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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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소개하기에 앞서.

 오만과 편견은 제인 오스틴의 처녀작으로 영국에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던 작품이다. 오만에 빠진 남자와 편견을 가진 여자의 대립구도를 바탕으로 해서 이 둘의 사랑 이야기와 여자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런 오만과 편견은 캐릭터만이 오만하고 편견을 지닌 것이 아니다. 글을 써내려간 제인 오스터 역시 오만과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1. 캐릭터의 향연 - 오만.

 여성작가 특유의 섬세함으로 19세기의 결혼과 풍습을 작품 안에서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작품은 특히 개릭터의 면면이 독특하고도 탁월하게 녹아있다. 극 중 주인공인 엘리자베스의 가족들은 아버지를 제외한 여자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각기 다른 스타일과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어서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한 캐릭터 표현이 되어 있다. 허영심이 강한 어머니와 장교들을 따라다니는 속 없는 두 여동생, 그리고 잘난체 하기 좋아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독서에 몰두하는 여동생, 아름답고 강하며 모든 사람을 편견없이 바라보는 언니,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관심 밖으로 돌리고 서재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아버지. 이 가운데 엘리자베스는 특유의 지성과 날카로운 언변 그리고 유머와 재치를 가지고 있는 여성으로 표현된다. 또한 언니와 사랑에 빠지는 빙리씨는 우유부단하고 매너있는 미남자며 그의 여동생은 시기심이 강하고 남을 폄하하는 못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외의 위컴이라는 장교의 이중적인 성격까지,  대략적으로 15명이 넘는 수 많은 캐릭터는 각기 개성이 넘쳐 마치 작가의 품에서 떠난 이미 살아 있는 인물들이라 할만하다.

 물론 게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주인공 남여인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둘의 성격을 표현하는 간단한 단어, 오만과 편견은 이미 알다시피 작품의 제목이자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축이기도 하다. 부유한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얼굴까지 잘난 다아시는 오만하다. 친분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예법을 무시하고서라도 대화도 춤도 심지어 인사도 나누지 않는다. 이러한 오만에 찬 다아시를 보는 순간부터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에 대한 편견을 지니게 된다. 그는 사람을 무시하고 제멋대로이며 누구도 깔보는 듯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이 둘의 성격은 서로에게 매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가갈 수 없으며 금새 허물어 지지 않는 공고한 장애물이다. 둘의 단점이 빛을 발하고 오해와 사건을 거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은 결말의 해피엔딩에서 풀어진다.

 이 둘은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아갔던 귀족 남자와 평범한 여자 사이의 신분적 계층과 물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지표라고도 할만 한데 이러한 케릭터의 개성은 고스란히 배경이 되는 영국의 지방도시에 흡수된다. 전쟁으로 항상 장교들이 주둔하고 여성의 지위 상승은 결혼이며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는 당시 생활상을 설명이 아닌 캐릭터의 행동에서 보여준다고나 할까. 특히 엘리자베스의 가족들이 모여서 나누는 대화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당시 여성과 결혼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들어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호인이라고 볼 수 없는 가족들이지만 가족이기에 옹호할 수 밖에 없는 엘리자베스의 감정은 새삼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 봤을 법한 것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또한 살아 있는 듯 춤추게 만들었던 제인 오스틴. 그녀는 그녀 자신이 사람을 창조할 수도 있다는 오만을 지녔다는 것을 알기는 알고 있었을까? 허나 적어도 우리는 그녀의 오만함에서 감사를 느끼고 멋진 캐릭터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그녀의 오만함에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이다.

2. 로맨스와 명작의 갈림길 그리고 여성의 위치 - 편견

 어쩌면 이 소설은 한마디로 '로맨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평범한 가정의 미녀 엘리자베스가 작위를 지닌 부유한 귀족 다아시와 결혼을 하는 것은 신데렐라 컴플렉스의 전형이다. 결혼으로 엘리자베스는 진정한 사랑을 찾고 동시에 자신이 지녔던 편견을 부수고 신분상승을 한다는 것은 책방에서 흔히 빌려보는 로맨스 소설의 전형인 것이다. 특히 둘의 사랑 싸움은 그 극치를 이룬다. 성격 탓이라 하여도 작은 것으로 다투고 오해하고 갈등하다 진실이 드러나고 악인은 처단 당하는 플롯은 식상하기 까지 하다. 이러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을 어째서 우리는 명작이라 여기고 추앙하는가.

