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인간 1 - 북극성
조안 스파르 지음, 임미경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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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의 오묘한 경계

 밖에는 페라리가 도로를 질주하고 머나먼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었으며 또 어느 한 곳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죽고 죽이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현자를 찾고 랍비를 찾아 은혜를 구했지만 진리는 손에서 벗어나 막다른 곳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한 귀퉁이에 '나무인간'이 살고 있었다.

 그를 나무인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나무이며 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무인간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우리가 지금부터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이 세계의 이면 그 가운데에 서있다.

 나무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와 멀지 않다. 하지만 그 세계, 심상치 않은 곳이다.

 북극성이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이라고 말을 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왜냐하면 인공위성이 더 밝고 더 크고 예쁘고, 마지막으로 별처럼 보이니까. 헌데 사실은 아니었단다. 북극성은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성의 꼭대기에 매달린 별이었다. 게다가 지구는 자전을 하고 있지만 지구를 지키고 또한 그 중심에 서서 축을 하는 나무도 있다. 그 나무는 너무도 커서 꼭대기 까지 올랐다가 내려오는데 일주일도 넘게 걸리고 꼭대기는 별이 떠 있는 곳보다도 높다. 땅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땅의 요정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조심해라, 그 녀석 성격이 좋지 않다- 위험할 때 우리 할머니처럼 나를 돌봐주는 할머니 요정들을 볼 수도 있다.-나체이니 조심!-불의 요정들과 괴수들 그리고 송곳같이 찌를 듯한 추위를 간직한 북극에 요정의 성도 있다.

 잠시만, 헌데 이런 세계들이 멀지 않다고? 그렇다. 그 세계는 멀지 않다. 우리가 신경쓰지 않고 단지 무관심 했을 뿐 그 세계는 우리의 코 앞에 있다.

 최첨단의 과학의 시대를  걷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 할 것이다. 그렇게 높은 나무가 있었다면 위성에서 안 잡혔을리 없고, 기네스 북에 안 올랐을리 없다. 북극성이 하늘에 떠 있지 않다면 누구든 북극성을 만져 보았다는 사람도 있을 거다. 게다가 요정이 있다면 산에 사는 산지기가 한 번쯤 조우했다는 신문기사가 떴을 만도 한데 어째서 소식이 없는가. 게다가 가장 큰 것. 나무가 걷고 말을 하고 책을 읽고 계란 프라이를 먹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아,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 세계는 정말로 우리 앞에 있으니까. 참으로 들으면 들을 수록 기괴하다. 그렇다면 왜 그 세계를 이제껏 볼 수 없었는지 그것이 이제 더욱 궁금해진다. 나무인간이 어째서 걷고 말하고 있는데 알 수 없었을까.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느끼고 반문 할 때가 있다. 자꾸만 의심하고 캐내고 캐내고 캐내는 그 순간 우리는 그 회의하는 존재 자체가 있다고 느낀다. 어째서 갑자기 실존주의 철학이 튀어 나왔을까. 왜냐하면 이 세계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우리가 이미 그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환상과 실제가 혼돈하는 세계에 대한 존재를 의심할까. 너무나 믿음직한 이야기라서? 아니다. 나무인간이 회의하고 또 겪는 일은 정말이지 현실 같으니까. 현상 자체가 환상일지라도 패턴에 있어서 현실과 같다는 것만으로 그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결과는 원점으로. 그럼 말을 조금 바꿔보자. 그 세계가 우리 눈 앞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세계가 실은 우리 세계다. 요정에 대해서도 나무인간에 대해서도 북극성에 대해서도 묻지 말고 다시 차분하게 들어가 보자. 그 안에 공존하는 산물들이 눈 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닮은 것에 대해서 우리는 놀랐고 또한 캐릭터의 충실함에 놀랐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치환.

