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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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우리나라 참 좋아졌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약 30년 전만 하더라도 군부독재니 유신정치니 항쟁이니 사회주의니 말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생각해보자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참으로 살만해졌다. 아직도 비전향 장기수니 국정원이니 말이 많지만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행복에 겹다. 왜 행복에 겨운 거냐고 물으신다면 그 때는 '빨갱이'의 '빨'자만 꺼내도 사람을 마구 잡아가던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버젓이 민주노동당이 의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않은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 처녀일 시절의 얘기다. 그 때 우리 어머니는 한창인 처녀였다. 그리고 전남 광주에 사셨다. 흉흉한 분위기라 밤만 되면 섬뜩할 정도로 조용했고, 어떤 때는 더 섬뜩한 총소리가 들리기도 했단다. 당신은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으셨지만 광주에서 살았기에 그 분위기와 그 참혹을 겪었다. 언제 한 번은 공원 앞을지나가는데 군인들 한 무리가 있었다고 했다. 무서워서 걸음을 빨리 해서 한창 가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만삭이 다 된 임산부가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어머니는 평생에 못 잊을 장면을 보셨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걸어가는 임산부에게 한 군인이 일어나서 총의 끝에 끼우는 대검으로 등을 쑤셨단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것도 만삭인 임산부를. 어머니는 경황도 없이 그저 도망가기만 바빴는데 더 못잊을 공포는 당신의 생명에 대한 공포가 아닌, 도망가는 등 뒤로 들리는 군인들의 웃음소리 였다고 하셨다.    

 그렇게도 시대가 흉흉했다. 아무나 죽어나가고 아무나 잡아들이고 아무나 고문했다. 이제 그 시대는 지나가버렸지만 아직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그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떳떳하게 살아있고, 북을 바라보던 양심수들은 감방에서 작은 새를 바라본다. 그렇다. 사실은 그 시절은 영원히 가실 수 없다. 그 때 죽은 이들의 묘비가 영영 남아 있을 것이기에.

 왜 이런 끔찍한 얘기를 하는가 하면 이 책의 내용은 한 남자의 어쩌면 처철한 운동기를 담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 정도는 어쩌면 한국 사회 자체에 대한 혹은 프랑스의 똘레랑스를 담고 있다. 허나 가장 나에게 다가왔던 이야기는 더이상 조국으로 갈 수 없는, 이른 바 코레 이외에는 어느 세상에라도 갈 수 있는 남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서울대의 위세는 대단하다. 소위 말하는 '인텔리'이기 때문이다. 졸업 타이틀은 성공 타이틀과 비슷하다. (물론 청년 실업이 심각하긴 하다지만) 이 남자는 그런 대단한 서울대를 나왔지만 나누자면, 프롤레타리아의 정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택시기사를 하고 있다. 우습지 않은가. 서울대생 택시운전기사라니.

 거기에는 긴 사연들이 있다. 구구절절하다.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아왔던 운동가의 삶이 참으로 처절하게 다가온다. 고문을 받고 도망가고 삐라를 뿌리고. 그의 운동의 생활은 곧 우리나라 근대의 인권없던 그 시절을 대변한다. 위에서 말했듯 끔찍한 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이른바 똘레랑스이며 모든 보헤미안의 고향이기도 한 프랑스. 그 프랑스에서 이야기는 쓰여지고 있다. 평등하고도 외국인에게 모든 사회보장을 해주는 나라 프랑스.

 우리나라와 프랑스. 인텔리와 택시운전사. 이 두가지의 크로스 오버는 자못 심각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지금 현재의 한국 사회를 되돌아 보게 한다. 역사는 흐르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과연 그 역사를 벗어던졌는가? 위에서 말했듯 아니다.

 코레에는 필요치 않은 똘레랑스의 노래를 들어보자.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밤비가 흘러내리듯, 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루-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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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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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다. 이 맘 때는 조금만 지나면 추석이 온다. 추석이되면 우리집은 언제나 성묘를 가는데 한 곳은 할아버지 묘소이고 다른 한 곳은 증조할아버지 묘소다. 증조할아버지 묘소는 산이 중턱 쯤에나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데 한 번 올라가려면 숨이 차서 도착하면 기진맥진한다.

