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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라, 기억이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오정미 옮김 / 플래닛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전혀 관계없어보이는 책을 연달아 읽다 보면 기이한 방식으로 생각의 연쇄가 일어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잡히는 대로 읽는 것의 즐거움이기도 하고, 억지스럽고 무용한 일이기도 하다. 아마 후자가 되겠지만 그래도...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Speak, Memory)>> 를 보고 있다. 영어가 조금이라도 편한 사람은 원서를 보기를 추천한다. 대조해 본 것은 아니지만 나보코프가 자서전이라고 해서 문체를 소홀히 할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의 반은 이런 저런 가족사에 얽힌 연대기적 이야기와 풍경 묘사라 번역이 제법 고생스러웠겠다 싶다. 하지만 교정실수와 비문이 눈에 띈다. 가독성을 좋게 하는 방법이 읽으면서 떠오를 정도다. 하지만 나는 자서전적 사실을 우걱우걱 삼키고 싶은 마음에 번역본을 보고 있다.
그저 살았을 뿐인데 삶이 세계사적 스케일을 갖게 되는 이들이 있다(세계사, 가 내포하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해서는 잠시 제쳐두기로 하자). 나보코프는 1899년 출생해서 자서전에 따르면 '세기의 연도와 나이를 함께 먹었다.' (죄송, 정확한 발췌는 아니다) 전제 체제의 붕괴와 러시아 혁명의 발발, 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나보코프의 삶은 이 격랑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구체제의 지적, 물적 유산을 물려받은 귀족 계급의 자제로서, 도래할 새 시대의 지분을 찾고자 했던 유럽의 교양인으로서, 그리고 다시는 고향을 밟지 못할 망명자로서... 역사는 20세기 초 그를 뻬쩨르부르그 근교 저택의 목가적인 분위기 안에 던져놓고, 교양과 예술이 그대로 생활이 되던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나보코프 가족은 크리미아 반도로 피신했다가, 프라하로, 베를린으로, 영국으로, 미국으로... 러시아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자서전을 통해 드러난 그의 가족사의 면면은 그 시대의 귀족이 으레 그러하였다고 말하기에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화려하다. 외가와 친가 모두 러시아의 정치, 외교, 군사, 학문, 예술 모든 분야에 있어서 이름을 남기고 있다. 나보코프 가족의 시조는 타타르의 왕자였다고 하며, 15세기에 이미 조상이 모스크바에 있는 왕자의 영토 내에 땅을 가지고 있었다. 고조부는 표트르 1세 치하에서 노브고로드 주둔군의 수장이었으며, 증조부는 해군 지휘관으로 그의 이름을 딴 '나보코프의 강'이 생겨날 정도였다. 조부는 두 명의 차르 밑에서 8년동안 법무장관을 지냈다. 자서전을 따라 '조상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의 문화 예술계로까지 연결된다.
하지만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욱 넋을 놓게 만드는 것은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러시아 문학의 황금 시대에 나보코프 가족이 이 대표적인 작가들과 맺었던 관계이다. 그의 증조부의 형이었던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나보코프는 반 나폴레옹전의 영웅으로, 페트라솁스키 서클 사건으로 도스토옙스키를 감금(!)했던 페트로파블로스크 요새의 사령관이었다. 그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책을 허용했다고 나보코프는 적고 있다(도선생님, 그가 정말 선생님께 책을 허락했습니까?).
게다가 푸슈킨의 학교 친구로서 가까운 사이였던(그냥 학교 동창이 아니고 황제의 자녀나 교육시키던 그 짜르스코예 셀로의 리쩨이 동급생이다) 이반 푸슈친의 누이와 결혼했다. 삼촌은 입헌군주제/공화정을 위해 봉기했던 일련의 청년장교들인 데카브리스트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푸슈킨과 결투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다행히 이 때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푸슈킨은 후일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사망하게 된다. 나보코프는 자서전에서 다행히 이 결투가 "운명은 교수대를 향해 가던 어느 반란의 영웅을 저지하며 러시아에게서 <<예브게니 오네긴>>을 빼앗아 갈까 고민하였으나, 그리하지는 않았다" 며 익살스럽게 적고 있다. 이모는 의사였는데 마찬가지로 의사였던 안톤 체호프(동명이인 아니고 그 안톤 체호프!) 와 무슨 일로 싸웠는지 체호프 서간집에 나보코프의 이모에게 보내는'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야비한 격발'이 담긴 편지가 들어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아무리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자신을 위해 가족사를 탐구해 나갔다고는 하지만 어딘가에서 "봐봐, 나 이정도 끕이야."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
나보코프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옹호한 작가로 일컬어지며, 작품을 통해 도덕과 윤리, 사회와 정치를 말하는 것은 예술의 본령이 아니라고 보았다. 순간과 순간 사이, 눈의 깜박임과 깜박임의 사이에 '친친나트 C'가 존재했다는 것처럼(<<사형장으로의 초대>>), 생을 순간 속에서 명멸하는 것으로 보았고 예술은 그것의 본령이었다. 나보코프의 삶을 채운 것은 추억과 회상이었는데, 평생 집을 구입하여 정착하는 일 없이 오직 추억과 예술 그 자체에 대한 희구만을 가지고 살았다.