 알레고리. 나무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는 알레고리로 우리 세계의 거울의 이면과도 같은 실은 반사경이다. 물론 그것이 생경하다 할지라도. 그러니까 곧 그 세계는 다른 세계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같은 세계다. 나무인간이 누군가와 닮았다, 요정이 누군가와 닮았다, 나무가 무언가와 닮았다. 닮았다. 자세히 떠올려 보면 이 이질감 안에 담겨진 미묘한 동질감의 고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무엇들과 닮았다.

 작가는 완벽한 현실과 환상과의 미묘한 경계를 매우면서 우리에게 두 가지 세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알레고리와 아이러니로 점철된 이 세계를 다른 모습으로 보여준다. 매끄러운 그의 세계 창조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물론 허울치고는 너무나 능숙하다.

 그러면 그 반사경에 비친 낯설고도 익숙한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간단하다. 우리는 주전부리 옆에 끼고 책장을 넘기면서 그 세계를 음미하면 된다. 별세계를 보는 듯이 말이다. 사실은 이런 것이었군, 그래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몰라 하면서 무릎을 탁! 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너무나 빠지지는 마라, 그 세계의 요정은 있지만 영웅은 없고, 사랑은 있지만 진실은 없는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고 한탄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무릎을 또 탁! 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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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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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에 홀로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당연하게 보고 또 지나치는 것. 바로 그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풍경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그토록 무덤덤하게 사람을 관조할 수 있을까, 마치 풍경 보듯이 하나의 연민도 동경도 없이 볼 수 있을까. 나는 궁금했다.

 하지만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에 나는 내가 상상했던 그 사람풍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여행기에 있어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그냥 관조하는 자세에서 본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내가 흠뻑 빠지고 취하고 또한 함께 되어 이루어진 풍경이었다. 마치 한여름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눈을 감고 스르륵 자연 속으로 빠져 버리는 그런 풍경.

 이 책은 간단하게 말하면 정신분석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감정들에 대해서 간단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정신분석학이라 함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로 부터 시작해서 칼 융, 자크 라캉,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등 많은 유명 학자들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우리의 실생활에서 멀리 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내향, 외향 혹은 컴플렉스 등의 용어들은 사실 정신분석학의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용어들 중에 하나니까 말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책을 시작할 때 거부감 보다는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수 많은 인파들이 지니고 있고 어제도 내가 고민 했던 수만 갈래 심연의 늪은 많이 파해치고 또 파해친다고 해서 쉽게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편 우리가 정신분석학의 기본 요체를 배우게 됨으로 해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한 지식으로 밖에 치부할 수 있나. 바로 이 점에 포인트를 맞추면 얼추 이 책에 대한 감이 번듯해진다.

