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간의 동행 - 당신의 삶을 빛나는 명작으로 만드는
토머스 킨케이드 지음, 황진아 옮김 / 비전하우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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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사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있다. 반대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들을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이야기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열려 있다면 자신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선별해서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작은 조언이라도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에 유명인사의 이야기라면 사실 좀 입맛이 다셔지는 것이 사실이다. 어떻게 저 사람은 사회적으로 명성을 쌓고 부를 축적했을까 하는 궁금함이 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노력했을 테고, 남들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욱 철저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게 실제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자서전을 읽거나 이야기를 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에 흥미를 가지고 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쉬워도 그것을 제대로 전달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토머스 킨케이드의 이 책은 어쩌면 약간 실패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서론에서 한 이야기에 대해서 계속 중요한 것은 반복하는 것은 알겠지만 거기에는 정작 경험에 담긴 진솔한 이야기는 부족하고 실교조의 무한 반복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알겠지만 좋은 말도 두 번 이상 들으면 질리는 게 사람 마음인데 말이다. 진솔한 이야기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어쩌면 특유의 문체 문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성스러운, 충만한 등등 ‘창조적인’이라는 테마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러한 모호한 형용사로만 시종일관 치장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때에 느껴지는 감정이 충만하고 성스러웠다고 말하면 어떻게 공감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구체적인 이야기와 상황이 많아도 그런 추우우웅마아만한 느낌을 나눌 수 있을까 말까한데. 어떤 무형(창조성)이 충만한 삶을 살라고 충고하면서 어떻게 할 수 있냐고 물으니 거기에 무형(아주, 충만한 느낌과 성스러운 느낌)을 느끼면서 살라는 대답이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이 책 다른 자기계발서와 비교해서 더 나은 점은 토머스 킨케이드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밖에는 없는 것 같다.(책은 아주 예쁘게 잘 만들어졌다) 창조적인 삶을 살자는 슬로건은 이미 진부하다. 거기에 덧붙인 설명은 애매모호하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비종교인이나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안 먹힐 요지마저 농후하다. 겉은 약간의 차별성, 이를테면 삽화나 토마스 킨케이드가 화가라는 점을 내세우고 속은 자기계발서의 공식을 답습했으며 마지막으로 그마저도 명쾌한 맛이 없다.

하지만 다른 강점은 읽으면서 하나 예상치 못하게 찾아냈다. 그건 예술을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이라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 쑥스럽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토머스 킨케이드의 글에서 예술가가 가져야 할 고집스러움을 보았다. 게다가 누구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고 공간이 필요하다. 거기는 스스로와의 싸움을 해야 하는 치열한 곳이다. 누구나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면 모두가 화가일 것이고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면 모두가 작가일 것이다. 거기에는 창조성이 말 그대로 반짝여도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면 스스로의 세계에 매몰되고 마는 곳이다. 그러한 곳에서도 뚝심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은근함과 고집스러움이 토머스 킨케이드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분명 이 책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읽었던 이유는 이러한 진솔한 삶에서 우러나는 것들이 그래도 나에게 꽤나 시간 들일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스스로의 N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듯 하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모두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세상에 꼭 같은 삶이란 없다. 그러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이 책에서 어떤 것을 가져갔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몰두할 수 있는 대상, 밀고나가는 뚝심. 바로 그것이 이 책이 나에게 새삼스럽게 깨우쳐준 것이었다. 자신 만의 N을 찾고 거기에 몰두하고 밀고나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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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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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니, 살밖에 없다

          눈을 감고 한 번 상상해보자. 눈앞에, 아니 자신의 앞에 거대한 터널이 있다고. 그 터널의 입구에 덩그러니 혼자서 서있다고. 시커먼 터널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어두운 밤이다. 인기척도 기계음도 들리지 않는다.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쿵’ 발소리가 크게 울린다. 터널 안으로 혹은 뒤를 돌아 역시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끝없는 도로로, 둘 중 하나 선택을 해야 한다. 아니면, 그 자리에 계속 서있을 수밖에.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았던 이미지가 있었다면 그건 터널과 도로다.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끝없는 미로와 같은 터널과 도로. 바로 그것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떤 선택, 어떤 신념, 어떤 후회, 어떤 과거.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선택하고 또 그곳으로 나아간다. 사실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버튼을 누르면 저도 모르게 어떤 장치에 이끌려 눈을 뜨면 어떤 결과에 혹은 어느 삶에 봉착하는 것 같다. 그러니 버튼을 누르기 전에 고심하는 것은 당연하나 되돌아보면 사실 버튼을 눌렀나 싶을 때도 있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무수한 길과 지명과 삶처럼, 그렇게 우리는 어쩌면 선택하느냐 마느냐, 이런 간단한 원터치 버튼식이 아닌 무엇을 선택해도 그 끝은 알 수 없는 랜덤식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야 한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 눈앞에 무엇이 펼쳐질지 모른다고 해서, 선택한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앞의 말 정정해서, 살밖에 없다.