 올라가는 길은 험하기 그지없다. 애초에 등산객이 다니는 산도 아니고 우리들만 성묘 때나 오르기 때문에 겨우 한 사람 지나갈 만하다. 사람이 없으니 자연히 숲은 우거지기 마련이고 덤불이나 칡이나 한데 엉커 있어서 잘못 오르면 자빠져서 주르륵 아래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올라가는 길에 성묘할 때 쓸만한 소나무 잔가지들을 꺽어서 가는데 그것이 또 쉬운 일이 아니다. 산에는 유난히도 갈참나무들이 많은데 비슷한 참나무과 다른 나무들도 많다. 특히 어른 허리깨나 겨우 올 법한 갈참나무들이 많은데 큰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들이 싹을 틔워 이제 막 나무로서 제몫을 해나갔다. 열매는 제법 도토리답다. 꺽고 가기에는 나무가 작고 과실 나무기에 함부로 하지 못하고 헤쳐서 겨우 소나무 가지를 더듬게 마련인데, 그럴 때면 모처럼 명절에 차려입은 옷이 엉망이 되고 만다.

 어릴 때는 그 작은 도토리들을 두 손에 가득 모으고 그것도 모자라서 옷에 달린 주머니란 주머니에는 가득가득 채워서 산을 오리고 내리고 했다. 고깔을 벗기고 나면 반질반질한 것이 어찌나 야문지 맛이 떫은데도 일단 입에 넣어보고 했는데 작은 것이 어찌나 알차던지 유치(齒)로는 깨물기도 어림없었다. 깍정이나 겨우 갉으면 그제서야 그 떫은 맛에 혀를 내두르고 퉤퉤 뱉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도토리 묵을 쒀먹으려고 해도 물에 며칠 담가뒀다가 만드는데 그걸 그냥 다 익지도 않은 푸르딩딩한 놈을 입에 댔으니 오죽 썼으랴.

 집에 도착하면 훈장처럼 아이들이 모여서 주머니에 든 도토리를 끄집어내는데 애들이 딴 것이 어디 눈대중으로 짐작이라도 하던가, 다 익지도 않았고 덜 여문 것들이 태반이라 먹을 수도 없고 그저 가축 사료로나 줄 수 있을 것들인데 그걸 가지고 죽 만든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니한테 가서 죽을 쒀달라고 조르고 또 졸랐었다.

 사람이 없는 숲은 말그대로 야생이며 사람이 가면 훼손 되기만 할 뿐이지 도움은 못된다. 아마도 그 때 우리가 땄던 도토리들도 그냥 뒀으면 겨우내 다람쥐 먹이라도 됐을 것을.

  어째서 이렇게 이야기가 길었냐하면, 이 책을 쓴 작가가 천상 농부라서 그렇다. 산에 피는 잡초하나 업수이 여기지 않고 그대로 마음에 심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맛나게 쓰는 그런 농부. 

 가령 산수유를 보고 우리는 으레 꽃이 피었구나 하고 넘어갈 것들도 그는 세심하게 살피고 또 살펴서 이 놈이 자라기가 이리도 힘든 놈인데 노란꽃을 흐트러지게 피웠구나 하면서 우리네 세상이 얼마나 눈 앞의 가치에만 급급하는가! 라고 말한다. 씨앗 하나에도 온정을 쏟으며 이 작은 녀석이 다 자라서 100년도 넘게 살아 이 자리에 있겠구나 싶어서 소중히 낱알 하나 쉬이 대하지 않는다.

 농사는 혼자서 짓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와주고 땅이 도와줘야 짓는 것이 농사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농사법이 있어서 그리 한다해도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고 땅이 튼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농사인 것이다. 계절에 맞추어서 무엇 하나 지나치지 않고 딱 그 시기에 해줘야 할 일들이 많아서 게으름 부리면 대번에 태가 나는 것이 농사이기도 하다.