 직접 발로 움직이고 또한 깊이 느낀 것들은 단순 지식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접목 시키고 쉽게 해설 해준다는 점에 있어 <사람풍경>은 우리에게 지식과 경험에 미루어 비추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얻게 해준다. 실로 막강한 힘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해서 무의식의 발현을 분류하고 가두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고 이야기 상 불필요한 부분도 있었기에 그들의 면면에 대해서 깊이 성찰했던 부분을 쓰지 못했지도 모르겠다. 허나, 나는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보건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접목하는 것은 분명히 사고적인 측면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규정화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심리학적 수학을 한 사람은 그 쪽 시각으로 풀어 가려고 하고 인문학적 수학을 한 사람은 그 쪽 시각으로 풀어 가려고 하는 이른바 각각의 지식의 범위 내에서 사고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좋은 이야기와 쉬운 해설 속에서 사람을 볼 수 있는 방법이 꼭 심리학적인 측면 만을 강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요컨데 심리학은 인간의 무의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굉장히 성과가 있는 학문일지는 모르나 개개인의 사람을 설명하기에는 턱 없이 모자르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 있어 <사람풍경>은 단순히 여행지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면면을 그저 설명하기 위해서 끌어들이는 나열식의 채택이 아니었나 싶다. 소주제에 대한 설명을 위한 예시들은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기 전에 꼭 한 번 생각해봐야할 것이 있다. 과연 우리는 심리학에 대해서 배워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에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없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이는 또한 무슨 감정을 느낄 때에 이것은 구강기의 혹은 항문기의 단절이니 거세공포증이니 이런 식의 설명 밖에 하지 못하고 단순 지식의 접목에 그쳐버릴 수도 있어 두렵다. 인간의 무의식의 발현에 의한 병리적 성격을 구분하는데에 있어서는 분명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허나 나는 상기했듯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타인을 보는 시각에서 심리학에 의존하고 또한 분류하는 것은 피해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은 사람을 위해서 쓰여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전시적인 느낌이 드는 풍경이 아닌 약동하는 풍경이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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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제국 - 개정판
이인화 지음 / 세계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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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이제 없다. 영원한 제국을 꿈꾸면서 수 없는 고뇌의 시간을 보냈을 사람들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서 있을 뿐이고 우리는 종종 책에서나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던가. 과거 우리 선조의 나라는 이제 조용히 책 속에서 우리는 응시하고 있을 뿐이지만 현재는 과거를 기반으로 아니, 과거들이 모여서 되는 것이기에 우리의 응시는 단순한 관조가 아닌 배우고 또한 그를 밝고 서려는 치열함이 담긴 응시이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고 그 안의 파란만장함을 볼 때면 내 안에는 치밀어 오르는 것이 항상 있었다.

 그 치밀어 오르는 것은 암투에 대한 미혹도 있겠지만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의 험난한 질곡에 대한 감상이라도 할 수 있겠다. 아, 이런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정조는 성군이었다. 타고난 제왕이었다. 그는 이상이 있었고 그 이상을 실천하는 추진력도 가지고 있었다. 단호하게 침묵했으며 무섭게 치밀했다. 이상, 영원한 제국을 세우기 위한 그의 꿈은 차근차근 그 수순을 밟고 있었다. 허나 그런 그가 비극적인 생애를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 상 지금 국회의 고위 관료가 하는 것과 같은 붕당정치 때문이었다.

 정당이란 모름지기 정권을 잡는데 그 목표가 있다. 보수니 개혁이니 자신들의 정치 이념에 맞추어서 나라를 다스리기 원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권을 잡는 것이 최선의 길인 것이다. 분당이나 정당이나 이런 면에 있어서는 같다. 지금이야 대선에서 패했다고 해도 목숨이 달아나지는 않지만 조선시대의 정권 변화는 피바람의 시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론 벽파의 처절한 이면 아래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애달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애달음은 결국 금등지사를 놓고 벌이는 온갖 권모술수로 변화했다. 권력의 암투 이면에는 대립과 갈등 그리고 인간 본연의 소유욕과 생존 또한 미래를 보는 서로 다른 시각들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이인몽은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한없이 휩쓸려만 가는 약한 사람이었다. 물론 기개와 우국지정은 있었으나 그는 허약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고 곧 그는 풍전등화와도 같은 정조를 바라보는 민초와도 같은 시각을 가진 사내였다.

 그의 시각으로 그려진 조선은 붕당정치는 이미 민초를 위한 정치가 아닌 정치를 위한 정치로 변질되었고, 오로지 철벽과도 같은 정조만이 그 안에서 분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민초의 시각을 가진 이인몽이 어찌 정조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는 붕당정치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태생이나 과거를 보아서도 비주류의 사람이었으며 방관자적인 입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축이 누구를 비난하지도 추켜세우지도 않는 중립자적인 입장에서 쓰여지고 있다.

 물론 3인칭 전지자적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이기에 소설 안의 작가는 아무 때나 들어와서 이야기의 후일까지 조근조근 이야기 해주지만 그것은 긴 시각으로 보았을 때의 역사적인 위치를 알려주는 구실일 뿐이다. 그래서 남인이 좋았다, 노론이 좋았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고스란히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장치는 아주 좋았다.

