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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지 않은 것들
시미즈 마사시 지음, 이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열린책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열린책들 식으로는 도스또예프스끼)=열린책들의 이미지를 공고히 할 요량인지, 이번에는 2차 문헌 3종 세트를 내놓았다. 하나는 절판되어서 헌책방에서나 구할 수 있는 E.H.Carr의 «도스토예프스키»와, 마르크 슬로님의 «도스또예프스끼와 여성» (원제는 Three Loves of Dostoevsky인데 이것을 구하려고 트위터에서 영국에 계시는 @ntrolls 님의 도움까지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멍하다…) 그리고 지금 말하려는 시미즈 마사시의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다.
어느 분야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연구자이거나 역자이기에 앞서서 작가에 대한 열렬한 팬심을 드러내고 마는 것을 느낀다. (서울대출판부, 최선 역의 «예브게니 오네긴»의 역자 후기와 주석을 보라! 소녀적인 팬심이 흘러넘친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접하고 스무 살에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책을 낼 정도로 평생을 도스토예프스키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시미즈 마사시에게서도 그렇다. 가령, 사건을 시간 순으로 읽어내는 치밀한 독해와 수비학을 결합한 1장 <도스또예프스끼 숫자에 숨겨진 비밀>을 보면 저자는 28일이 죽음과 재생의 비밀 숫자라면서 톨스토이가 28일에 태어났으며, 안나 까레니나가 브론스끼와 만나기 직전 누군가 28호입니다! 라고 외쳤으며, 도스또예프스끼의 사망일도 28일이고, 벨린스끼도 28일에 죽었다는 설이 있고(실제로는 26일이 유력), «악령»에서 베르호벤스끼가 다리야와 결혼을 승낙한 날이 28일이고, 가출한 날이 28일이라는 점을 들다가 난데없이 “내가 스쩨빤의 가출 날짜와 함께 «악령»의 날짜(요일)을 모두 해독한 날이 바로 1990년 5월 28일이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사람의 머리로는 풀 수 없는 신비한 일치일까?” 라 하면서 말 그대로 신비의 세계로 영영 가버리고 만다. ㅡㅡ; 안그래도 미신적인 경향이 있었던 도선생이 실제로 그러한 숫자를 염두에 두고 썼다면 이는 더이상 수비학의 영역이 아니라 작품 해독에 꼭 필요한 요소로서, 수비학이 가진 미심쩍음에 관계없이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이 정도면 중증이 아닌가. 주인공 게르만이 노름을 하는 퓨슈킨의 소설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숫자 1과 3과 7은 매우 중요한데, 민음사판으로 세미나를 하던 중 하필이면 이 점이 드러나는 페이지가 137페이지였다거나 하는 것을 나는 우스갯소리로만 쓸 줄 알았지, 이걸로 책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 깊고도 두터운 오덕의연구자의 세계!
