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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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멀리 떨어진 섬이 있다. 그 섬은 지리적 위치에 기인한 섬이 아니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혼자만이 살 수 있는 작은 섬이다. 그런 섬에서 화자인 '나'는 살아가고 있다. 그는 육체적 진실을 뛰어넘어 온전히 자신의 섬에서 틀어박혀 생활하곤 하는데 세상과 그의 사이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어쩌면 완벽한 소통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누구나 외롭다. 사실 상대와 완벽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해도 완벽한 이해는 드물기 때문에 외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타자와의 소통 단절은 곧 인간들이 사는 세상인 세상과의 단절을 가지고 왔다. 그렇기 때문에 고양이인 '물루'와 화자가 소통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 흔하디 흔한 고양이가 그에게는 세상과의 완벽한 단절에의 소망을 거두는 상징으로도 느껴진다.


   그는 어릴 적 무심코 봤던 모든 것이 일체 사라진 온전한 '공(空)'의 상태를 통감한 뒤로부터 야금야금 세상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 속에는 평안하게 쉴 수 있고 누구도 침입하지 못하는 인간이라고는 자신뿐인 섬으로 들어갔다. 그 섬에 이르기까지 그는 작은 배를 이끌고 무심코 느껴지는 인간적인 감수성을 노로 삼아 세상이라는 바다를 저으면서 갔다. 그리고 풍랑 이래봤자 이해 못할 것들만 가득한 파도들도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편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공고히 한다. 게다가 자신이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오랜 여행과 외유는 자신에게 더욱 몰두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매개체이다. 자신을 알고 인간을 쓰다듬는 것들로부터의 탈피는 어찌 보면 너무나 황량한 느낌이라서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이 대단히 고된 작업이라 하기보다는 외롭고 피폐한 작업이라고 생각게 만들었다. 끝없이 자신에게 침전하는 그의 모습은 대작을 만들기 위한 시인의 고뇌와도 같지만 곧 그가 쏟아내는 것들이란 미지에의 찬사에 가까운 것이라서 현실에 만족하고 또 찌들어 있는 나에게는 그저 멀리서 어렴풋이 들리는 환청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나에게는 그런 그의 모습이 내가 절대로 시도할 수도 없고 완성할 수도 없는 모습으로 비춰졌기에 시기와도 같은 마음이 들어있다는 것은 시인한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이 문을 열었을 때 남겨진 세상의 끝과도 같이 온통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면 얼마나 슬플까. 나는 상상하기도 싫다. 그러니까 더더욱 나는 외로움이건 홀로 있는 침묵과도 같은 심사이건 간에 더욱 사람들에게 파고들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와 반대는 화자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더더욱 미궁과도 같았다. 아름다운 단어들로 조합된 깔끔한 문장들 사이로 그저 잘 제단 된 옷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맞지 않는 옷을 보는 느낌이었다.


   부드럽긴 하지만 그 안에는 포근함이 없고 아름답긴 하지만 그 안에는 음미할 맛이 빠진 무엇인가 화자와 나 사이에 고양이 마저 없는, 또 다른 공(空)을 보았다고 해야겠다. 그러니까 너무도 외딴 곳에 떨어진 심사이기에 내가 다가서기엔 배도 없고 파고도 높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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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 - 신들의 보물에서 반지전설까지, 시대를 초월한 상상력의 세계
안인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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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는 예전부터 문화를 집약한 상징의 이야기다. 대륙을 지배하는 이야기에는 그 대륙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풍속과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고 무엇을 신성하게 여겼으며 무엇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도 알 수 있다. 농경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고대에는 이러한 신들의 이야기 속에 풍작과 자비로운 날씨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시대를 넘어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단순한 과거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알아보는데 그치지 않는다. 가공할만한 힘을 지닌 전지전능한 존재들의 이야기 속에서 판타지적인 요소들을 끄집어내거나 원론적인 모티프를 끌어냄으로써 한층 문학적 기폭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물론 이 시대는 그것을 뛰어넘어 문학뿐만이 아닌 게임과 영화에서까지 두루두루 신화를 차용하고 있다.