 금등지사라는 초유의 비밀을 둘러싼 그들의 암투는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준다. 예기했듯 붕당정치와 지금의 정치가 같다면 그들의 벌이는 싸움 역시 같다라는 것은 당연한 추측이다. 허나 정조라는 성군은 지금 우리에게는 없다. 물론 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해서 그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할지 모르겠으나, 그처럼 올바르고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진 이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같은 정치와 같은 민초가 있되 그 앞을 밝혀줄 사람이 없다는 것. 이는 지금 우리의 삶은 한층 더 힘들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아주 슬프지는 않다. 한편으로 이인몽이 '예, 예.' 하고 외치고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떠올렸던 바로 그 정조가 딱 한사람의 선지자라고 볼 수만은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태생의 귀천이 없듯이 우리 또한 정조와 같은 단 하나의 인물을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나아가 내 자신이 그 등불이 되고 또한 앞을 헤쳐나갈 수도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하라고 우리는 배우고 익히며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을 살찌우게 하고 이인몽이 빠져들었던 것처럼 책 속에 있지 않을까.

 입을 떼면서 들먹였던 우리의 응시는 미래의 정조가 되기 위한 자신의 시경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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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za 2008-03-06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원한 제국은 '인간의 길'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흔히 이 소설을 읽으며 영조, 정조의 세계에서 끝난다면 우리의 지식은 한심할 뿐이죠. 님의 이 소설을 읽으며 했던 통찰이 그래서 멋있게 느껴지네요. '정조와 같은 단 하나의 인물을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 이 말만큼 중요한 말도 없을 거 같아요. 좋은 서평 감사하고 앞으로도 그 내면까지도 꿰뚫을 수 있는 서평들 부탁 드려요.
 
길리아드 - 에임스 목사의 마지막 편지
마릴린 로빈슨 지음, 공경희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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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 로미오와 줄리엇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어쩌면 아련하고 아름답기 까지 하지만 실제로도 그렇까. 남겨하 할 것들과 남긴 것들 사이에서 끝내 숨을 멈춘다는 것은 비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죽는다 라는 가정을 해볼까. 비로소 우리는 그 비극의 실체와 대면할 수 있다. 그것은 상실감이다. 익숙하고 또 다정했던 사람이 영원히 내 곁에서 없어진다는 것은 비극, 그래 그 이상이다.

 목사는 자신이 죽음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자신에게는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다. 시쳇말로 눈이 감아지지 않을 상황인 것이다. 그런 그가 남겨질 사람들에게 남겨줄 것을 쓰기 시작했다. 막대한 유산도 아니오 수백 번 했던 설교문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이자 진실이 담긴 조언이었다.

 살아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것을 알기에 그저 묵묵히 편지를 쓸 뿐인 것이다. 상기했득 편지 않에는 할아버지, 아버지, 자신, 부인, 친구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가족의 역사이자 어쩌면 시대에 따라 변모하고 심지어는 몰락했던 미국의 가슴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아들을 위한 편지라고는 하지만 그 무게나 애용으로 보아서 목사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을 정리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담담함과 아련함은 눈물을 빼게 하려는 것도 아니오 감동과 족보와도 같은 정보를 주기 위함도 아니다. 이미 관조하고 서서히 저물어가는 황혼의 오박빛을 즐길 수 있는 자의 것이다. 남은 자를 위한 순수한 마음이다.

 햇빛을 받은 찰랑거리는 머리와 제 어미를 닮은 진지한 눈빛을 가진 이 아이와 함께 알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그는 그럴 수 밖에 없었으리라. 유언도 편지도 아닌 듯한 이 장문의 글은 여타 마지막을 앞둔 사람들의 처절함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슬펐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내가 그의 나이에 이르러 어린 자식을 둔 사람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세상에는 이해하고 타협해야 할 것이 많음을,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많은 가족들이 있음을, 그들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또한 너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 것 임을 이토록 담담하게 쓸 수 있을까.