수비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소 과잉되다 느낄 1장을 빠져나오고 나면 이 책의 나머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원전을 꼼꼼이 읽어본 (특히 사건의 연대기와 인물의 관계를 종이에 적어보면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흥미를 느낄 만한 해석으로 가득차 있다. «노름꾼»에서 알렉세이가 뽈리나와 잤는지 안 잤는지에 집착해본 나로서는 시미즈 마사시의 극도의 꼬장꼬장함이 작품 이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오오오! 그런 해석 방식도 있군! 하는 전율을 직접 만나는 기쁨을 알기에 여기에서 스포일러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숨겨진 사건에 대한 단서를 텍스트에서 찾아내어 해석을 가하는 저자의 작업 방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텍스트가 얼마나 다층적이고 두터운지를 느끼기에, 또 요즘 많이 회자되는 “돈에 쫓겨 문장을 다듬을 새도 없이 허겁지겁 집필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미지(나는 돈을 위해 썼다는 석영중 식의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그저 그것은 동력의 하나였을 뿐)가 얼마나 부분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지 알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다양한 해석을 접하는 즐거움 외에 이 책으로 얻은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도선생을 사형장으로 인도하게 되었던 바로 그 사건, 청년 도스또예프스키가 사회주의자 그룹 뻬뜨라셰프스키 서클에 가담하여, 그곳에서 낭독했다는 ‘벨린스끼가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를 직접 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봇(@dosto_kr)을 운영하면서 “님은 젊었을때는 사회주의자였다면서요? 왜 전향했나요?” 와 같은 질문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지금까지 쉽게 도취되고 허영기가 있는 도선생의 성격과, “러시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한번쯤은 건드려봐야 했던 당대의 지식인 트렌드가 맞물린 결과로서, 그리고 막상 체포되자 자신의 사상을 부인했다는 몇 가지 전기적 일화를 바탕으로, 이를 젊은 작가가 한번쯤 휩쓸려볼 법한 사회주의 서클의 문제로 해석하고 그렇게 답했다. 그러나 꽤 긴 전문의 일부만 소개된 이 <편지>에서 나는 도선생의 전향은, 사회주의자에서 골수 정교도로 변모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가 작가 안에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도선생에게 신앙은 불신과 회의의 깊은 강을 건너 도달한 곳이었으며, 이러한 강줄기 안에서 그의 사상적 편력도 해석되어야만 한다. 벨린스끼의 편지 내용 중 특히 이것을 보자.
“정교회는 체벌의 지지자, 전제의 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왜 그리스도를 관련시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와 교회, 정교회 사이에서 당신은 어떤 공통점을 찾은 것입니까? 그리스도는 최초로 사람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를 가르치셨고, 수난을 받음으로써 그 가르침이 진리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교회에서 조직되었고, 정교의 원리를 그 기초로 삼기 전까지만 인간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계급과 다름없이 불평등의 옹호자, 권력의 추종자, 박애의 적이자 박해자였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대로인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참 의미는 전 세기의 철학 운동으로 인해 분명해졌습니다. 유럽에서 비웃음을 무기로 삼아 광신과 무지의 불을 끈 볼테르 같은 사람이 오히려 당신의 모든 수도자, 주교, 부주교, 장로보다도 더 그리스도의 자녀에 가깝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살인 것입니다.” (p.94-95)
즉 농노제와 체벌로 신음하는 러시아의 현실에 대한 해법을 계몽주의에서 찾고, 교회의 무능을 질타하면서 “참된 그리스도”로 나아갔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건 이후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짜르의 장난(카운트다운 전에 풀려난)으로 목숨을 건져 옴스끄 감옥에서 4년, 이후 시베리아에서 4년 도합 8년의 유형 생활을 한다. 이 때 그는 농노제와 체벌로 신음하는 “민중”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발견할 수 있었으며, 그가 옴스끄 감옥 체험을 그린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듯 이 민중의 지긋지긋한 습속 가운데서 발견하는 신앙의 신비와 마주하면서 그의 기독교관은 다른 방향으로 무르익어가게 된다.
또 하나는 4장 <도스또예프스끼 언어에 숨은 비밀>은 요즘 노어를 배운답시고 더딘 걸음을 하고 있는 내게 격변화 암기의 고통을 반드시 이겨내야 할 이유 같은 것을 주었다. 도저히 원서를 볼 능력을 갖추지 않고는 도선생의 텍스트를 제대로 해석해낼 수 없구나, 하는 것이 실감나게 다가왔달까. «죄와 벌»에서 ‘죄’에 해당하는 러시아어가 ‘경계를 넘다’ 라는 의미라는 것은 2차 문헌을 몇가지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대체 «악령»의 스쩨빤이 향하는 ‘스빠소프’라는 지명이 <구세주>,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어떻게 직관적으로 길어낼 것이며,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표도르 노인이 조시마 장로의 암자를 비웃으며 ‘개구멍’이라 하되 지소형(작고 귀엽게 부르는 말)을 씀으로써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용인하는 뉘앙스를 준다는 것을 어떻게 길어낼 수 있을까? 노어를 배우기 전에는 요원하다. 십 년이 걸려도 노어를 배워서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말겠다는 것이 무슨 인생에 괴팍한 마일스톤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데에야 무슨 말을 더 하랴.