 그런 신화 중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으며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알게 모르게 퍼졌지만 정작 자세히 알지 못하는 북유럽 신화가 있다. 고대 게르만들의 신화인데 일명 바바리안(야만족)들의 생활이 묻어 있는 이야기이다. 고대 로마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나라를 지켰던 독일을 비롯한 독일어권 나라들의 전역에 걸쳐있던 방대한 이야기인 북유럽 신화. 이 신화를 제대로 접할 수 있는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정말이지 제대로 북유럽 신화를 접할 수 있었다.


 북유럽 신화에 대한 동경은 아무래도 고등학생 시절 판타지 소설을 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들은 대게 북유럽 신화를 그 바탕에 두고 있다. 거인까지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룬 문자와 마법이 등장하고 아스가르트와 중간계를 나누는 것하며 등장하는 몬스터와 신들의 체계는 이미 낯설지 않은 것들이다. 이를테면 본문에서도 여러번 인용되는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나 톨킨의 '반지의 제왕' 등의 텍스트에서 쉽게 북유럽 신화를 접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는 북유럽 신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무래도 그 체계의 복잡성과 자료의 방대함 때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다방면에 걸친 노력으로 하여금 신들의 세계를 좀 더 밀접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저자의 노력 주에서도 가장 빛이 발하는 것은 단순히 신화를 소개하는 것에 지나치지 않고 다른 신화들과의 접목에 있다. 가령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숫자 3에 대한 숭앙을 북유럽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다른 예를 들어서 소개한 것이랄지 세계의 탄생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소들의 결합을 다른 신화의 유사성과 들어서 소개한 것들 말이다.


 신화는 인간 생활의 아주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상징의 언어이기 때문에 널리 비슷한 부분이 두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노력은 북유럽 신화에 대한 관심을 신화 자체에 대한 관심에까지 이끌어주는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북유럽 신화에 관련되거나 그에게서 모티프를 차용한 소설들을 읽고 싶게 만든달지 그와 유사한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 신화에까지 탐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도 이 책을 덮고 나서 북유럽 신화에 대해서 제대로 만났다는 뿌듯함도 뿌듯함이지만 더 나아가 다른 세계의 신화에 대해서도 탐독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결국 이 세계의 조상이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상징을 했는지, 많은 것들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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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전쟁 - 불륜, 성적 갈등, 침실의 각축전
로빈 베이커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학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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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에 대한 담론은 이 사회에서 금기로 여기는 것들 중에 하나였다. 조선시대에 뿌리를 내린 유교는 오랜 시간 우리나라를 지켜왔으며 지금도 그 힘을 잃긴 했지만 여전하다. 사회가 개방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성에 대한 것은 안으로는 은밀하게 이야기가 진행 중이지만 겉으로는 아직도 꺼낼 수 없는 화두 중에 하나다. 왜 그런고 하니, 앞에서 이야기했듯 유교의 영향권 안에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성에 대한, 인간의 육체에 대한 그리고 나아가서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 유교의 아래에 있는가. 그것은 성이라는 것은 윤리적 문제의 아래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육체에 앞서 본능에 앞서 성이란 무릇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있는 일들이라 여기고 그렇기 때문에 유교의 아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윤리적 문제로 보는 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이제는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한창 사회에서도 개방적인 성교육과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성교육이 유행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텔레비전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고 몇몇의 작은 노력으로는 500년 이상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 되었던 것을 한 번에 바꾼다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사람들에게 좀 더 읽혀지기에 좋을 법한 책이다. 윤리의 문제가 아닌, 본능이며 육체 그대로를 과학적인 증거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기에.  

