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땅 뜨거운 기억 - 시베리아에 새겨진 자유와 혁명의 흔적들
하영식 지음 / 레디앙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1965년에 태어나 노동운동을 하다가 한국을 떠난 저자는 이후 세계를 돌아다니며 멕시코 빈민지역 선교사, 미국 고등학교 교목, 폴란드 산골 영어 교사, 이스라엘 키부츠 운영위원, 아테네 대학 동양문화 강사 등으로 활동하며 이러저러한 매체에 기고를 해 왔다. 1996년 처음으로 시베리아를 횡단한 이래 기차로만 일곱 번 시베리아를 동서로 횡단하였고, 데카브리스트들에게 매료되어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2009년부터 이르쿠츠크를 여행했으며, 페테르부르그에 장기 체류하며 데카브리스트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이 책은 얼핏 저자 하영식을 따라 시베리아를 돌아보는 여행기처럼 보인다. 길을 따라가는 한 나그네의 눈으로 대상을 보고, 그 결과 대상뿐만 아니라 그 나그네가 어떤 이인지에 대해서도 말해주는 것이 여행기의 미덕일 터. 하지만 여행기로 보기엔 이 책의 구성은 좀... 모호하다. 풍부하고 얕은 부분이 혼재해 있고, 사실과 감상이 뒤섞여 있으며, 사상적으로 입장이 분명한 저자인지라 주장도 뒤섞여 있다(직접 봉기했다는 이유만으로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보다 트로츠키의 역할이 더 컸다고 하는 것 같은 서술들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읽는 내내 책의 이 난잡한 구성이 아쉬웠는데, 말미를 보니 저자도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책은 가능하면 학술적인 색채를 없애기 위해 역사적 주제를 담은 기행문 형식으로 서술했습니다. 과거에 벌어졌던 역사적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오고 가면서 부딪혔던 사람들의 이야기느 그곳에서 풍부해진 자신의 감성적인 표현도 서술돼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면에서 책이 조금은 비논리적이고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입장에서는 책이 독자들의 손에서 무리 없이 읽히고 읽은 뒤 가슴 속에 작은 파장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책의 형식은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으음, 그렇다면 이 책의 형식에 대해서 내가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과연, 아쉬운 부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시베리아 여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특히 러시아 문학 속에서 시베리아가 차지하는 위치를 알고 싶은 사람들, 데카브리스트들에 매료된 사람들의 가슴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열심히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히 읽을 수 있는 한국어로 된 책은 아마 이것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시베리아를 여러 차례에 걸쳐 여행하며 서고를 뒤지고 학자들을 만나 직접 수집한 자료인 데다가, 시베리아 곳곳에 남아 있는 혁명의 자취를 찾는다는 컨셉부터가 충분히 매력적이다(사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파스테르나크더러 혁명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특히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데카브리스트에 대한 부분은 저자의 관심의 깊이만큼이나 풍부해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그동안 이런 저런 책과 강연들을 통해 데카브리스트들을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당시 서유럽에 비하면 한참 낙후되고 야만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러시아의 전제정에 대해서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며 봉기한 다소 '낭만적인 성향의' 귀족 청년장교들로 이해하고 있었고, 이들의 봉기라는 것도 나이브하고 허술하기 그지없는 - 짜르에게 입헌군주제를 수용할 것을 요구하며 그냥 '서 있었다'고 전해오듯이 -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러시아 문학과 관련해서 데카브리스트를 다루는 책들은 이 정도 서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들을 푸슈킨의 시를 고이 접어 품고 다니던 낭만주의의 아들들로만 본다면,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해서 아주 큰 것을 놓치게 된다. 영예로운 훈장 수여자도 예외가 되지 않았던 군대 내의 가혹행위로부터 싹튼 봉기의 조짐은 이윽고 지하 정치운동으로 번져나갔고, 이들은 절대왕정의 폐지와 입헌군주제(공화제)의 수립, 농노 해방이라는 기치 하에 헌법 시안을 작성하고, 혁명의 프로그램들을 갖추어 나갔다. 특히 (두 갈래로 나뉜 파벌 중) 남부그룹의 지도자인 파벨 페스텔은 <<러시아의 진실>> 이라는 미래의 헌법을 담은 책자를 저술하였는데, 100년 후 일어난 1917년 혁명의 많은 프로그램들이 이 책의 프로그램과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심지어 혁명의 기획을 성공시키기 위한 일시적 독재의 논리까지도...). 다시말해 노선을 둘러싼 분열과 대립을 비롯하여 해방의 기획, 이론적 논쟁, 테러의 옹호와 부정 등 우리가 혁명의 과정에서 발견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광장에 도열한 것은 일리야 레핀의 그림에서 떠올리는 데카브리스트들의 이미지와는 달리 장교들 뿐만은 아니었다. 교육받지 못한 농민 출신의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상관의 명령에 따라 광장에 모였고, 구호 '콘스티투치야(헌법)!'를 '콘스탄틴의 아내' 정도로 이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혁명사가 그 이름까지 기억하지는 않았던 수많은 이들은 그들의 미숙한 상관들과 함께 짜르의 군대에 의해 포탄을 맞거나, 부상당한 채 얼어붙은 네바 강에 던져져 죽어가야 했고, 그 수는 1300명에 이른다.


그때까지 귀족으로서 향유하던 안락한 생활과 모든 특권을 잃고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데카브리스트들과 그들을 따라간 젊은 귀부인들이 시베리아에서 보낸 고난의 면면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혹한 속의 강제노동과 같은 잔혹한 형벌과 가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불굴의 의지와 생명력으로 삶을 이어갔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우는 이르쿠츠크를 비롯한 곳곳에 수도에서 옮겨온 문화의 자취를 남겨 놓았다. 오랜 역사 동안 사실상 감옥의 역할을 한 이 척박한 땅은 가장 명민한 이들의 육체와 정신을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함으로써 러시아 문화사의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

시베리아에 보낸다 / 푸슈킨


시베리아의 광산 저 깊숙한 곳에서

의연히 견디어주게

참혹한 그대들의 노동도

드높은 사색의 노력도 헛되지 않을 것이네

불우하지만 지조 높은 애인도

어두운 지하에 숨어 있는 희망도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나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은 오게 될 것이네

사랑과 우정은 그대들이 있는 곳까지

암울한 철문을 넘어 다다를 것이네

그대들 고역의 동굴에

내 자유의 목소리가 다다르듯이

무거운 쇠사슬에 떨어지고

감옥은 무너질 것이네 그리고 자유가

기꺼이 그대들을 입구에서 맞이하고

동지들도 그대들에게 검을 돌려줄 것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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