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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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화발 소리가 들린다. 신문기사를 통해서 일본은 요새 들어 점점 제국주의로 돌아가려고 하는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들을 수 있는 일본 관련 소식들이야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것들이지만ㅡ이것 역시 우리나라 언론 플레이에 녹아 있는 반일감정의 자극일 테지만ㅡ여하튼 그렇다.

 우리나라는 근래에 무궁화 5호를 발사했다. 기존의 무궁화 위성과 달리 이번 5호는 군사용 위성통신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사실상 일본은 통신용 위성을 쏘아 올릴 수는 있지만 군사용 위성은 미국의 눈치를 봐서라도 쏘아 올릴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비록 휴전 중이라고는 하나 전시 중인 국가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일본의 경우 전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책의 내용에서도 나오는 헌법 9조 때문에 그렇다.

 헌데 지금의 일본은 어떠한가. 단지 군사용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아예 군사적 무방비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자위대를 더 늘려야 한다니, 이지스함을 더욱 늘려야 한다니, 몇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경기침체와 더불어 우익단체의 과거에의 영광 회복이니 어쩌니 하는 것으로 시끌 시끌 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총리까지 바뀐 상황이다.

 어찌 소설로만 치부할 수 있으랴. 마왕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의 분위기는 지금 일본과 너무나 맞아 떨어져서 두렵기 까지 하다. 소설 속의 일본은 무료하면서도 무엇인가 변화와 궤를 달리하는 노선을 열망하는 한편 심리학에서 이르는 동조행동 혹은 확산효과를 타고서 집단의 광란 상태로 치닫고 있다.

 이런 혼란스러운 가운데 형제가 있다. 형 안도와 동생 준야. 이 둘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흘러가는 일본의 시국을 두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내용은 대략 그렇다. 형 안도는 복화술을 동생 준야는 확률에의 초능력을 가지게 된다. 어디서 어떻게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어느 날 그냥 그렇게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현실에서의 개인은 하나의 잡초와도 같다. 민중은 힘을 가질 수 있지만, 개인은 그저 무력한 개인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무력한 개인이 힘을 갖게 되었을 때 사회는 어떻게 변하는 가.

 위에서 말했듯 일본은 선거와 함께 자못 세기말의 색체를 띄고 있다. 우리나라가 한창 미선이 효순이 사건으로 반미주의가 확산되던 그 시기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개인이 아닌 집단 최면효과로 인해서 미국인이라면 누구든지 미워하고, 지나가던 푸른눈의 백인에게 눈을 흘기고. 일본의 계속된 경제침체와 함께 변혁을 꿈꾸는 정치의 새람이 불어 닥치고 그 한 가운데 정치가 이누카이가 있다.

 이야기는 셋의 아니, 개인과 체제 혹은 집단이라는 대결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얼핏보면 외롭고도 식상한 히어로의 개념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된 흐름은 우스꽝스럽고 어찌보면 기괴하기 까지 하다. 왜냐하면 슈퍼 히어로가 가진 능력은 고작 복화술과 1/10의 확률에의 승리이니까 말이다.

 앞서 말했듯 집단에 있어서의 종속은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개개인은 착하고 좋은 사람일지라도 여러명이 뭉치고 하나의 목표가 생기게 되면 사람은 얼마든지 잔인해 질 수 있다.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 보더라도 그런 예시는 10가지도 넘게 금방 들 수 있다.

 당신은 고개를 도리질 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전시 중의 특별한 상황에서나 나올 수 있는 일 아니냐고. 아니다. 아우슈비츠의 참혹함을 들지 않고서도 보여 줄 수 있는 예는 많다. 생활에서의 예를 들자면, 우리는 홈쇼핑 광고에서도 그런 집단 소속감의 안도감을 접할 수 있다. 몇 천개가 팔렸다. 혹은 집집 마다 이 물건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 중산층이라면 혹은 한국 사람이면 이 정도는 있어야 한다. 등등등. 이것들도 모두 집단에의 소속을 강요하는 홍보다. 알겠는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여기에 저기에 적을 두고, 그 안에서의 만족감을 위해서 금방 넘어가는 우매한 집단은 똑똑한 개인일 뿐이다.