사람은 동물이다. 포유류에 속한다. 우리는 진화하면서 포유류이지만 동물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거부 또는 제어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인간에게만 존재한다는 이성이라는 것을 앞세워 우리는 여타 동물과는 달리 행동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당연히 인간의 본능에 대해서는 평가 절하 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성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인간의 육체적인 면을 설명하기보다는 사회 규범적 틀에서 이야기 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작 우리의 몸이 수 천년 동안 진화를 거듭하면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생물 시간에 배웠던 여성의 배란은 28일 주기로 하여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건강한 20대 중반의 여성이라도 배란은 안 하고 그저 넘어가는 수도 많으며 심지어는 주기적이지도 않다. 월경이 주기적일 수는 있겠지만 배란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종족의 번식과 우수한 유전자의 습득을 위해서 여성의 몸은 진화되었고 좀 더 좋은 정자를 판단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정자전쟁까지 발발시킨다. 이는 그저 우리의 몸이 이성이 없는 부분에서는 자로 잰 듯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교활하고 정밀해서 자신을 위한 최선의 방향으로 이끈다. 이것은 수 천년 동안 인간의 진화에 힘을 주었고 또한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로 거듭나기까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인간이 동물이라는 점은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바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렇게도 사람의 몸이 소위 말하는 '동물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막연하게 식욕과 수면욕 그리고 성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우리는 몸은 상상을 초월한다! 남자는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나 여성의 몸에 사정할 때 그 정자의 수를 조절한다. 심지어 그 정자도 모두 수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은 다른 정자를 죽이는 용도로 되어 있으며 어떤 정자는 그저 수태력이 있는 정자가 안전하게 난자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자멸하면서 돕는다. 그리고 극소수의 정자만이 난자잡이를 할 수 있는 진정한 정자이다. 이렇게 세분화된 정자의 모습은 단지 난자와 수정을 하기 전까지 순탄하게만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다른 육식동물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도구를 사용했다. 그것과도 같이 정자들은 수정을 하기 위해서 진화했다. 적은 다름 아닌 다른 남자의 정자.

우리의 몸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단순하게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고 사랑해서 아이를 낳는 방식이 아니었다.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은 끊임없이 서로를 재고 따지면서 종족번식을 위한 최선을 길을 모색한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것은 진화의 바탕이 되는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른 치열함이다.

이 책은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 그저 윤리적인 문제라는 이유로 혹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기피된 성 담론을 전면에 꺼내고 그것을 과학적 시각으로 그려냄으로써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성적 상식과 더불어 자기 자신의 몸을 더욱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것은 이 사회가 치열한 것을 떠나서 아직도 종족번식을 위해서 내 몸이 분투하고 있음을. 그러니까 정말로 사람은 확실하게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물론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동물은 동물이나 사람은 사람임에 틀림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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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랭크 밀러 글.그림, 린 발리 채색, 김지선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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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프랭크 밀러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자. 프랭크 밀러의 작품을 무엇을 보았더라? 생각해보니 아무 것도 없다. 그가 그린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다 보았지만 정작 그의 만화는 본 적이 없다. 아니, <300>이 처음이다. 영화를 본 것으로 짐작을 하자면 아무래도 그의 작품은 밝기 보다는 어두울 것 같고 행복하기 보다는 슬프다. 신시티에서의 흑백의 강렬한 대비 속에서 목이 잘린 시체가 나뒹굴고 술집의 여인이 허리를 흔들며 춤을 춘다. 그렇다. 분명 그의 세계는 밝기 보다는 어둡다. 그리고 역시 <300>도 밝기 보다는 어둡다. 아니, 어두운 것을 지나쳐 암울하기까지 하다.

 이야기는 그러니까 살라미스 해전을 치르기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파르타인들의 끝없는 행군 아래 그들의 인간이라기 보다는 야수와도 같은 생활 방식이 펼쳐진다. 그들은 절대 행군을 멈추지 않는다. 낙오자는 그저 낙오자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투적인 성향의 스파르타인들이 멀리 바다를 건너 침략을 시도하는 페르시안에게 맞서 어떻게 대륙을 지키는가 하는 이야기가 바로 <300>의 개요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가장 중요하다면 중요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인 살라미스 해전은 정작 나오지 않는다. 그저 이들의 정신을 그리고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가 있기 까지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를 알려준다. 아비 잃은 자식과 남편 잃은 부인을 뒤로 하고 그들은 다시 전쟁으로 나선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의 끝에는 승리가 있다는 것을. 주인공의 죽음을 뒤로하고 환희에 찬 영광을 그리기 보다는 그 환희에 가려진, 사실 환희를 만들었던 사람을 그린 <300>. 그러니까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머나먼 전쟁의 역사를 뒤로하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이긴 것이 중요한 것 보다는 그 사이에서 죽어갔던 생명들을 보였다는 점에서 내가 기대했던, 익숙했던 미국 특유의 분위기가 없음에 어안이 벙벙하다.