 이는 이 작품이 지금의 로맨스 소설이 나오기 이전에 아니, 로맨스 소설의 기초가 되는 갈등과 대립 그리고 캐릭터의 성을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특히 다아시의 캐릭터는 로맨스 소설의 다수의 주인공 모델이 되었고 플롯의 구조는 로맨틱 코메디의 단골로 자리 잡았다. 100년도 더 된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오만과 편견이 나오기 이전과 나온 후를 비교해보자면 이 소설 하나로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못해 막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끼친 영향이 크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타당하다고 무조건 옹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독립적인 여성인 엘리자베스의 성격은 결국에 남자인 다아시의 도움으로 해피엔딩을 맞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의 위치를 감안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많은 여성이 꿈꾸는 멋진 여성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남자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모순을 지닌 채로 끝나 버린다. 이는 과정에서의 독립적인 성격을 허무로 만드는 결말이기도 하다. 여태껏 여성으로서의 엘리자베스를 추앙했다가 결국 그녀도 한 여성일 뿐이라는 귀착은 현대 여성이 지닌 중매 열풍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지위와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오로지에 그에 따른 지위상승을 꿈꾸는 여성들은 항상 있어왔다. 고대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여성의 위치란 결국 결혼하면서 남자에게 보호받고 귀의하는 존재로 그려지곤 한다. 힘있는 남자와 미녀의 만남은 이제 식상하기도 하다. 어느 날 신데렐라로 변신해서 남성의 도움을 받고 난관에서 벗어난다는 고전을 답습하고 마는 행태를 오만과 편견이 과정의 순응을 살짝 거부하고 돌아가게 만드는 것으로 바꾸었을 뿐 결말을 같이 하며 더욱 수동적 여성상을 공고히 하는 치밀함을 보일 뿐인 것이다. 이렇게 모순으로 마치고 만다는 점에서 고전이기는 하나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부추겼다는 죄목을 피할 수는 없어 보인다.   

 편견. 관대한 척 공평무사한 척 하지만 결국 가슴 속에는 남도 모르게 편견을 지니고 대하고 마는 이러한 모순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편견을 제인 오스틴 역시 가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를 아꼈다는 제인 오스틴은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편견에 사로잡힌 여자이기도 한 것이다.

3. 오만과 편견, 그 이름으로.

 오만과 편견을 지나서 행복의 세계로 진입하는 남녀의 이야기는 이렇게 장점도 단점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오래된 이야기가 지금에 와서도 이토록 사랑받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무게가 주는 녹록함을 떠나서 21살의 나이로 치밀한 장편을 써내려간 작가의 재능을 엿볼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100년도 더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결국 동의를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등장하는 캐릭터는 현실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며 남녀 간의 오해와 갈등은 여느 연인들이 하는 사랑다툼이다. 포장하지 않고 진솔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비수를 꽂듯 차갑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온전히 세기가 바뀐 마당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함꼐 감흥을 즐길 수 있는 힘. 그 힘을 품은 것이 바로 오만과 편견인 것이다.

 때로는 오만하게 때로는 편견으로 무장한 소설과 작가의 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가는가. 폄하할 수도 그렇다고 무조건 숭배만 할 수도 없는 갖가지의 소용돌이에서 무엇을 건져내는가 하는 것은 독자에 달렸다. 하지만 독자들이 건져내는 것은 다 다를지라도 단 한가지. <오만과 편견> 그 이름으로 빛나는 작품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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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관계
피에르 쇼데르로스 드 라클로 지음, 박인철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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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몽>·<사랑보다 위험한 유혹>·<스캔들>. 이 세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원작이 같다는데 있다.  영화화가 많이 된 만큼 원작의 위용도 빛이 나며 게다가 책을 읽으면서 전에 보았던 영화와의 비교를 하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재미가 한층 배가된다. 바로 그 원작 소설인 위험한 관계는 전직소설가가 아닌 군인이 여가시간을 이용해서 쓴 소설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편의 영화는 원작을 살린 영화인 <발몽>, 현대판으로 만든 <사랑보다 위험한 유혹>, 조선판으로 만든 <스캔들>, 이렇게 각기 다른 시점에서 원작을 토대로 이루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미망인 후작부인과 유명한 난봉꾼인 발몽 자작, 그런 발몽의 엽색행각 물망에 오른 투르벨 대법원장 부인,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 세실, 그를 좋아하는 당스니. 이 다섯 사람을 찬찬히 읽으면서 영화에서 주연했던 배우를 떠올리기도 하고 어떤 점이 다른지 어떤 점은 같은지 비교하면 더욱 재미있다.

