지 않았는가.
무거움이 너에게 견딜 수 없게 되기를, 그때 그것은 역전되거늘,
그리고, 그것이 그토록 무거운 것은 그토록 순수하기 때문인 것을."
(릴케의 시 "볼프 그라프 폰 칼트로이트를 위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