 이 농삿꾼은 그렇게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자연의 순리와 마음을 간직하고 우리하게 조근조근 들려준다. 때로는 나직하게 겨울에 온 눈꽃도 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때로는 호통으로 나무도 이렇게 순리대로 사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면 되겠냐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맨처음 말했듯이 어릴 적 추억들이 선연히 지나가며 예전에는 철이면 철대로 느끼고 즐겼던 시절들이 떠올랐다. 

 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오로지 도시의 샌님들이라곤 하지말자, 일주일에 한 번씩 독한 농약 뿌려가며 대충 농사 짓는 하늘을 땅을 져버리는 농삿꾼도 많다.

 그래서 더더욱 이 시대의 진정한 농삿꾼의 이야기가 소중하고 좋았다.

  가을이다. 슬슬 계절은 순리대로 서늘해지고 나무도 겨울을 나려고 준비하고 그 동안 모았던 양분으로 알찬 열매를 내놓기 시작한다.

 허나, 보자. 가을이 오고 있는 지금에 우리들은 얼마나 순리대로 제 할 일 하면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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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 -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101인의 가상유언장
도종환.황금찬 외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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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죽는다. 평생의 부귀영화를 다 누린 사람도, 평생을 길거리에서 빌어서 먹고사는 비렁뱅이도 죽는다. 누군가 말했던가, 사람은 똑같은 종말, 즉 죽음을 맞이하기에 평등하다고.

결국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지금 이렇게 아둥바둥 사는 것도 부질 없게만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결과가 같다고 해서 그 과정마저도 같을까. 하찮은 개미도 일생이 다 다를진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다. 꼭 유명해져야만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이름을 남기고, 누구도 눈여겨 보지는 않지만 조막만한 땅에 세워진 비석에도 이름이 남는다.

오늘,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유언을 읽어보았다. 물론 가상 유언이기에 그 절박감이야 생의 마지막을 앞둔 사람만 할까만은, 그래도 죽음이라는 명제가 쉬이 넘길 것은 아니라서 그 무게가 톡톡하다.

누구는 화장을 해서 산의 멋들어진 소나무 및에 묻어달라고 하고, 누구는 비석에 자신을 시를 세겨달라는 하고, 누구는 평생을 써서 남은 자신의 작품을 함께 묻어달라고 한다.

과정이야 다 다르지만 자신의 죽음 앞에서 당부하는 이가 태반이다. 아들에게 딸에게, 일생을 함께한 부인에게 남편에게,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준 지인에게.

읽으면서 눈물이 찔끔나기도 나기도 하지만 나에게 한가지 남는 것이 있었으니 나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였다. 아니, 자세히 말한다면 어떻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 였다.

나는 아직 죽기에는 젊은 나이다. 본문 중에도 있지만 죽음에 아이며 노인이며 조건이 있을까만은 시대의 평균 수명을 살펴보자면 나는 죽기에는 아직 젊다. 그래서 아직은 죽음에 대해서 실감을 할 수도 없고 이렇다할 얘기 거리도 많지 않다. 허나 언제고 찾아 올 수 있는 죽음이기에 진지해져보기로 했다.

마땅히 무덤에 넣어달라고 할 것도 없다. 이루어놓은 것이 없는 탓이다. 지인들에게 당부할 것도 없다. 평소 대인관계가 그리 순탄치 않은 탓이다. 부모님께는 한없이 죄송할 뿐이다. 불효한 탓이다. 생각을 해보니 정말 나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가상 유언장을 쓴다면 미안하다, 죄송하다, 후회한다, 이런 말들만 빼곡하게 적을 수 있을 뿐 다른 것이 없다.

이것이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날들의 마지막인 것이다. 참으로 허무하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산다고 살았지만 정작 죽는다고 생각하고 보니 남는 것이 없다. 내 이름 석자 어디 한 곳에 남아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겨할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머리에 쓴 것처럼 시대의 문인들의 각자의 삶에서 느끼는 것도 많고 보는 것도 많았다. 문학적인 기록에 있어서 가치도 충분하다. 한 명 한 명 생각이 다르고 살아온 삶도 달라서 유언도 제각각이다. 거기서 슬픔도 눈물도 생의 반짝임도 보았다.