 영화에서는 연인의 사랑이 운명적으로 묘사되는 반면 원작에서는 단지 사랑놀음이라는 끝내 비극적이기까지 한 결말이다. 게다가 원작에 가장 충실했다는 <발몽>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지막에 발몽의 아이가 있어서 그의 백모인 로즈몽드 부인이 세실을 거두지만 원작에서는 이미 세실은 후반부에서 아이를 유산하며 심지어 아이를 가진 사실까지도 몰랐었다. 단지 발몽만이 그 사실을 알고 세실이 결혼을 하게되면 그것은 발몽가의 분가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조소를 보냈을 정도며 세실은 탕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수녀원으로 가서 수녀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영화는 하나같이 발몽이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거기에서 마음을 고쳐먹는 반면 원작에서는 발몽은 끝까지 자신이 정말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로맨틱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원작은 끝내 소중한 사랑도 결실도 없다. 단지 비극일 뿐이며 잠시의 사랑놀음이었다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렇게 냉소적이기까지한 결말로 끝나는 것은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의 전반에 깔려있는 사회 풍조에 있다.  

 한창 보나파르트의 위세가 유럽 전역을 떨게 하고 코르시카 섬에서 장교들이 주둔을 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귀족들의 사치풍조가 극에 달하고 결혼제도는 두 가문의 결합과 재산의 확장 수단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여자들의 정조에 대한 관념이 완고하고 여자 혼자서는 심지어 외출도 할 수 없었던 때에 한편으로는 사교계에서 인기가 있었던 인물들은 난봉꾼이었으니 이율배반적인 사회풍조에서 남녀의 연애는 한낱 놀이에 불과하다가도 평생을 수녀원에서 살 수 없게 할 수 있는 치명적인 독으로도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원작에서의 결말은 당연한 이치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사회풍조에 따라서 대놓고 연애를 하지 못하고 숨어서 비밀리에 할 수 없었기에 연애는 편지로 이루어졌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쩌면 서간소설이라는 것이 당연하다. 이 소설은 총 175통의 편지로만 이루어져있다.

 서간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독자의 상상력을 유발한다는 점에 있다. 상황이나 여타 사건의 묘사는 없고 오로지 그 읽을 겪은 사람들이 보내는 편지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대체 그 시간 어떤 곳에서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일에 대한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인 것이다. 등장인물의 편지 쓰는 스타일들은 개성적이어서 작가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느껴질 만큼 생동적이다. 물론 나중에 발몽자작이 결투 중에 죽었다는 클라이맥스의 부분에서는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편지 한 장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주인공의 생사가 걸린 결투에 대해서는 전혀 진상을 알 수 없어 답답한 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서로 주고받는 편지들 안에서 한 인물을 두고 생각하는 여러 명의 다른 생각들을 보거나 사건의 전개가 엄청난 암투로 이루어져 있고 그 결과물을 다른 인물의 편지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기 때문에 흥미진진하다. 


  누가 누구를 유혹하려고 하고 그 유혹에 넘어가는 어쩌면 먹이사슬과도 같은 연애의 거미줄에서 과연 사랑이 빛을 발할 수 있을까. 단순한 한철의 사랑놀음이라고 치부하기엔 편지 속에서 풍기는 감정은 너무도 진지하다. 오로지 편지로 상대의 마음을 파악하고 같이 데이트를 하는 것을 꿈도 못 꿀 그 시대에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작은 감정이라도 진지할 수 밖에 없었을 시대에 그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위험한 관계에서는 위험하고도 은밀하게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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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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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신작이 나왔다. 글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가 나를 이끌고 나는 또 다시 책장을 덮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버렸다. 글에서는 작가의 삶에 대한 진지한 독백은 있을지언정 늙은이의 한탄이 없다. 글만 읽는다면 누가 그녀를 할머니라고 생각할까? 언제나  생각하건대 글만을 읽고서 작가의 나이를 추측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글만 읽고서 작가를 추측하기란 쉽다. 아치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식물을 가꾸고 가끔 글도 쓰고 말벌과 한판 실랑이도 하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알아보고, 삶 속으로 한발 걸어 들어가 보자.
 