          2. 싸구려가 왜 있는 줄 알아?

          한 여자가 죽었다. 타살이다. 이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얽힌 도로망처럼 한 여자의 죽음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사람이 혼자서는 못 사는 탓이다. 좋건 싫건 관계를 맺고 또 관계를 맺어야만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이러저러한 사연 가진 사람들의 관계가 서서히 드러나고 그들의 트라우마를 살피며 소설은 조심조심 혹은 대범하게 진행된다.

          빨리 죽은 사람만 무안하게 아니러니 하게도 시작은 한 여자에게 있었으나 사실 그 여자 주인공이 아니다. 사실 이 소설 딱히 주인공 잡기가 힘들게 주변 인물에게 고루고루 관심을 쏟아야만 읽을 수 있다. 그만큼 관계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소설의 관점이 줄곧 죽은 사람에 대한 동정 연민 혹은 분노에 있지 않음에 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도미노처럼 촤르르륵, 한 여자의 죽음이 시발점이라면 그 이후 사람들의 변모와 그들의 삶에 조명을 맞춘 것이 이 소설이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면서 해야 할 일은 범인이 누구인가 추리하는 것도 여자의 죽음에 분노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 복잡한 도로에 뛰어들어 같이 운전하면서 속도와 방향을 함께 느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급질문 하나. 어째서 제목은 악인인가 하는 점. 아니, 애초에 범인을 찾을 것도 아니고 주변인의 삶에 관점을 맞추었다면 과연 악인이라는 단어는 왜 등장해야 하는 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불만을 제기한다. 사실 이 소설 (심각한 스포일이니 주의)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더 심각한 스포일이니 주의) 아니, 사실 악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 적도 없다. 왜냐하면 소설은 시종일관 무엇을 찾는가(구체적으로는 악인)하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변하는가, 흘러가는가에 맞춰 진행된다. 진정으로 악한 존재는 없고 모두가 가슴에 상처쯤은 있는 거라고 얼버무리기에 딱 좋다. 여기까지.

          다 읽고, 한 등장인물이 했던 말 중에서 싸구려 같다, 라는 말이 남았다. 그러고 보니 옳거니, 등장인물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어쩌면 현실에서는 싸구려라는 말을 들을 인생이다 싶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유난히 번쩍거리는 인생에서 트라우마를 보여준들 얼마나 많은 동감을 살 수 있을까. 원래,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 더 찢어지는 고통을 맛봐야 사람들이 겨우 슬퍼하는 법이다. 안 그러면 자기 인생에도 저 정도 슬픔은 있는데 뭘 그리 같이 슬퍼해주겠나 말이다. 이번엔 유독 내가 싸구려라는 말에 집착한 이유를 떠올려보니 아하, 내가 읽으면서 이 사람들한테 감정이입을 많이 했구나 싶었다. 이 사람들 싸구려 아냐! 라고 항변하고 싶을 만큼. 그러니 누가 나한테 지금 “싸구려 같아.”라고 말하면 나는 되물을 것이다. “싸구려가 왜 있는 줄 알아?” 그리곤 대답할 것이다. “싸구려도 다 필요하니까 있는 거야.” 아무리 도로가 많다고 해도 아무리 다니는 차가 없었던 도로라고 해도 그 도로가 막히면 다른 곳은 정체되기 마련이다. 쓸모없는 도로가 없는 것처럼 쓸모없는 사람도 없다. 소설에서 한 여자의 죽음을 피라미드의 윗부분에서 돌이 하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랫부분에서 없어졌구나, 말하는 것처럼 어떤 관계도 삶도 사람도 그렇다. 모든 돌은 제 쓸모가 있다.