왜 이 책의 제목이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인 줄 알겠다. 죽음으로서 되돌아보니 이 짧은 생에 남긴 것이 없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남겨야 할 삶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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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희망 유재현 온더로드 6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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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을 다 덮은 지금, 왜 이 책을 좀 더 빨리 볼 수 없었을까 아쉽기까지 하다. 게다가 요 근래에 봤던 어느 픽션보다도 더 감동적이다. 논픽션이 주는 진실성에 반한 것인지, 사진과 글에 따르는 이국적인 정취와 혁명의 후폭풍에 의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허나 나는 반했다.

근래에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는가? 카스트로 의장에 관한 기사였다. 쿠바의 수도 근교에서 국내 모 기업이 이동식 발전설비 설치 공사를 맡고 있는데 거기를 건강이 안 좋은 카스트로 의장이 방문을 한 것이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한국에 관해서 굉장히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고 전한다. 게다가 중국이나 북한보다도 단연코 한국이 좋다고 말해서 쿠바에 대한 이미지가 국내에서 급상승했다.

이런 기사를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단순히 쿠바의 수장이 우리나라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구나 싶을 뿐이었다. 허나, 이 책을 읽고난 지금 사상과 국가가 충돌했던 지난 세기를 뒤돌아 보면서 쿠바가 가지고 있었던 이미지를 상기 시켰다.

나는 쿠바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저 쿠바산 시가가 고급이라는 것과 그 유명한 체 게바라의 나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지금도 잘 모르기는 매한가지다.  이 책을 읽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에는 쿠바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쿠바라는 나라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

유재현이 찍어낸 쿠바의 모습들은 가난하지도, 비극적이지도, 유쾌하지도 않다. 어떤 것으로도 포장할 수 없는 진실성이 내포된 하나의 푸른 유니콘. 그 자체였다.

긴 여행길에서의 미사여구도 필요치 않고 그저 담담히 우리에게 전해주는 쿠바의 이야기들은 한 나라에 대한 애정과 혁명의 부스러기가 아직도 뭍어나는 남미의 정취 바로 그것이었다.

토요일 밤의 열기, 바다냄새 풍기는 자연의 해변, 빵을 배달하는 소년의 정직함, 총탄의 상처를 지닌 건물들, 국가가 아닌 국민들이 대변하는 나라. 바로 그 쿠바였다.  

서평을 쓰는 지금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은 좋은 책을 잘 소개할 수 없는 내 필력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단순히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들을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나도 쿠바로 떠나고 싶다.

그 바다, 그 사탕수수밭, 그 혁명, 그 사람들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으로 떠나 그 자연, 그 노동, 그 영광, 그 삶들을 그대로 맛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아닌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할 것이란 생각에, 나는 선뜻 누구에게나 추천을 할 수가 없다. 왠지 여기에 남아서 담장 밖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내가 슬퍼질 것 같기 때문이다. 

나도 작가와 같은 심정으로 인삿말을 고한다.

"안녕히, 부디 당신들의 세계를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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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사랑하기
빌헬름 게나찌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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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쳐든다. 한 남자가 걸어간다. 그는 고민을 한다. 두 여자 중에서 어떤 여자를 골라야 할 것인가. 두 여자를 떠올린다. 결론은 미뤄진다. 생각한다. 둘 다 사랑하고 둘 다 소중해.

나는 기대를 했었다. 삼각관계의 그 팽팽한 스릴, 비윤리적인 고뇌, 화려한 종말를. 허나 금새 나는 그 기대를 접었다. 주인공 남자는 52세의 아저씨다.

나는 아저씨의 불륜 따위 보고 싶지 않다고!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이건 분명 내 의식의 저변에 깔린 관음증이 발동한 것이리라. 다른 이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고 싶은 관음증 말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두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두 여자 중에서 한 여자를 고르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 남자로 말할 것 같으면 52세의 노후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종말론'을 강연하는 남자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해야만 한다. 그래서 적당한 시기에 알맞은 죽음을 기대한다.