자서전에는 목가적인 유년 시절을 앗아간 것은 물론, 정치의 격랑 속에 아버지의 생명마저도 빼앗아간 혁명에 대한 나보코프의 태도를 엿보게 하는 부분도 있다. 가령 유년 시절의 영어 교육을 회상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렇다. "창문을 통해서는 머릿수건을 쓴 농부의 딸들이 정원의 길에 넙죽 엎드려 제초를 하거나 햇빛으로 얼룩진 모래를 부드럽게 긁어 고르는 모습이 내다 보였다(그들이 나라를 위해 거리를 청소하고 운하를 파낼 행복한 날들은 아직 저 너머에 있었다). 일면의 진실이기는 하지만 나보코프의 입으로 듣기에는 좀 씁쓸하다. 나보코프는 또 혁명으로 인해 현재가치로 수십억원에 달하는 상속 재산을 잃게 된 것을 다루면서, 독자에게 이렇게 일러두기도 한다.
"소비에트 독재정권과 나 사이의 오랜 (1917년부터 시작된) 싸움은 어떠한 종류의 재산 문제와도 완전히 무관하다. 나는 자신의 돈과 땅을 '훔쳐갔기에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이민자들을 절대적으로 경멸한다. 오늘날 내가 간직하고 있는 향수란 잃어버린 은행권에 대한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비대해진 나의 감각이다." (p. 91, ch. 3, 내 삼촌의 초상 中)
어린 시절에 대한 감각... 그가 일생을 통해 그리워해야 했던 그 감각의 평화로운 세계가 무엇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나보코프의 유년 시절의 추억은 잃어버린 은행권에 대한 슬픔의 우아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반문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층민이, 중인이, 혁명가가, 각자의 유년 시절을 회상과 추억의 대상으로 삼아 어떠한 예술을 하더라도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야 나보코프의 예술을 긍정하겠지만, 나보코프가 예술은 이러해야 한다, 라 말하는 순간 어딘가 뒷맛이 남는 것을 느낀다. 나보코프의 관점에서는 소설조차도 아닌, 정치 프로파간다나 종교 책자나 양산한 셈이 될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예술이 분리가능한 무엇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도로 다룰 필요가 없었다. 혁명이 본 궤도에 오르자 '더 중요한 현실에 투신'하기 위해 한 때 작가로서의 삶을 버리고 철도 기관공이 되었던(그러면서도 도래할 미래에 대한 긴장을 놓지 않았던)플라토노프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다시 이 글의 첫머리로 돌아와서... 실은 <<말하라, 기억이여>> 와 함께 무엇을 읽었기에 졸지에 자서전을 읽다가 나보코프 찜찜하다는 이야기로 새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려던 것이었는데. 나보코프를 뒤지는 사이에, 회사 사장님이 추천해서 <<빠빠라기>>를 읽게 되었다. CEO가 이 책을 추천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아이러니지만... 몇년 전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 얇은 책이다. 남태평양 티아베아섬의 추장 투이아비가 자기 형제들에게 유럽 문명의 탐욕을 깨우쳐주기 위해 한 연설을 독일인 선교사가 각색하여 받아적었는데, 그 내용이 통찰력이 있어서, 그냥 재미있네 껄껄 하고 넘기기에는 아까울 정도이다. '빠빠라기'는 원주민이 유럽 백인들을 부르는 말인데, 그의 눈에 비친 유럽인의 일상을 통해 문명과 야만이라는 편견의 허위가 폭로된다.
아무튼 내 눈을 사로잡은 부분은, 생뚱맞게도 연도이다. 나보코프가 태어난 1899년, 20세기가 시작되려고 하던 그 해, 투이아비 추장 - 그 섬에서는 지혜의 담지자 최고의 교양인인 - 은 1899년 만국박람회 프로그램의 일종으로 개최되었던 인종전시회에 '전시'되기 위해 유럽에 보내졌다. 1899년, 나보코프의 기억 속에 담긴 유럽 문명 세계와 투이아비 추장의 눈에 비친 유럽 문명의 세계 간의 어마어마한 시차는 <<말하라, 기억이여>> 를 읽는 사이사이에 튀어나와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혹시 투이아비 추장을 야만으로 간주한 것이 나보코프를 살찌운 목가적인 교양은 아니었는지. 수많은 피를 흘린 20세기 전반, 그 바탕에 깔린 억압과 빈곤, 사상의 출현 속에서 무슈 나보코프님을 괴롭히는 것은 망명자로서의 삶이 앗아간 어린 시절에 대한 감각인 것이다. ...누군가는 아마 이 때 생명을 잃었다.
...여기에서, 나보코프와 같은 해에 태어났던 한 작가를 떠올려 본다. 푸슈킨과의 일화를 간직한 조상이 있을 리 만무한, 보로네시 근교의 마부촌에서 철도 기계공의 장남으로 태어난 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가 그다. 플라토노프는 혁명으로 인해 교육의 기회를 얻고 고향의 공과대학에서 기술자 학위를 받아 기술자로 근무하면서 글을 썼다. 그는 도래할 사회주의의, 결코 낙관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미래를 상상했다. 서글픈 눈을 하고 불변의 진리를 희구했다. 나보코프가 사용했을 리 만무한 소비에트의 언어로... 나보코프가 플라토노프를 알았다면, 그의 작품들에 대해 과연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