 아이는 먼 미래에 또한 편지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남긴 것들을 보면서 남겨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은 아닐런지.

 늦가을의 매서운 바람에 낙엽들이 무자비하게 떨어지는 이 계절에 이토록 아름답고도 잔잔하게 떨어지는 생을 읽는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가을을 생각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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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과 - 벌레 먹은 과일을 황금사과로 만드는 9가지 자기혁신 법칙
캐시 애론슨 지음, 김미경 옮김 / 명진출판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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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녀는 가게를 열고 자신의 세계를 펼쳤다. 그리고 그 결과 커서는 소위 말하는 입신양명을 했다. 그리고 고대로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는 모자르다 생각을 했는지 다른 이의 경험담이며 커서의 응용법까지 상세히 저술을 했다. 첫부분만 읽고는 조금은 쉽구나 아니면 단순하구나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실제로 수 많은 강연을 통해서 이와 같은 방법을 알리고 또한 효과를 보았다 하니 이 얼마나 또 믿음이 가는가. 그러면 책 속의 내용으로 조금 들어가 볼까나.

 
 삶은 대체로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방향을 틀곤한다. 잠시 눈길을 두었다 거둔 것이 평생을 곤혹스럽게 할 수도 있고, 작은 것 하나에 신경을 썼다가 그것이 성공하게 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나오는 어떤 소녀는 못생긴 과일에게서 그 열쇠를 찾아냈다. 그 열쇠란 것은 마냥 모든 상자가 열리는 그런 만능열쇠가 아니다. 그 열쇠는 작은 것에서 부터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는 모티브를 만들어 내는 열쇠다. 물론 그 열쇠가 궁금하다. 그 열쇠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서두에 있어서 우리는 능히 짐작한다. 아하! 무엇이든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다. 어떤 사람은 한가지 사물에서 단편적인 것만을 얻어가고 어떤 사람은 한가지 사물에서 여러가지 것들을 얻어가기도 한다. 우리는 일단 관찰력을 끌어올리고 물건을 봐야한다. 그리고 그 다음이 우리는 이 물건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시가 "It's a Girl"을 보냄으로서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어필하고 주목하게 만드는 것을 생각했겠는가. 활용이 더욱 중요하다. 발견은 첫 걸음이오, 활용은 두 걸음이니. 마지막으로는 그것들을 계속해서 활용해 나가는 노력이 바로 화룡점정 그러니 세 걸음이라 하겠다. 
 
 자신을 알리고, 누군가를 설득하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단순한 비지니스 세계에서만 통용될까. 조금은 비틀어서 짝사랑하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비법들일 것이다. 자신을 알리고 사람의 마음을 돌리고 내 사람으로 만들고. 모두 우리가 흔히 앓고 흔히 하는 모든 삶에서도 쓸모가 있을거라 이 말이다. 비지니스니 사랑이니 나는 다 중요치 않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 하는 사람은 그럼 더더욱 보라. 자신의 가치를 한 단계 끌어 올릴 만한 방법들도 있으니 말이다.
 
 자기 혁신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황금사과를 발견하라. 두 번째, 그 황금사과의 가치를 더욱 키워라. 세 번째, 더 큰 열매를 수확해라.
이렇게 보면 감이 안 잡힐 것이다. 그래서 서두에 말했던 책에서 나오는 자세한 인용과 더불어 경험담을 읽으면서 보면 아아, 하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못생긴 과일이었지만 소녀에게는 세상을 열어줄 예쁜 선물로 보였던 그 사과를, 다른 이에게는 그저 황금 사과이었지만 파리스에게는 아프로디테를 얻는 사랑의 선물로 보였던 그 사과를, 다른 이에게는 그저 떨어지는 사과였겠지만 뉴턴에게는 과학척 법칙을 깨닫는 선물로 보였던 그 사과를.
 이 책을 보면서 당신도 당신의 사과를 찾기 바란다. 반짝거리고 아름다운 그 사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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