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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킹 베를린 - 천유로 세대의 위험한 선택
소니아 로시 지음, 황현숙 옮김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트위터에서 얼핏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다 마침 중고책으로 나온 게 있어 부담도 없겠다, <<퍼킹 베를린>>을 보게 되었다. '천 유로 세대의 위험한 선택' 이라는 부제와, 도저히 저임금의 아르바이트로는 학업과 생활을 병행할 수 없어 성매매를 하게 된 독일 대학생의 수기라는 책 설명을 보면 이것이 88만원 세대의 에세이 버전이요,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젊은이의 자립과 생존을 위협당하는 현실은 학생의 천국이라 불리웠던 서유럽도 예외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온 몸으로 설파한 책일 거라는 느낌이 온다. 읽고 있으려니 애인이 지나가다 표지를 보고 "그거 나온 다음에 <<88만원 세대>> 가 나온 거 아냐? 라고 한다. 역시나. (참고로 <88만원 세대>>와 닮은 것으로는 <<천 유로 세대>> 라는 다른 책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는 거대한 낚시인데, 애초에 독일에서 출간될 때부터 낚시를 의도한 책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한국 출판사는 이런 저런 책 소개를 통해서 훌륭하게 <<88만원 세대>> 담론에 이걸 얹어 놓았다.
좀 솔직하게 살자... -_- 솔직히 말해도 살 사람은 다 산다. 내 생각에 독일 88만원 세대 이야기라고 하는 것보다 독일 성산업 종사자 실화라고 하는 편이 더 팔릴 것 같은데. 이 책의 부록도 독일 성산업의 실태에 관한 게 아닌가. 88만원 어쩌고 하는 것을 지우고 보면 성산업의 일면을 나타내는 실화로서는 그럭저럭 유용한 책이다.
주인공 소니아 로시가(가명이란다-실화가 가지는 미덕이 하나 더 사라졌다)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직업이 매춘부임을 밝히며, 지금은 '‘하르츠 IV’ 시대니까요"라 하는 대목이 보인다. 그런대로 마케팅의 의도와 그럭저럭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하르츠 IV : 실업수당을 삭감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재취업할 의욕'을 고취시키겠다는 독일 정부의 정책) 하지만 딱 거기까지.
소니아는 아버지가 작은 호텔을 경영하고(사업이 어려운 것으로 나와 있지만) 어머니가 도서관 사서 일을 하는 이태리 서민-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일에서의 학비와 생활비를 부모로부터 완전히 조달받을만큼 넉넉한 가정환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활고를 겪으며 자란 처지는 아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 중 하나일 "의외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다양한 성산업에 종사하고 있다"를 지탱해 주는 것은 소니아의 이러한 배경과 그가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대학 공부이다. 편견을 고발하는 듯하지만 편견에 편승해서 이득을 얻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편견에 균열을 내기에는 비전형적인 인물을 부각함으로써 편견을 고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의도를 달성하고 있다.)
섬에서 태어나고 자라 폐쇄적인 환경이 갑갑했던 그는 독일 유학을 결심하고는,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수학을 전공하기 전에 독일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1년간을 베를린에서 독일어 공부와 유흥으로 보내는 사이 나이트 클럽에서 남창으로 일하거나 이런 저런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해 온 폴란드 불법체류자 청년을 만난다. 그리고 스무살에 덜컥 결혼을 한다.
...; 스무 살에 결혼한 그 남자 (라드야) 는 불법체류자로서 신분이 불안한 탓도 있지만 제대로 끈기있게 하는 일이 없다. 남창 일을 해서 먹고 살거나 소니아가 둘을 부양하기 위해 이런 저런 성매매 업소에서 일을 하는 것을 '직시하지 않는 방식'으로 얹혀 산다. 수학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아가씨는 수학을 공부하지 않는 대부분이 아마 헛똑똑이라 생각할 그런 방식으로 이 남편을 부양한다. 그리고 학비 때문이 아니라 독일의 풍요를 비슷한 수준으로 누리기 위해서 성매매 업소에 나간다.
그리고 이야기의 반은 이런 저런 업소에서 일하는 이야기와 불륜 (같은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편의 친구)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성적 욕구와 사랑하는 감정을 누리고 사는 것이 소니아에게는 곧 인생의 풍요였고 그는 '영리하기에' 그러한 감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법도 잘 알고 있다. "인생은 짧잖아?"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마케터가 포장하고 싶었던 천 유로 세대의 고통보다는 오히려 굉장히 편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성관념을 가지고 있던 젊은 여성이,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여성들에게 (혹은 남성 스폰서에게) 의지해 살던 남자에게 잘못 걸려서(스스로 선택해서) 생계형 성매매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에 가깝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천성이 그리하니 어쩌겠냐마는 팔할은 자신의 잘못이다. 성매매로 수입이 생기면 당장 현금이 들어온 즐거움에 외식과 쇼핑으로 즉시 다 써버렸고 그것이 떨어지면 또 성매매에 나가는 것까지 구조 탓을 하면 끝이 없지 않겠는가.
대학교때 교수가 고약한 농담을 했는데 "여대생이 성매매를 하면 나쁜 년이고 성매매 아가씨가 향학열에 불타서 공부를 하면 대견한 거다." <<퍼킹 베를린>>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이것을 떠올리고 말았는데, 소니아 로시의 정체성은 학생이 생활고에 못이겨 성매매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아주 가끔 발견할 수 있는, 향학열에 불탄 성매매 여성에 더 가깝다.
물론 구조라는 것은 개인이 미리 의식하고 행동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젊음을 즐기려는 마음에 유학 와서 놀다가 마찬가지로 젊은이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그로 인해 학업과 생활을 동시에 영위할 수 없어서 성매매를 하는 구조라는 것은 존재할 테다. 그리고 그런 선택(무능한 남자와 결혼)을 하더라도 성매매를 해야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신자유주의 - 더 넓게는 자본주의 - 가 남긴 것일 테다. 그러나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실시와 성산업 종사자의 인구통계학적 변화를 통계적으로 보여주는 거라면 모를까, 이것이 풍조나 추세로서 바로 연결되려면 설명되어야 할 것이 아직 많다. 소니아 로시는 구조 안의 개인일 수는 있지만 구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설득력을 결여하는 인물이다.
이 책을 <<88만원 세대>>의 연장선상에서 읽는 여러 가지 방안을 고민해 봤다. 내 생각이 틀렸다면, 내가 너무도 고루한 인생관의 소유자라는 결론밖에 나지 않는다. 소니아의 삶을 설명하고자 하면 너무 전형적인 단어들밖에('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던 남자와 덜컥 결혼') 쓸 수 없어 갑갑해지지만, 인생의 수준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을 덜컥 구조 위에 얹는 것이, 좌파에게도 좋은 전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