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어둠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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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담백한' 명예감각 때문에 시원하게 망해버린 <<한낮의 어둠>> 의 류바쇼프를 보면, 어느 정도의 허세, 실속없는 제스처, 설익은 분별력들은 존재 자체로 세계의 평화를 짊어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프롤레타리아에게 밤이 필요한 이유인 것일까.

루바쇼프와 옆방 수감자 "402호"가 벽을 두드려가며 나눈 대화. 
심문 끝에 루바쇼프가 항복을 결심하자,

"난 당신이 예외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명예가 남아 있나?"
루바쇼프는 코안경을 손에 쥔 채 등을 대고 누웠다.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그는 다시 두드렸다.
"명예에 대해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
402호는 빠르고도 정확하게 두드렸다.
"명예란 자기의 신념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다."
루바쇼프도 즉각 대답했다.
"명예란 허영심이 없는 유용한 것이다."
402호는 더 크게 그리고 더 날카롭게 답했다.
"명예란 품위다, 유용함이 아니라."
"뭐가 품위인가?"
루바쇼프가 글자에 간격을 두면서 물었다. 그가 조용히 두드릴수록 402호가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당신 같은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야."
402호가 루바쇼프의 질문에 대답했다.
"우린 품위를 이성으로 대체해 버렸다."
루바쇼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두드렸다.
402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아서 쾨슬러, <<한낮의 어둠>> p.235-6, 문광훈 역, 후마니타스, 2010.


p.p.s.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평전을 읽던 중에 봐서 그런가, 나는 루바쇼프가 트로츠키를 모델로 한 줄 알았는데 부하린이라고 한다(부하린의 평전은 아직 못 읽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부하린: 혁명과 반혁명의 사이>> (김남국)을 구했다. 젊은 인텔리겐치아 혁명가의 삶이란 대개 비슷비슷했던 것 같다. 잠시 전선이 소강상태일 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엄청나게 읽는다든가... 

또, 모스크바 재판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데 아이작 도이처판 트로츠키 평전의 1부작이나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 평전을 보건대 모스크바 재판 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의 어떠한 정치범이 놓인 상황이어도 기본적으로 비슷했을 것 같다. 나보코프도 - 러시아 혁명이 곱게 보였을 리가 없겠지만 - 서구(그러니까 나보코프 입장에서 서구) 좌파들이 으레 러시아의 잔혹한 사건들은 스탈린 시기에만 일어나고 레닌 때는 없었다고 생각하거나 이상이 꽃핀 호시절인 양 생각하는 것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는데 그것도 수긍할 만 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마... 거의 모든 정치감옥의 이야기이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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