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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벌레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개똥벌레, 헛간을 태우다, 춤추는 난쟁이,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세 가지의 독일 환상. 이렇게 다섯 가지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1. 개똥벌레
<그렇게 해서 나의 열여덟은 지나갔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국기가 올라가고, 내려왔다. 그리고 일요일에 죽은 친구의 애인과 데이트를 했다.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지금부터 뭘 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병 속에 든 개똥벌레가 푸드득 움직인다. 좁은 병 안에서 탈출 할 수가 없다. 불빛은 희미하게 빛난다. 과거는 돌이킬 수가 없다. 추억들은 점점 희미해진다.
주인공의 삶은 매일 오전 7시에 게양되는 국기와도 같다. 의미 없고 지루하고 천편일률적이다. 그는 과거의 망령과 함께 지내고 있다. 마치 병 속에 가두어진 개똥벌레처럼. 그의 추억들과 과거의 망령들은 또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마치 개똥벌레의 불빛처럼.
호스트가 없어진 삶을 살면서 그는 단지 삶은 계속되는 것뿐이라고 죽음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친구의 애인 역시 같다. 그 둘은 친구라는 존재로 이루어져 있지만 과거를 떨치지 못한 그들이기에 친구가 없이도 간간이 만나고 있다.
허나 죽기 일보 직전의 개똥벌레를 풀어주는 주인공은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자신 역시 죽어가고 있음을. 그리고 분명히 그 역시 서서히 날갯짓을 하면서 더 이상 부질없이 병에 부닥치지 않기 위해 병 밖으로 나갈 것이다.
2. 헛간을 태우다
<세상에는 헛간이 얼마든지 있지요. 그런데 그런 헛간들이 모두 내가 태워 주기만 기다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답니다. 15분이면 깨끗하게 태워 버릴 수 있지요. 마치 애초에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말이죠.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라질 뿐이죠. 깨끗이요.>
소설가는 어떤 여인을 알고 있다. 그 여인은 애인이 있다. 이 셋은 얼토당토않게 만난다. 세상사 그러하듯 인연은 그렇게 되는 것이니까.
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 돌아보면 거기에는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당연하게 사라진 존재가 있는가? 마치 아무 것도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있는 것들 말이다. 없어져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없어 졌을 뿐이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 말이다. 어쩌면 아예 사라진지도 모르는 것들.
바로 그런 헛간. 남자는 그런 헛간을 태운다. 하지만 무엇이든 흔적이 남지 않고 사라질 수 있을까? 무엇이든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로 사라져 버려도 좋은 것이 있을까?
5개의 단편들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면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상실의 아픔을 그리고 있는가 하면 다른 편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태우고 있다. 동떨어진 미묘한 평행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곳에서는 그것을 뭉개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결말이 미묘하다. 그저 그렇게 끝나버린다.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기대감을 깨버린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예고도 없고 특히 유별난 것도 없다.
잔잔하게 또는 무뚝뚝하게, 일탈처럼 파격적으로 다가오는 다섯 편의 이야기.
한여름의 더위를 가시게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이 더위를 가중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