 이런 가운데 집단의 최면에 걸리지 않도록 자신에게 '생각해, 생각해.'라는 주문을 거는 형 안도. 그는 복화술로서 파시즘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으로 이누카이를 나락으로 떨구려고 하지만 그것은 저지된다. 집단에서의 개인은 아무 힘이 없는, 초능력이 생겼을지라도 거대한 힘에 의해서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허나 그의 동생 준야는 다르다. 자신의 힘으로서 오로지 자신의 능력 하나로만 체제를 전복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형으로 부터 한 발 나아가 자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다른 거대한 체제를 만드려고 한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과연 누가 이길지, 개인이 함락되는 사회에서 개인이 창조한 또다른 체제로의 시작은 거창하지만 무섭기까지 하다.

 작가는 현시대의 불안정한 모습을 세기말로서 그려내고 또 다른 개인의 미천함을 초능력이라는 발상으로 전환 시켰지만 결말은 보여주지 않는다. 술술 넘어가는 재미있는 알레고리적인 이야기에서 무엇을 발견하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형과 동생이 꾸미는 신명나는 세계의 재미난 모헙을 생각하는 사람은 읽고 나서 좀 후회를 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고나서도 풀리지 않는 갈증을 풀어 놓는다. 왜 형과 동생은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하필이면 복화술과 내기 능력인지, 지배인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풀리지 않는 실마리들은 나로 하여금 내용에 끼워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차용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심각한 주제를 이런 식으로 표현 할 수도 있구나 감탄은 했으나 다 읽고 나서의 거북함은 큰 사건도 큰 갈등도 없고 곧 하나의 모순ㅡ체제의 전복을 체제로 시작한다는ㅡ에의 봉착으로 귀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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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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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마다 정신적인 멘토가 있다. 살면서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을 열어주고 도움을 주는 사람 말이다. 나에게도 그런 정신적인 멘토가 있다. 물론 살아 생전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는 죽어 있었고 나는 그의 책을 읽음으로서 그를 만났고 그의 사상을 흡수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사상에 감격했고 내가 세상을 살면서 절대로 지켜야 할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 말문을 연 것처럼 누구에게나 멘토가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만날 수 없는 사람이건 매일 만나는 사람이건, 유명한 철학자이건 초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이건. 멘토의 자격은 단순하다. 나의 신념과 방향을 일깨워준 사람. 바로 그가 멘토인 것이다.

 말했듯 나에게는 멘토가 있다. 유명한 수학자이자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했으며 사상가이자 100세 가까히 장수했던 사람이며 평화주의자며 반전주의자인 버트런트 러셀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우연히 러셀의 패러독스('크레타 사람 에피메니데스가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라는 유명한 패러독스)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그의 저서라기 보다는 서간집인 '러셀의 철학노트'라는 책을 읽게 되면서 부터 였다. 나는 그에게서 지식인의 소양을 느꼈고 지식의 방대함에 전율을 또한 그 명쾌한 대답에 놀라했다. 그리고 곧 그에게서 반전주의와 평화주의 그리고 탁상공론을 하는 지식인이 아닌 스스로 행동하는 지식인에 대해서 배웠다.

 그 책을 읽은 뒤로 거의 10년이 지났다. 나는 지금도 반전주의자 이고 평화주의자이다. 그리고 스스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물론 그 노력이라는 것이 아주 미미하긴 하지만)

 서론이 좀 길었다. 왜 이렇게 장황한 멘토에 대한 얘기를 했냐 하면 바로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 버트런트 러셀을 만났을 때의 바로 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바로 그 지식인을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제 2의 멘토가 될 사람을 만난 것이다.

 앞서 말했 듯이 나는 평화주의자다. 그리고 인권을 중시한다. 전쟁을 싫어하는 것에는 여러 중요한 이유가 있겠지만 거기에서 피해를 받고 처참하게 인권유린을 당하는 민간인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보통의 전쟁은 상위 몇프로의 인간들의 주도권 다툼 때문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민간인들이 낸 전쟁이 있었던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소수이지만 거기에 소모되는 인력과 피해보는 인력은 모두 우리 평범한 다수들이다.

 지금의 세상은 어떠한가. 간단하게 쿠바에 대해서 예를 들어 보자. 미국에는 이상한 이민법이 있다. 그 이민법은 오로지 쿠바인 그것도 불법으로 귀국한 쿠바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다. 쿠바의 법 제도를 피해서 밀항하는 사람들을 합법적인 미국시민권자로 탈바꿈 시켜주는 법이다. 거기에는 많은 사상과 통제 그리고 미국의 단호함이 숨겨져 있다.