 그곳은 마냥 행복하지도 마냥 슬프지도 않은 곳이다. 누군가 죽기도 하고 낭보에 웃음 짓기도 하고 일상의 소소함에서 삶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 살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 「나목」에서의 떨어지던 은행잎과도 같은 삶의 편린이 숨어 있기도 하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머나먼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애달아하는 마음이 점점이 찍힌 곳. 그리고 그런 밭에다가 물도 주고 잡초를 뽑아내기도 하고 호미로 다듬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 뒷모습은 평범하지만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글귀들로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작가, 그 호미를 든 뒷모습의 주인공은 바로 박완서.
 
 호미는 김을 매는 도구이다. 그 한국산 무쇠로 된, 예쁜 날을 가진 농기구가 전면에 나선 것은 그녀의 글이 아마도 호미처럼 한국에서 나고 한국에서 자라고 한국적인 바로 그 작가의 씀씀이와 닮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가 든 호미로 솎아내는 것은 비단 잡초뿐이었던가! 그녀의 화단에는 백여 가지의 식물들이 살고 있다. 그 이름들을 모두 헤아리고 또 개화시기까지 꼼꼼하게 적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그녀는 타고난 정원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글도 식물도 마찬가지로 쓰는 사람마다 키우는 사람마다 그 내공을 톡톡히 치르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가 탁월한 정원사 소리를 들어도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정원사와 작가 그리고 화단과 삶. 이 두 가지의 교묘한 크로스오버 안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오로지 그 화단과 삶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다. 손녀에게 글을 가르치며 행복을 느끼고 가끔 친절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작가의 모습을 느껴야 할까 아니면 노인의 모습을 느껴야 할까. 나는 이 두 가지 모두를 느껴야 당연하다 여긴다. 이제 노인인 작가이기 때문에. 모름지기 삶에서 글을 뽑아내는 작가에게 삶과 분리시켜서 한 이미지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나는 글을 읽으면서도 우리 할머니에게 느꼈던 애달음과 닮아있는 감정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고, 글다운 글이 아닌 글을 내려는 자신을 말려달라는 당부를 당신의 딸에게 던지는 부분에서는 찡한 작가 정신을 발견했다. 누구에게나 삶이 있고 그 삶을 지고 살기 마련인데 그녀는 그 삶도 삶이거니와 그것을 써내느라 또 다른 삶을 쓰고 있었다. 가슴이 찡하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박완서가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작가임에 안도감도 느낀다.
 
 표지에 노란색으로 쓰여진 홍보문구 '깊은 성찰'에 나는 의의를 던진다. 그녀는 깊은 성찰을 한 것이 아니리라. 호미든 손이 늙고 구부정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서운 호미로 그렇게 삶도 글도 솎아내는 것이 어찌 깊은 성찰이랴. 그것은 그녀에게 으레 그렇게 해온 삶 자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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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 지음, 김라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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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덮고 나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텍스트로 텍스트를 해체하고 재정립하고 그 과정에서 텍스트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는 정말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책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평을 하기 전에 단언턴대 이 소설은 보르헤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120% 더 즐길 수 있다. 왜냐하면 책의 소개에서 언급되었듯,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온전히 보르헤스를 위한 오마쥬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진행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보르헤스가 살던 곳이며, 주인공이 키우던 고양이 이름인 알렙은 보르헤스의 단편「알렙」에서 차용했다. 또한 주인공이 쉰이 되도록 교사에 별반 특별할 것이 없는 번역가라는 점(게다가 주인공이 번역한 책들 중에서는 보르헤스의 책도 있지 않은가)은 보르헤스가 늦은 소설가 데뷔를 하고 그 전까지는 유명치 않은 교수였다는 점에서 따온 것이다. 책에서 이미 보르헤스가 등장하는 것만이 오마쥬가 아니라 아예 주인공의 설정 자체가 보르헤스의 모방인 것이다.