어느 날 그는 고민에 빠진다. 두 여자 중에 한 여자를 골라야 한다는 고민. 왜 이런 고민에 빠졌는가 하면 그가 설파하고 다니는 그 종말론이 자신에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랄까. 윤리적인 도덕심도 한몫했지만.

그는 과민한 남자다. 그리고 자기 삶의 종말을 두려워 하고 있다. 간간이 일어나는 다리의 발작, 손에 난 작은 습진, 붉은 끼가 도는 흑갈색 소변, 사정을 참지 못하는 섹스. 등등. 그는 건강상의 작은 변화들이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남들에게 말했던 그 종말이 실제로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두 여자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까지 지니고 있다.

P.176) 질서있는 삶(여자 한명, 사랑 하나, 집 한 채, 하나의 명확함)을 향한 나의 소망이 지금의 질서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질서까지 전부 파괴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이렇게 두려워만 하고 있는 이 남자의 친구(그나마 친구라고 쳐 줄 수 있는데까지 쳐서)들은 더더욱 그를 파국으로 모는데 일조한다.

우체국의 적인 바우스 바크, 그는 언제나 우체국의 만행을 잡아서 증거를 내놓고 그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살고있다. 실패한 화가 모르겐탈러, 그는 말 그대로 화가의 인생에 실패를 하고 결국 분노 관리사가 된다. 역시 실패한 인문학자 블라울 박사, 그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역겨움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언제나 이런 역겨움 저런 역겨움을 외치면서.

이렇게 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역시 정상적이지 않은 우리의 주인공. 우리는 이쯤되면 묻고 싶다. 그렇게 불안하면서도 왜 한 여자를 선택하지 못하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P.118) 내게는 언제나 갈망하는 어떤 것이, 채울 수 없는 갈증 같은 것이 있는 듯싶다.

P.119) 술기운과 돌연한 두려움이 뒤섞인 어떤 갈망이 나를 엄습한다. 하지만 도대체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잔드라와 유디트에 대한 사랑이 이미 오래 전에 과거지사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갈망과 두려움 때문에 내가 이런 사실을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다.

P.120) 내가 갈망하는 것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계속 고민하고 있다. 다소 정상스럽지 못한 사람들과 어두운 이야기는 정점을 향해서 달리고 있다.

그는 점점 자신의 노쇠함과 아날로그가 점점 없어져 가는 사회문화에 더불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 인생이 두렵다. 벌이도 시원치 않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잔드라와 유디트 모두 다 포기할 수가 없다. 게다가 자신의 전처는 새로운 결혼 생활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P.218) 정적만이 가득한 작업실에서 마침내 나는 나누어 갖기를 싫어하는 내 오랜 동경의 막강한 힘을 인정한다.

그는 고민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고민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거 고민만 하고 있다. 다른 이에게 조언을 받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혼자서는 결정하지 못한다. 그가 말했던 사회와 인류의 종말은 개인의 작은 종말로 점점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고민하는 작은 남자일 뿐이다.

 P.236) 바깥 거리에는 차에 치여 납작해진 비둘기가 너부러져 있다. 차가 한 대씩 올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싶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번 그쪽을 본다. ‥‥‥죽은 비둘기는 어느새 아스팔트의 일부가 되어 있다. 나는 화를 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피곤하다.   

그는 한없이 유예한다, 모든 결정을. 단순히 두 여자를 놓고 고민하는 사내의 일상이라고 하기엔 그 무게가 깊다. 어쩌면 우리는 강요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의 고민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망상의 세계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가 쉽게 해버리는 판단에 대한 냉소이기도 하다. 흑과 백의 명확한 세계. 너와 나의 구분법. 시작 혹은 종말. 아이 혹은 노인. 여기서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사회와 개인의 판단에 대한 작은 종말을 예고한다.

그는 과연 잔드라와 유디트, 두 여자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는가. 답은 이미 시작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기는 종말에 대한 작은 감상을 들어보자.

P.226) 우리 모두는 불가능한 진실의 종말 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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