 무엇이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작과 끝의 사이에 있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그림에 있어서 프랭크 밀러는 비장미를 더했다. 가슴에 파고드는 대사도 표정도 없다. 단지 그들의 어둡고도 결의에 찬 행군을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전쟁터로 가는 결의가 빛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는 만화가 가지는 가장 큰 강점인 그림, 바로 그 그림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전쟁을 포장하기 보다는, 영광을 빛내기 보다는, 아픔을 감추기 보다는. 어두운 투구 아래 붉은 망토 아래 전쟁의 시작이 있음을, 모든 것을 전면에 드러내고 보여주는 <300>. 그저 전쟁을 반대하는 나로서는 큰 감동을 받진 못 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만화의 스타일을 접한 것이 기쁘고, 애써 치장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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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벌레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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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벌레, 헛간을 태우다, 춤추는 난쟁이,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세 가지의 독일 환상. 이렇게 다섯 가지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1. 개똥벌레

<그렇게 해서 나의 열여덟은 지나갔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국기가 올라가고, 내려왔다. 그리고 일요일에 죽은 친구의 애인과 데이트를 했다.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지금부터 뭘 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병 속에 든 개똥벌레가 푸드득 움직인다. 좁은 병 안에서 탈출 할 수가 없다. 불빛은 희미하게 빛난다. 과거는 돌이킬 수가 없다. 추억들은 점점 희미해진다.
주인공의 삶은 매일 오전 7시에 게양되는 국기와도 같다. 의미 없고 지루하고 천편일률적이다. 그는 과거의 망령과 함께 지내고 있다. 마치 병 속에 가두어진 개똥벌레처럼. 그의 추억들과 과거의 망령들은 또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마치 개똥벌레의 불빛처럼.

호스트가 없어진 삶을 살면서 그는 단지 삶은 계속되는 것뿐이라고 죽음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친구의 애인 역시 같다. 그 둘은 친구라는 존재로 이루어져 있지만 과거를 떨치지 못한 그들이기에 친구가 없이도 간간이 만나고 있다.

허나 죽기 일보 직전의 개똥벌레를 풀어주는 주인공은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자신 역시 죽어가고 있음을. 그리고 분명히 그 역시 서서히 날갯짓을 하면서 더 이상 부질없이 병에 부닥치지 않기 위해 병 밖으로 나갈 것이다.

2. 헛간을 태우다

<세상에는 헛간이 얼마든지 있지요. 그런데 그런 헛간들이 모두 내가 태워 주기만 기다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답니다. 15분이면 깨끗하게 태워 버릴 수 있지요. 마치 애초에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말이죠.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라질 뿐이죠. 깨끗이요.>

소설가는 어떤 여인을 알고 있다. 그 여인은 애인이 있다. 이 셋은 얼토당토않게 만난다. 세상사 그러하듯 인연은 그렇게 되는 것이니까.

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 돌아보면 거기에는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당연하게 사라진 존재가 있는가? 마치 아무 것도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있는 것들 말이다. 없어져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없어 졌을 뿐이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 말이다. 어쩌면 아예 사라진지도 모르는 것들.

바로 그런 헛간. 남자는 그런 헛간을 태운다. 하지만 무엇이든 흔적이 남지 않고 사라질 수 있을까? 무엇이든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로 사라져 버려도 좋은 것이 있을까?  

 

5개의 단편들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면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상실의 아픔을 그리고 있는가 하면 다른 편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태우고 있다. 동떨어진 미묘한 평행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곳에서는 그것을 뭉개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결말이 미묘하다. 그저 그렇게 끝나버린다.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기대감을 깨버린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예고도 없고 특히 유별난 것도 없다.

잔잔하게 또는 무뚝뚝하게, 일탈처럼 파격적으로 다가오는 다섯 편의 이야기.
한여름의 더위를 가시게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이 더위를 가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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