 얼마나 오만한 법인가. 미국은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판단한다. 이른바 관용이 없다. 미국이 생각하기에 합법적인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불법이라도 상관이 없으며 다른 나라에서는 합법이라도 미국에서 불법이라면 그것은 곧 온 세계에서의 불법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버젓이 대놓고 다른 나라의 법을 무시한 채 당당하게 정면으로 반대의 법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런 미국의 오만함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가? 이 책을 보라. 아, 방금 쿠바에 대해서 예를 들었다고 해서 나를 빨갱이로 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이 책 보지 말라고 하고 싶다. 당신은 애초에 미국과 같이 다른 사람에 대한 수용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본론으로 더 들어가서, 제목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지금 이 순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본 신문에서의 편집장일 수도 있고 혹은 오후 9시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들일 수도 있고 혹은 당신이 지금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니터를 만드는 컴퓨터 회사의 사장일 수도 있고, 세계의 강대국의 대열에 우리도 들었다고 으스댔던 OECD일 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의 사상과 생활을 우리도 모르게 쥐고 흔들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어떻게? 간단하다. 우리는 그저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가가 기업가와 손을 잡고 세계 조직을 규합해 나가는 동안 언론사에서는 그것을 꽁꽁 막고 우리는 그저 할 일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나고 있는 모든 정보들은 진실인가? 아니,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은 모두 진실인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대신 터트려 주기 전까지는, 은밀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 까발리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사실 그 까발려진 진실이라는 것도 정보의 혼재에서 쉽게 묻히고 그냥 넘어가 버리기 일쑤다.

 이쯤되면 당신은 묻고 싶다.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진실이란 무엇이냐고, 혹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냐고. 물론 당신 너무 음모론자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나는 말하고 싶다. 당신이 알고 싶은 것들을 이 책에서 얻으라고. 그렇다면 이 책에 그런 진실이 다 담겨져 있냐고? 그것은 아니다. 이 책은 당신이 진실을 대하는 방법과 권력의 실체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줄 수 있는 자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내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 않는 버트런트 러셀에 대해서 노암 촘스키 역시 존경한다는 것을 알고 굉장히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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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반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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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빈 토플러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 유명한 '제 3의 물결'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미래학자로 손꼽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그의 15년 만의 미래에 대한 비전니 참으로 궁금하다.

 나는 사실 경제니 뭐니 모르는 사람이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탓도 있겠거니와 나아가서는 부의 흐름이나 이런 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큰 척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을 고쳐 먹었다. 상호복잡의 텍스트는 어려운 책에서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내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을 뿐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의 흐름 그 자체였다.

 저명한 카오스 이론을 알 것이다. 이른 바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일어난 나비의 날갯짓이 다른 곳에서는 태풍을 몰아올 수도 있다는 말로 대변되는 이론 말이다. 왜 갑자기 카오스 이론을 꺼내는가 하면, 그 작은 날갯짓을 영향을 받는 것은 민감한 환경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으로 태풍은 몰아치고 그 곳의 금전적인 피해는 또 다른 나라에서의 주식을 조장하고 그 주식의 폭락 혹은 폭등은 더 나아가 어쩌면 제 3 세계의 어린아이를 죽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이제 하나의 완벽한 유기체가 되었다. 하나의 사건이 생기면 그 파동이 1초 안에 수천만가지의 해일이 되서 개인을 덮친다. 우리는 세계의 반대편에서 있는 사람과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이상 낯설지 않다. 심지어는 이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1초 만에 퍼지는 파급뿐만이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그 많은 해일들은 또다른 이유가 되서 해일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런 해일이 격랑하는 세계에서 작은 판자에 의지한 채 표류하고 있다. 예전에는 국가라는 배 안에서 돛대를 잡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 배 마저도 이미 없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잡고 있는 판자는 무엇일까?

 바로 자신이 사유하고 있는 가상세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약이 심할지도 모르겠으나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본다면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가 세계의 온전한 해일을 맞고 있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통신과 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복합적인 국가적 사회적 변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한 인터넷으로의 항해를 해보라. 아니 이미 이 글을 보고 있는 순간부터 당신은 자신의 판자를 다른 이의 판자와 맞댄 것과 같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미니홈피니 블로그니 인터넷에 자신만의 공간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가 자신의 판자를 하나씩 쥐고있는 셈이다.