          3. 아쉬워서 갈증이 난다

          요시다 슈이치를 처음으로 만났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한 작가라 내심 기대를 단단히 하고 읽었다. 작가 본인 입으로 감히 대표작이라고 칭하는 작품이라면, 얼마나 쓰면서 공을 들였을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더욱 기대했다. 하지만 읽고 나서 어딘가 5%쯤 모자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재미있게는 읽었다. 사실 창피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울먹거리기까지 했다고 고백한다. 감정이입 잘 된다. 그건 내가 작가가 보여준 그들의 삶을 한 조각씩 맛보았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역시 뒷심에 관한 부분인데, 초반의 약간은 메마르게 그들의 삶을 보여주려고 했던 작가의 시도와 면들이 어그러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후반에 가서 나는 반전을 기대한 것도 가슴 찡한 해피엔딩을 기대한 것도 가슴 먹먹한 비극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따라서 흘러가듯 읽었다. 그런데 끝에 가서 그들의 삶에 작가가 너무나도 깊게 빠져들었던 탓인지 지나치게 감정적인 서술이 눈에 거슬렸고, 감정적인 결말로 이끌려고 했던 것이 거슬렸다. 결말 자체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그 방식에 대한 아쉬움이다. 이런 걸 나는 일본식이라고 감히 말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온갖 감정의 후폭풍을 몰아치게 만들기 위해서 심하게 독자를 채찍질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다) 이 소설 마지막 챕터에서 조금만 더 덤덤하게 썼더라면, 하는 일말의 아쉬움을 남겼다.

          4. 마지막으로 주절주절거리기

          번역이 아주 매끄럽지도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었다. 부사로 시작되는 문장이 너무 많다. 원작을 살리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한다면 거기에 대고 나는 그럼 어째서 방언을 못 살렸나 라고 따질 것이다. 중간에 따옴표 잘못 나온 부분도 있었고 오타나 비문도 있었다. 하지만 작품을 읽는데 그리 크게 방해가 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내 눈에 가장 크게 보였던 사례가 하나 있었다. 다 읽고 나서 찾아서 페이지 수를 적어뒀을 정도로 거슬렸다. 364페이지 중간 “…목을 조이는 상황이…” 사람 목이 나사도 아니고 조이긴 뭘 조이나. 사람 목은 조르는 거다. 재판 때에는 ‘조르는’으로 수정되길 바란다.(사실 거슬렸던 이유는 내가 이 상황에서 사람 목을 나사처럼 조이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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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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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란 무릇 어느 나라이건 간에 그리 환영받는 대상은 아니다. 어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평가를 해대는 비평가를 좋아할 것인가. 독자 역시 그 관점이 일반인과는 요원한 비평가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물론 책을 살 때에 비평가의 글 한 줄이 크게 작용을 하긴 하겠지만. 비평가 김현은 처음에는 시인이었다. 어떤 연유로 그가 비평가가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하나 엄연히 그도 시를 쓰는 시인이었고 사계(四季)라는 동인에까지 몸 담았던 바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비평은 도전적이며 치밀하고 한편으로 대담하지만 그 기저에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지대한 사랑이 깔려있었다. 너무도 이른 때에 세상을 등졌으나 그 업적이 평생을 살다간 사람도 다 이루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던 비평가 김현. 자신이 그렇게도 빨리 갈 줄 알았던 모양인지 그토록 부지런 했는지 그는 살면서 쉬는 때가 없을 정도로 많은 비평을 남겼고 비평가들의 꿈이라는 문학사(김윤식 공저, 『한국문학사』, 민음사, 1973)까지 편찬했다. 이토록 바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그의 일기 혹은 독서 노트를 읽는다는 건 참으로 두근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그러한 김현의 유고작이자 죽는 그날까지 손에 잡고 있었던 마지막 원고이자 일기였다. 사적인 부분은 자기 검열로 삭제하고 독서 혹은 사유의 장만 최대한 열어놓은 그의 일기. 그것이 바로 『행복한 책읽기』인 것이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에 걸친 그의 독서와 생각의 깊이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고 과감하게 추천한다.

남의 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읽는 것과도 같다. 물론 이 책의 경우 사적인 이야기를 많은 부분 삭제했기 때문에 그러한 은밀한 느낌은 다소 없으나 편한 논조로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부분을 볼 수 있으며 허심탄회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흥미를 유발한다.

