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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ㅣ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평점 :
1. 그러니, 살밖에 없다
눈을 감고 한 번 상상해보자. 눈앞에, 아니 자신의 앞에 거대한 터널이 있다고. 그 터널의 입구에 덩그러니 혼자서 서있다고. 시커먼 터널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어두운 밤이다. 인기척도 기계음도 들리지 않는다.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쿵’ 발소리가 크게 울린다. 터널 안으로 혹은 뒤를 돌아 역시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끝없는 도로로, 둘 중 하나 선택을 해야 한다. 아니면, 그 자리에 계속 서있을 수밖에.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았던 이미지가 있었다면 그건 터널과 도로다.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끝없는 미로와 같은 터널과 도로. 바로 그것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떤 선택, 어떤 신념, 어떤 후회, 어떤 과거.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선택하고 또 그곳으로 나아간다. 사실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버튼을 누르면 저도 모르게 어떤 장치에 이끌려 눈을 뜨면 어떤 결과에 혹은 어느 삶에 봉착하는 것 같다. 그러니 버튼을 누르기 전에 고심하는 것은 당연하나 되돌아보면 사실 버튼을 눌렀나 싶을 때도 있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무수한 길과 지명과 삶처럼, 그렇게 우리는 어쩌면 선택하느냐 마느냐, 이런 간단한 원터치 버튼식이 아닌 무엇을 선택해도 그 끝은 알 수 없는 랜덤식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야 한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 눈앞에 무엇이 펼쳐질지 모른다고 해서, 선택한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앞의 말 정정해서, 살밖에 없다.
2. 싸구려가 왜 있는 줄 알아?
한 여자가 죽었다. 타살이다. 이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얽힌 도로망처럼 한 여자의 죽음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사람이 혼자서는 못 사는 탓이다. 좋건 싫건 관계를 맺고 또 관계를 맺어야만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이러저러한 사연 가진 사람들의 관계가 서서히 드러나고 그들의 트라우마를 살피며 소설은 조심조심 혹은 대범하게 진행된다.
빨리 죽은 사람만 무안하게 아니러니 하게도 시작은 한 여자에게 있었으나 사실 그 여자 주인공이 아니다. 사실 이 소설 딱히 주인공 잡기가 힘들게 주변 인물에게 고루고루 관심을 쏟아야만 읽을 수 있다. 그만큼 관계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소설의 관점이 줄곧 죽은 사람에 대한 동정 연민 혹은 분노에 있지 않음에 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도미노처럼 촤르르륵, 한 여자의 죽음이 시발점이라면 그 이후 사람들의 변모와 그들의 삶에 조명을 맞춘 것이 이 소설이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면서 해야 할 일은 범인이 누구인가 추리하는 것도 여자의 죽음에 분노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 복잡한 도로에 뛰어들어 같이 운전하면서 속도와 방향을 함께 느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급질문 하나. 어째서 제목은 악인인가 하는 점. 아니, 애초에 범인을 찾을 것도 아니고 주변인의 삶에 관점을 맞추었다면 과연 악인이라는 단어는 왜 등장해야 하는 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불만을 제기한다. 사실 이 소설 (심각한 스포일이니 주의)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더 심각한 스포일이니 주의) 아니, 사실 악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 적도 없다. 왜냐하면 소설은 시종일관 무엇을 찾는가(구체적으로는 악인)하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변하는가, 흘러가는가에 맞춰 진행된다. 진정으로 악한 존재는 없고 모두가 가슴에 상처쯤은 있는 거라고 얼버무리기에 딱 좋다. 여기까지.
다 읽고, 한 등장인물이 했던 말 중에서 싸구려 같다, 라는 말이 남았다. 그러고 보니 옳거니, 등장인물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어쩌면 현실에서는 싸구려라는 말을 들을 인생이다 싶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유난히 번쩍거리는 인생에서 트라우마를 보여준들 얼마나 많은 동감을 살 수 있을까. 원래,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 더 찢어지는 고통을 맛봐야 사람들이 겨우 슬퍼하는 법이다. 안 그러면 자기 인생에도 저 정도 슬픔은 있는데 뭘 그리 같이 슬퍼해주겠나 말이다. 이번엔 유독 내가 싸구려라는 말에 집착한 이유를 떠올려보니 아하, 내가 읽으면서 이 사람들한테 감정이입을 많이 했구나 싶었다. 이 사람들 싸구려 아냐! 라고 항변하고 싶을 만큼. 그러니 누가 나한테 지금 “싸구려 같아.”라고 말하면 나는 되물을 것이다. “싸구려가 왜 있는 줄 알아?” 그리곤 대답할 것이다. “싸구려도 다 필요하니까 있는 거야.” 아무리 도로가 많다고 해도 아무리 다니는 차가 없었던 도로라고 해도 그 도로가 막히면 다른 곳은 정체되기 마련이다. 쓸모없는 도로가 없는 것처럼 쓸모없는 사람도 없다. 소설에서 한 여자의 죽음을 피라미드의 윗부분에서 돌이 하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랫부분에서 없어졌구나, 말하는 것처럼 어떤 관계도 삶도 사람도 그렇다. 모든 돌은 제 쓸모가 있다.
3. 아쉬워서 갈증이 난다
요시다 슈이치를 처음으로 만났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한 작가라 내심 기대를 단단히 하고 읽었다. 작가 본인 입으로 감히 대표작이라고 칭하는 작품이라면, 얼마나 쓰면서 공을 들였을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더욱 기대했다. 하지만 읽고 나서 어딘가 5%쯤 모자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재미있게는 읽었다. 사실 창피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울먹거리기까지 했다고 고백한다. 감정이입 잘 된다. 그건 내가 작가가 보여준 그들의 삶을 한 조각씩 맛보았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역시 뒷심에 관한 부분인데, 초반의 약간은 메마르게 그들의 삶을 보여주려고 했던 작가의 시도와 면들이 어그러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후반에 가서 나는 반전을 기대한 것도 가슴 찡한 해피엔딩을 기대한 것도 가슴 먹먹한 비극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따라서 흘러가듯 읽었다. 그런데 끝에 가서 그들의 삶에 작가가 너무나도 깊게 빠져들었던 탓인지 지나치게 감정적인 서술이 눈에 거슬렸고, 감정적인 결말로 이끌려고 했던 것이 거슬렸다. 결말 자체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그 방식에 대한 아쉬움이다. 이런 걸 나는 일본식이라고 감히 말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온갖 감정의 후폭풍을 몰아치게 만들기 위해서 심하게 독자를 채찍질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다) 이 소설 마지막 챕터에서 조금만 더 덤덤하게 썼더라면, 하는 일말의 아쉬움을 남겼다.
4. 마지막으로 주절주절거리기
번역이 아주 매끄럽지도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었다. 부사로 시작되는 문장이 너무 많다. 원작을 살리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한다면 거기에 대고 나는 그럼 어째서 방언을 못 살렸나 라고 따질 것이다. 중간에 따옴표 잘못 나온 부분도 있었고 오타나 비문도 있었다. 하지만 작품을 읽는데 그리 크게 방해가 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내 눈에 가장 크게 보였던 사례가 하나 있었다. 다 읽고 나서 찾아서 페이지 수를 적어뒀을 정도로 거슬렸다. 364페이지 중간 “…목을 조이는 상황이…” 사람 목이 나사도 아니고 조이긴 뭘 조이나. 사람 목은 조르는 거다. 재판 때에는 ‘조르는’으로 수정되길 바란다.(사실 거슬렸던 이유는 내가 이 상황에서 사람 목을 나사처럼 조이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