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가을이다. 이 맘 때는 조금만 지나면 추석이 온다. 추석이되면 우리집은 언제나 성묘를 가는데 한 곳은 할아버지 묘소이고 다른 한 곳은 증조할아버지 묘소다. 증조할아버지 묘소는 산이 중턱 쯤에나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데 한 번 올라가려면 숨이 차서 도착하면 기진맥진한다.

 올라가는 길은 험하기 그지없다. 애초에 등산객이 다니는 산도 아니고 우리들만 성묘 때나 오르기 때문에 겨우 한 사람 지나갈 만하다. 사람이 없으니 자연히 숲은 우거지기 마련이고 덤불이나 칡이나 한데 엉커 있어서 잘못 오르면 자빠져서 주르륵 아래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올라가는 길에 성묘할 때 쓸만한 소나무 잔가지들을 꺽어서 가는데 그것이 또 쉬운 일이 아니다. 산에는 유난히도 갈참나무들이 많은데 비슷한 참나무과 다른 나무들도 많다. 특히 어른 허리깨나 겨우 올 법한 갈참나무들이 많은데 큰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들이 싹을 틔워 이제 막 나무로서 제몫을 해나갔다. 열매는 제법 도토리답다. 꺽고 가기에는 나무가 작고 과실 나무기에 함부로 하지 못하고 헤쳐서 겨우 소나무 가지를 더듬게 마련인데, 그럴 때면 모처럼 명절에 차려입은 옷이 엉망이 되고 만다.

 어릴 때는 그 작은 도토리들을 두 손에 가득 모으고 그것도 모자라서 옷에 달린 주머니란 주머니에는 가득가득 채워서 산을 오리고 내리고 했다. 고깔을 벗기고 나면 반질반질한 것이 어찌나 야문지 맛이 떫은데도 일단 입에 넣어보고 했는데 작은 것이 어찌나 알차던지 유치(齒)로는 깨물기도 어림없었다. 깍정이나 겨우 갉으면 그제서야 그 떫은 맛에 혀를 내두르고 퉤퉤 뱉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도토리 묵을 쒀먹으려고 해도 물에 며칠 담가뒀다가 만드는데 그걸 그냥 다 익지도 않은 푸르딩딩한 놈을 입에 댔으니 오죽 썼으랴.

 집에 도착하면 훈장처럼 아이들이 모여서 주머니에 든 도토리를 끄집어내는데 애들이 딴 것이 어디 눈대중으로 짐작이라도 하던가, 다 익지도 않았고 덜 여문 것들이 태반이라 먹을 수도 없고 그저 가축 사료로나 줄 수 있을 것들인데 그걸 가지고 죽 만든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니한테 가서 죽을 쒀달라고 조르고 또 졸랐었다.

 사람이 없는 숲은 말그대로 야생이며 사람이 가면 훼손 되기만 할 뿐이지 도움은 못된다. 아마도 그 때 우리가 땄던 도토리들도 그냥 뒀으면 겨우내 다람쥐 먹이라도 됐을 것을.

  어째서 이렇게 이야기가 길었냐하면, 이 책을 쓴 작가가 천상 농부라서 그렇다. 산에 피는 잡초하나 업수이 여기지 않고 그대로 마음에 심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맛나게 쓰는 그런 농부. 

 가령 산수유를 보고 우리는 으레 꽃이 피었구나 하고 넘어갈 것들도 그는 세심하게 살피고 또 살펴서 이 놈이 자라기가 이리도 힘든 놈인데 노란꽃을 흐트러지게 피웠구나 하면서 우리네 세상이 얼마나 눈 앞의 가치에만 급급하는가! 라고 말한다. 씨앗 하나에도 온정을 쏟으며 이 작은 녀석이 다 자라서 100년도 넘게 살아 이 자리에 있겠구나 싶어서 소중히 낱알 하나 쉬이 대하지 않는다.

 농사는 혼자서 짓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와주고 땅이 도와줘야 짓는 것이 농사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농사법이 있어서 그리 한다해도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고 땅이 튼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농사인 것이다. 계절에 맞추어서 무엇 하나 지나치지 않고 딱 그 시기에 해줘야 할 일들이 많아서 게으름 부리면 대번에 태가 나는 것이 농사이기도 하다.

 이 농삿꾼은 그렇게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자연의 순리와 마음을 간직하고 우리하게 조근조근 들려준다. 때로는 나직하게 겨울에 온 눈꽃도 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때로는 호통으로 나무도 이렇게 순리대로 사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면 되겠냐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맨처음 말했듯이 어릴 적 추억들이 선연히 지나가며 예전에는 철이면 철대로 느끼고 즐겼던 시절들이 떠올랐다. 

 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오로지 도시의 샌님들이라곤 하지말자, 일주일에 한 번씩 독한 농약 뿌려가며 대충 농사 짓는 하늘을 땅을 져버리는 농삿꾼도 많다.

 그래서 더더욱 이 시대의 진정한 농삿꾼의 이야기가 소중하고 좋았다.

  가을이다. 슬슬 계절은 순리대로 서늘해지고 나무도 겨울을 나려고 준비하고 그 동안 모았던 양분으로 알찬 열매를 내놓기 시작한다.

 허나, 보자. 가을이 오고 있는 지금에 우리들은 얼마나 순리대로 제 할 일 하면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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