시미즈 마사시가 이 책을 낸(정확히는 기 발표된 것을 엮어낸) 것은 2006년인데, 당시 이라크전쟁이 한창이었다는 점, 9/11의 충격이 진행중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일본 비평가가 도스토예프스키 읽기를 일종의 타락한 세계에 대한 처방으로 제시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저자는 다양한 일본어판 번역과 일본 내의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자들의 연구내용을 참조해 가며 해석을 전개하는데, 이 책과 관계없이 동시적으로 읽고 있는 사사키 아츠시의 «일본 현대 사상»에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55년 체제 하 (최근에 민주당의 집권으로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정치적 격변이 없는 사회에서 일본의 지식인(문예지를 중심으로 한 사상가)들이 주로 천착하고 있는 것은 옴진리교 사건이나 연합적군 사건처럼 정치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묻게 되는 사건들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도 이 두 사건을 짤막하게나마 언급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 현재성을 띠는 셈이다.
이런 비평서를 읽는 것은 반은 즐거움, 반은 괴로움이다. 하나는 비평가들과 도선생에 대한 애정을 공유해가며, 해석과 깊이를 쌓아 가는 즐거움이고, 하나는 날것의 텍스트, 오로지 나 하기에 달린 그 미지의 세계 앞에 편견을 쌓아 가는 괴로움이다. 그럼에도 이 책 말미의, 시미즈 마사시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내게 큰 힘을 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단편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소설이 쓰인 지 이제 백 년 정도 지났기에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가 텍스트 안에 숨어 있다.” …이제 백 년! 이 수수께끼는 아마도 나중에나 참가하게 될 내게도 공평하게 열린 영역으로, 일리아드, 오디세이에 아직도 보탤 연구가 남은 것만큼이나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닌가. 지금도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구하고 있을, 62세의 시미즈 마사시와 많은 연구자들이 그렇듯이…
p.s.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꽤 팔려나가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일본 비평가의 도스토예프스키 비평서까지 소개될 줄은 몰랐던지라, 시미즈 마사시의 도스토예프스키론이 번역되어 나온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곧 고바야시 히데오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생활»이나, 최근에 나온 야마시로 무츠미의 «도스토예프스키» (요즘 바흐친 전집이 하나둘씩 나오는 모양인데, 이와 얽혀서 소개됨직 하지 않을까?)같은 것도 출간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 책이 2판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2쇄나 갈 수 있을까? ^^;) 이 책의 만듦새는 전반적으로 훌륭하지만 몇 가지 오타/오기를 발견했다. 125p의 화제 소동->화재 소동, 248p의 사카구치 안코->사카구치 안고, 249p의 샤또프의 국민신신앙->국민신앙, 혹은 민중신앙(민중이 낫겠지.), 259p의 ‘러시아의 무지한 민중은 자신의 생활과 노동을 한다’는 비문이고, 274p의 니꼴라이게->니꼴라이에게로 고쳐지면 좋겠다. «악령»의 스쩨빤에 대해서 “그는 남자는 물론 여자와도 가능한 양성애자였다.” 라고 쓰고 있는데 상식적으로 “그는 여자는 물론 남자와도 가능한”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일본어 원문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류인지는 알 수 없다.
p.p.s.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자들이 자기 책에서 하는 신앙고백(?)을 보노라면, 유소년기/청년기에 최초로 접하고 빠져든 작품이 무엇인지가 이후 연구 성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지하생활자로 인해 매력을 느낀 사람, 죄와 벌로 느낀 사람, 까라마조프로 느낀 사람이 독서를 확장해가며 도달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은 닮아 있을지언정, 이 최초의 매력이 무엇이었는지를 가지고 연구자 간의 성격적 특성과 문제의식을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김동인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왜 톨스토이를 작가로서 더 쳤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 같은 연구겠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영향을 받은 작가나 비평가는 무척 많으니 한번 해봄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2차 문헌에 대한 2차 문헌을 만들어낼만한 무게를 가진 저자들을 한데 모아 분석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