그의 일기는 자기 자신에게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메모와도 같고 짤막한 서평 혹은 고찰 같다. 일기이기 때문에 더더욱 친절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다. 어느 날에 쓴 일기는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가 있어 읽으면서도 이해는 가나 공감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김현과 같은 독서가가 읽어야 더욱 재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데올로기나 문학이론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서 문학사 혹은 비평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 미하엘 바흐친의 이론을 전혀 듣지 않은 사람이, 비평가 김윤식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찌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분명 이 책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좋아하는 책의 글귀를 적고 되새기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의 일기는 거의가 독서에 관한(일부 문학이론)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바, 개미 같이 부지런한 독서가의 모습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읽다가 내가 모르는 책에 관한 이야기 중에 흥미로운 것이 있으면 나도 읽어보리라 메모도 하고, 내가 읽은 책이라면 고개를 끄덕인달지 갸웃거린달지 하는 식의 소통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방대한 독서가의 모습이란 무릇 그 가운데에 부지런함이 있는 것이구나 하며 자신을 다독이는 계로 삼을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위의 모든 행태를 하고 있었다. 아는 작가 모르는 작가, 아는 이론 모르는 이론, 아는 시 모르는 시. 나의 독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분명 이 책에는 담겨있었다.

시인이자 비평가이자 독서가였던 김현의 행적을 되돌아보면서 나 역시 나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던 책.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의 궤적을 보며 추억하고 애도하고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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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역사
존 우드퍼드 / 세종(세종서적)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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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허영의 역사』라고 하기보다는 『사치 혹은 치장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서양의 역사를 따졌을 때 허영의 최초 개념은 나르키소스로부터 시작된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 그러니까 온전히 겉모습에만 빠져 식음을 전폐하고 오로지 그것에만 빠졌던 나르키소스. 그 나르키소스의 모습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겉모습을 중히 여겨 목숨 정도는 가볍게 던질 수 있는 모습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이다. 이 허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모습과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모습 두 가지가 동시에 드러난다. 허영은 사치 혹은 치장과 그 궤를 함께 하며 이 책에는 그러한 역사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화장의 최초 기록은 이집트의 고대 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제시되는 허영의 산물들 중 의치, 가발, 의복, 신발 등에 이르는 거의 모든 치장에 관한 것은 비단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서 고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 면면이 워낙에 오래된 것이라 사람의 기본적인 욕망과도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 역사는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이 허영에 집착해왔는지 생생하게 알게 하는데 과학 기술이 발전된 지금에 와서는 허무맹랑하고 한편으로 소름끼치는 시대상 까지 보여준다. 복식의 경우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오래 전부터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빈부의 격차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코르셋의 경우 몸의 기형을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유행의 선두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허영의 면면을 들여다보자. 먼저 의치. 치과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 사람들은 이미 빠진 이를 위해서 나무부터 시작해서 온갖 치아를 대신할 것들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물론 섭식을 위한 용도로 시작된 치아 이식술은 나중에 가서는 부와 지위 혹은 미의 기준이 되었다. 불법으로 자행되고 또 검증되지 않은 것들을 대신 이식함으로써 얻어지는 수많은 부작용을 감수하고라도 의치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심지어 피아노 건반처럼 희고 매끄러운 치아를 가지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니를 뽑아 이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의복에 있어서는 부와 지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중세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가진 자들의 양복 혹은 드레스는 그 유행이 계속 바뀌면서도 생활이 편리함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가발은 더한 것이어서 여성의 가발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지도 못할 정도로 높고 무거운 것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금발의 유행과 권위주의 혹은 대머리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가발은 그 유행이 오래되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발을 쓰고는 마차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엄청나게 크고 부풀려진 가발이 인기가 있기가 있었을 때에는 가발에 여러 장식을 하는 것이 함께 유행을 했는데 꽃을 장식하는 것도 모자라 그 꽃의 싱싱함 유지를 위해 가발에 물병까지 함께 달았다고 하니 그 위용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신발의 경우 하이힐의 유행이 척추와 발가락뿐만 아니라 건강에 전체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것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화장의 경우는 익히 알려진 바대로 납중독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 유행이 극에 달했을 때에는 몇 센티에 이르게 분을 두껍게 바르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하니 짐작키가 어렵다. 눈동자를 크게 보이기 위해서 벨라도나라고 하는 독을 안구에 떨어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한편 목욕은 로마시대 이후 오랫동안 그 자취를 감추었다. 한 달에 한 번 목욕을 하는 것이 특별하던 시대에 얼마나 사람들이 안 씻었는지는 상상하기도 싫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향수가 발달했다. 또한 그 향수도 곧 사치의 일부분이 되었음은 당연한 수순이라 하겠다.

