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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인간 1 - 북극성
조안 스파르 지음, 임미경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환상과 현실의 오묘한 경계
밖에는 페라리가 도로를 질주하고 머나먼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었으며 또 어느 한 곳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죽고 죽이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현자를 찾고 랍비를 찾아 은혜를 구했지만 진리는 손에서 벗어나 막다른 곳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한 귀퉁이에 '나무인간'이 살고 있었다.
그를 나무인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나무이며 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무인간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우리가 지금부터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이 세계의 이면 그 가운데에 서있다.
나무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와 멀지 않다. 하지만 그 세계, 심상치 않은 곳이다.
북극성이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이라고 말을 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왜냐하면 인공위성이 더 밝고 더 크고 예쁘고, 마지막으로 별처럼 보이니까. 헌데 사실은 아니었단다. 북극성은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성의 꼭대기에 매달린 별이었다. 게다가 지구는 자전을 하고 있지만 지구를 지키고 또한 그 중심에 서서 축을 하는 나무도 있다. 그 나무는 너무도 커서 꼭대기 까지 올랐다가 내려오는데 일주일도 넘게 걸리고 꼭대기는 별이 떠 있는 곳보다도 높다. 땅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땅의 요정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조심해라, 그 녀석 성격이 좋지 않다- 위험할 때 우리 할머니처럼 나를 돌봐주는 할머니 요정들을 볼 수도 있다.-나체이니 조심!-불의 요정들과 괴수들 그리고 송곳같이 찌를 듯한 추위를 간직한 북극에 요정의 성도 있다.
잠시만, 헌데 이런 세계들이 멀지 않다고? 그렇다. 그 세계는 멀지 않다. 우리가 신경쓰지 않고 단지 무관심 했을 뿐 그 세계는 우리의 코 앞에 있다.
최첨단의 과학의 시대를 걷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 할 것이다. 그렇게 높은 나무가 있었다면 위성에서 안 잡혔을리 없고, 기네스 북에 안 올랐을리 없다. 북극성이 하늘에 떠 있지 않다면 누구든 북극성을 만져 보았다는 사람도 있을 거다. 게다가 요정이 있다면 산에 사는 산지기가 한 번쯤 조우했다는 신문기사가 떴을 만도 한데 어째서 소식이 없는가. 게다가 가장 큰 것. 나무가 걷고 말을 하고 책을 읽고 계란 프라이를 먹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아,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 세계는 정말로 우리 앞에 있으니까. 참으로 들으면 들을 수록 기괴하다. 그렇다면 왜 그 세계를 이제껏 볼 수 없었는지 그것이 이제 더욱 궁금해진다. 나무인간이 어째서 걷고 말하고 있는데 알 수 없었을까.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느끼고 반문 할 때가 있다. 자꾸만 의심하고 캐내고 캐내고 캐내는 그 순간 우리는 그 회의하는 존재 자체가 있다고 느낀다. 어째서 갑자기 실존주의 철학이 튀어 나왔을까. 왜냐하면 이 세계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우리가 이미 그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환상과 실제가 혼돈하는 세계에 대한 존재를 의심할까. 너무나 믿음직한 이야기라서? 아니다. 나무인간이 회의하고 또 겪는 일은 정말이지 현실 같으니까. 현상 자체가 환상일지라도 패턴에 있어서 현실과 같다는 것만으로 그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결과는 원점으로. 그럼 말을 조금 바꿔보자. 그 세계가 우리 눈 앞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세계가 실은 우리 세계다. 요정에 대해서도 나무인간에 대해서도 북극성에 대해서도 묻지 말고 다시 차분하게 들어가 보자. 그 안에 공존하는 산물들이 눈 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닮은 것에 대해서 우리는 놀랐고 또한 캐릭터의 충실함에 놀랐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치환.
알레고리. 나무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는 알레고리로 우리 세계의 거울의 이면과도 같은 실은 반사경이다. 물론 그것이 생경하다 할지라도. 그러니까 곧 그 세계는 다른 세계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같은 세계다. 나무인간이 누군가와 닮았다, 요정이 누군가와 닮았다, 나무가 무언가와 닮았다. 닮았다. 자세히 떠올려 보면 이 이질감 안에 담겨진 미묘한 동질감의 고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무엇들과 닮았다.
작가는 완벽한 현실과 환상과의 미묘한 경계를 매우면서 우리에게 두 가지 세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알레고리와 아이러니로 점철된 이 세계를 다른 모습으로 보여준다. 매끄러운 그의 세계 창조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물론 허울치고는 너무나 능숙하다.
그러면 그 반사경에 비친 낯설고도 익숙한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간단하다. 우리는 주전부리 옆에 끼고 책장을 넘기면서 그 세계를 음미하면 된다. 별세계를 보는 듯이 말이다. 사실은 이런 것이었군, 그래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몰라 하면서 무릎을 탁! 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너무나 빠지지는 마라, 그 세계의 요정은 있지만 영웅은 없고, 사랑은 있지만 진실은 없는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고 한탄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무릎을 또 탁! 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