 왜 갑자기 가상의 공간에서의 1인 미디어를 말하는가 하면 이는 앨빈 토플러가 말한 미래, 즉 부의 미래에 있어서의 핵심인 심층기반과 그 기반을 서서히 잠식해 나가고 있으며 미래에는 점령하게 될 프로슈밍이라는 것이 그 1인 미디어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신만을 위한 행위, 예를 들면 미니홈피에 자신이 산 옷을 올리고 그 옷에 대한 감상평을 올린 달지 자신이 코디한 옷을 입은 사진을 올린 달지 하는 것들은 더이상 무의미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이른바 개인이 생산하고 개인이 소비하는 단순한 자기 만족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부의 가치 창출을 압도록으로 선도하고 있는 행위이다.   

 이는 처음에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저 옷 입은 사진을 올렸을 뿐인데 그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차츰 생기게 되고 후일에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자신이 입었던 옷은 유행이 되어 버리는 세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이버 경제는 처음에는 무시되었다가 이제는 웹쇼핑으로 하여금 집에서 편하게 물건을 받는 사회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어떤 기관이나 사업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닌 개개인의 창출이 빛을 발하는 것으로 탈바꿈되고 있다.

 이는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우리가 하는 블로깅 등에 대한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해주는 저자의 통찰력으로 하나의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보여지고 있다.

 사실 나는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을 보고 어떻게 잘 하면 주식투자나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허나 이제는 눈 앞에 거대한 시장이 널려진 느낌을 받고 있다. 이 방대한 유기체의 가판대에서 나는 앞에 흘러가는 판자를 짚고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더불어 이제는 아시아가 세계를 주도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는 저자의 앞에서 조금의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유는 그것이 허무맹랑해서가 아니다. 제 3의 물결이 나오고 이제는 나아가 부의 미래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세계의 뒷편에서 쓸쓸하게 이것을 목도하고 있을 제 3 세계, 특히 아프리카를 생각해서 그렇다. 평등과 화합의 세계를 바라는 것은 아직도 먼 후의 일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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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개
캐롤린 파크허스트 지음, 공경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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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가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는 그 죽음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멀고 점차 다가오는 이별이오 파국이기에 활기차고 아름다운 주말의 어느 날에는 그 죽음을 느낄 수 없다. 당신이 연인과 행복을 느끼고 있을 그 때 서늘하고 딱딱한 시체로 변한 연인을 상상할 수 없듯.

 만약에, 이것은 정말이지 슬픈 가정이지만 그녀가 죽는다고 가정해보자.

  초가을의 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대고 당신이 사랑하는 그녀의 스커트자락이 꽃잎처럼 퍼지고, 당신만을 향해 웃음짓는 그녀가 어서 오라고 저 앞에서 손짓을 한다. 하늘은 그저 푸르기만 하고 내일은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그렇게 세상이 끝날 그 날 까지 웃고 있을 것만 같은 그녀. 모처럼 영화를 보고 만족스럽게 팔짱을 끼고 시내를 거닐다가 멋진 음식점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는 길에 집 앞의 공원에 들러서 달콤한 입맞춤을 하고 사랑한다는 그 말을 나누고 품에서 꼬옥 안은 다음에 놓아주기는 싫지만 그래도 그래야하니까 보내주고. 대문 안으로 아쉽게도 쏙 들어가 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쓸쓸한 듯 바라보고. 혼자서 집으로 향하는 그 길에 아, 오늘 정말로 좋았어. 그녀는 하얀색 원피스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내일은 만나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하지만 내일이 되어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 내일은 무엇을 할까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집으로 가던 그 길에 그녀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면.

  아마도 당신은 그녀를 잃은 슬픔에 아무 것도 입에 못대고 그저 그녀만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와 함께 지내지 못한 내일이 아니 오늘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서 우리를 놔둔 채로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원망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후회로 남는 것은 어제도 만약에 오늘 이렇게 될 것을 어제 알고 좀 더 잘 대해 주었더라면, 오늘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어제 저녁에는 좀 더 맛있는 걸 사줄 것을. 오늘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녀가 투정했던 그 모든 것을 다 받아주었을 것을. 오늘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꼬옥 안아 주었을 것을. 오늘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여기에 한 남자가 있다. 아내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생의 행복한 그 때는 그저 보내고 있는 남자가. 허나 갑자기 아내는 죽어 버렸고 그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할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녀가 떨어져 죽었던 사과나무와 집과 그녀와 함께 키우던 개 한 마리. 그리고 흔적들.