이렇듯 허영이 꾸준히 발달(?)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이라고 또 다를 것은 무엇인가. 역시 눈동자가 커 보이게 하기 위해서 건강에 좋지도 않은 서클렌즈니 컬러렌즈니 하는 것들이 유행을 하고, 좀 더 아름다운 신발을 신기 위해서 새끼발가락을 뽑아내는 수술을 하고, 좀 더 아름다운 ‘쌩얼’을 가지기 위해서 성형수술도 마다하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 시대가 변하고 기술의 발전이 있었을 뿐 허영과 사치 그리고 과시 치장의 역사는 쭉 계속되지 않는가 말이다.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하는 윤리적 문제를 뒤로 하고 극히 개인적이자 사회적인 이 허영의 역사는 곧 시대가 변하며 함께 변화하는 미의 의식 혹은 과시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100여 년 뒤에 다시 써질 허영의 역사에는 또 어떠한 군상이 그려질지 자못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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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M의 성생활
카트린 밀레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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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가장 고민한 것은 서평을 쓸 때 과연 본문인용을 할까 말까 하는 것이었다. 제목에서부터 포스가 풍기는 이 책, 사실 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경험담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다. 제목은 분명 카트린 M의 성생활이지만 작가가 밝힌 것과 같이 이건 작가 자신의 성생활을 나열(?)한 책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몇 년 전에 연예인 서갑숙 씨가 자신의 성경험을 책으로 낸 바 있다. 나는 그때 고등학생이었기에 내 신분으로는 그 책을 사서 읽을 수가 없었다. 19금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한 친구의 부모님의 도움(물론 그 분은 스스로 읽으려고 한 것이었겠지만) 받아서 읽어 보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반 전체가 그 소설을 읽었는데 순번을 정해서 돌려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임선생님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읽으려 했던 우리의 심리는 흡사, 집단 관음증과 비슷했다. 은밀한 것을 보려고 하는 욕망과 거기에서 얻어지는 일종의 쾌감. 사실 한 소설을 읽는다는 심정이 아니라 우리는 그때 금지된 성(性)이라는 성을 염탐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실제로 한 여자가 자신의 섹스담을 풀어 놓았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남자라면 또 모를까, 여자가 그것도 자신의 성경험을 얼굴 까놓고 말한다는 것에 윤리가 떨어졌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이 책 프랑스에서 발간되었을 때 어떠한 파장이 있었나? 우리와 비슷하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건히 지켰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다른 것이라면 우리는 서갑숙의 책을 야설로서 읽었다면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시도의 소설로 읽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프랑스를 옹호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프랑스와 대한민국 사이에는 문화적 차이라는 게 존재하니까 말이다. 또한 읽어보면 어째서 새로운 시도의 소설로 여겨졌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럼 본격적으로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이 책 카트린이라는 여성의 성생활을 풀어나가고 있다. 챕터를 살펴보자면, 수, 공간, 내밀한 공간, 세부묘사로 나뉘어져 있다. 그냥 쉽게 말하자면 카트린이 섹스를 하고, 공간에서 섹스를 하고, 내밀한 공간에서 섹스를 하고, 그 섹스를 세부묘사 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A to Z 모든 섹스를 기술한 것이다. 여기서 굳이 기술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섹스를 말 그대로 열정도 흥분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기술했기 때문이다. 미술관에서 사람들 눈을 피해 몰래 섹스를 하고, 섹스샵에서 집단으로 섹스를 하고, 집에서 섹스를 하고. 상황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섹스담. 여기에는 서사도 없고 개인도 없고 로맨스도 없다. 오로지 카트린 자신 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옳거니! 카트린 M의 성생활인 것이다.

자신이 겪은 일이되 감정의 차원에서, 회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단순한 생활의 일부분으로 어떠한 미사여구도 없는 행위. 바로 그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들의 섹스가 아닌 카트린 M의 섹스다. 그러니 소설로 읽을 수밖에. 나도 사람이니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으나 차갑고도 무미건조한 섹스들의 나열은 나를 하나도 흥분하게 하지 못했다. 나 역시 읽으면서 음, 이 여자가 그랬군, 하는 식으로 읽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서평만으로는 잘 상상이 안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본문인용을 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어떤 돌이 날아올지 모른다. 부분만 턱하고 떼어 놓으면 어떤 야설에서 등장하는 씬인지 누구도 가늠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연결고리에 카트린을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하나도 남다를 것 없는 그녀의 일상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러면 책을 다 덮고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갈증이라고 해야겠다. 채워지지 않은 나의 기대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시종일관 건조하게 말한 카트린에게 감화되어 느끼는 갈증이다. 또한 나도 반쯤은 그런 생각을 했다. 섹스? 뭐 별 거 있나. 말 그대로 성생활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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