 그리고 남자는 추적을 시작한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녀가 남긴 모든 것을 헤집고 또 그녀와 함께 보냈던 그 시간들을 헤집고. 그리고 그녀가 죽을 때 남겨져 있었던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을 개에게 말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개가 본 것을 내가 알 수만 있다면. 그녀가 왜 죽었는지 내가 알 수만 있다면.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무엇이었는지, 그녀가 죽을 때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으리라. 추석의 편린들 더미에서 하나씩 찾아 낸 그녀와 그의 결말들을. 단지 내일이면, 내일 모레면 하고 남겨두고 또 남겨두었던 것들이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덮어지고 말았을 뿐인 것을.

 오늘 알았던 것을 어제도 알았었더라면.

 이 이중적이고도 아쉬운 후회의 점철 속에서 그는 이미 그녀의 죽음 뒤로 사실은 어제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추억으로의 여행길과 개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그 부질없는 시간들의 틈 속에서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되돌리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로 그는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듣지 않으면 나는 말할 수 없어요.

 그녀가 계속해서 몸으로 마음으로 외치고 있었던 것들을 사실은 그가 듣지 않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그냥 넘기고 말았던 그 수많은 언어의 물결 속에서 그는 표류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말을 가르쳐서 개에게 듣고 싶었던 말들을 하나 둘씩 자신이 알아가게 되면서 그는 삶에 대한 추억에 대한 그 아름답고도 찰라였던 순간들을 되새긴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극도로 갑작스러운 이별에 대해서 준비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슴 한 쪽이 어릿해지는 그 통증을, 내가 왜 좀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하는 그 후회를 지나기 마련이다. 사람은 그저 사람이기에 내일 일어나는 일도, 하물며 1분 뒤에 일어나는 일도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고 떠올리면, 죽음까지는 아니겠지만 그 과정이 있기 까지의 여정과 작은 표시들을 당신은 알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시키고 체념하는 가는 당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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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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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묻는다. "너는 다시 태어나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어?"

 나는 대답한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어."

 또다시 묻는다. "왜? 너는 이 나라에 불만이 많았잖아."

나는 대답한다. "어디서든 다시 태어나도 상관없을 것 같아. 그런데 기왕이면, 익숙한 곳에서 태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새 몸이라서 전에 것은 기억 못할지라도 말이야."

 당신은 다시 태어난다면 어디에서 태어나고 싶은가? 너무 고민하지 마시라. 이 책을 읽고나면 '쳇, 나라 따위' 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스기하라는 재일 한국인이다. 재일 한국인, 일본에서는 차별의 대상이며 발버둥쳐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그런 족속. 그런 곳에서 자란 스기하라.

 아버지는 갑자기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꾸고 스기하라에게 물음을 던진다. 너는 어찌 할테냐. 스기하라는 그것 따위 아무런 필요도 없지만 여하튼 홀린 듯 국적을 바꾼다. 하지만 국적은 국적일 분 그의 성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국적을 바꾸고 일본인 고등학교로 진학한 그, 한 발짝 앞으로 세상에 발을 내밀었지만 누구하나 맞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정체불명의 한 여인이 등장한다. 남자는 너무나 외국인 같고, 여자는 너무나 일본인 같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는 만났다.

여전히 세상은 차갑고, 스기하라는 싸우고 있지만 바뀌는 것은 없다. 그래서 스기하라는 더욱 힘을 내서 싸운다.

 스기하라는 점점 더 세상으로 걸어들어 간다. 누구도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스기하라가 아니다. 스기하라와 반대편에 있는 규정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스기하라는 외친다

"GO!"

앞으로 나가라고.

그의 말대로 우리는 좀 더 앞으로 나가야 한다. 내뻗은 손의 반경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그 작은 원의 바깥으로 점점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말 그대로 스기하라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건너편에서는 종교가 달라서 민족을 죽이고, 사상이 달라서 몸이 말라간다. 과연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차별은 단순한 국적에 대한 차별일까.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상에 널려진 온갖 편견들에 대한 질타다.

 세상은 점점 진화할 것이고, 그 앞에는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는다. 다 함께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나갈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눈 밖에 나지않고 같은 자리에서 같이 서 있을 것이다. 

 어떤 노래가 생각난다. 88올림픽에서 사람들이 주구장창 불러재꼈던 노래, '손에 손잡고' 손에 손을 잡고 벽을 넘어가자던 그 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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