 나 역시 보르헤스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 보르헤스를 발견하기란 쉽다. 일단 등장인물이 보르헤스다. 하지만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중 화자가 언급하는 것들은 교묘하게 보르헤스의 단편집에서 나왔던 구절이며(물론 대놓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르헤스가 소설에서 사용한 모티프를 사용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추리가 이루어지는 과정 또한 '보르헤스적'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추리가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범인은 추리 현장에 다시금 찾아들 수밖에 없다는 오래된 진리를 떠올린다. 그렇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책으로부터 시작함이 마땅하다. 그것도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부터 말이다. 그리고 차근차근 어디가 어떻게 '보르헤스적'일 수밖에 없는지 알아볼까.

 사건의 중심에 등장하는 교수들과 잡지의 이름들은 모두 허구다. 보르헤스 역시 그의 단편에서 어떤 것이 진실인지 어떤 것이 허구인지 알 수 없도록 교묘한 장치들을 사용하는데 이 또한 그대로다. 에드가 앨런 포가 소설들을 썼으며 그의 팬이 있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그에 관한 <황금 곤충>이라는 간행물도 교수들도 허구다. 게다가 자주 등장하는 러브크래프트의 책에서 언급된 《네크로노미콘》이라는 책의 존재의 유무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하고 그 존재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지만 추론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등장하는 이유들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는 없다. 이렇게 진실과 허구의 결합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것까지가 진실인지 허구인지 헛갈리게 하는 이른바 보르헤스의 방법이 전 부분에 걸쳐서 사용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가 보르헤스가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보르헤스가가 맞는가?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보르헤스는 저자가 온전히 사유로 만들어낸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가진 카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르헤스가 말하고 써낸 책들의 구절에서 보르헤스라는 것을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물론 착각도 가능하지만) 보르헤스가 실제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그러니까 이중 텍스트 사이에서 헤매게 된다. 이는 결말에 이르러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서의 묘사가 아닌 사건의 후에 화자가 서간의 형식으로 보내는 것을 다시 보르헤스가 시간이 흐른 후에 편지로 써서 되돌리는 부분에서 이미 있었던 일과 쓰여진 일의 간극이 드러난다.

 텍스트의 전 부분에 걸쳐서 사용되는 '거울' 모티프는 어떠한가. 텍스트 안에서도 언급되지만 보르헤스의 단편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서 그 기본적인 틀을 끄집어낸다. 그 안에서는 '거울과 부성은 끝없이 재생산하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이다'라는 부분이 있는데(이 부분은 단편 안에서 처음에는 성욕이었다가 부성으로 바뀌었다.) 이 역시 부성과 거울이라는 키워드를 그대로 차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끝없는 자음과 모음 그리고 언어에 대한 고찰 역시 같은 단편에서 나오는 고찰과 비슷하다. 언어에 대한, 궁극적으로 텍스트가 깨지기 쉬운 언어라는 구조 위에 서 있으며 그것에 대한 끝없는 회의를 통해서 새로운 의미로도 재창출 될 수 있다는 이른바 탈구조적인 면을 보인다.

 또한 출처에 대한 끊임없는 텍스트 분석 방법과 그 실마리를 찾는 방식에 있다. 역시 위의 단편에서 사건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나온 한 구절의 출처를 찾아내면서 시작하는데(그 구절이 바로 거울과 부성에 관한 구절.) 이렇듯 어떤 책에서 한 구절을 보고 그 구절의 출처를 찾아가는 방식의 추리방식은 보르헤스가 처음으로 시도한 방법이다. 후일 이 방법은 여러 작가에게 이식되었고 대표적으로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이 있다. 게다가 텍스트의 출처를 찾기 위해서 또 다른 텍스트에서 그 해결점을 찾는 방식이나 여러 가지 텍스트를 한 가지의 범주에 의하여 묶고 연계시키는 방식 또한 보르헤스가 자주 쓰는 방식이다. 위에서 말한 단편에서처럼 그 뒤를 맡고 있는 거대조직이 실체가 불확실하지만 분면 음모를 지니고 있다고 추측하는 것처럼 이 텍스트에서도 이스라펠 소사이어티라는 음모를 지닌 거대조직이 등장하고 끝까지 그 실체가 부정확하고 그저 추측을 할 수 있을 뿐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 것도 그렇다.

 물론 이 말고도 독자들이 느낄 수 있는 보르헤스의 자취는 많다. 보르헤스가 쓴 소설과 시들의 구절을 찾아내고 재인식하면서 진정으로 보르헤스적인 텍스트의 해체와 재정립 가능함을 만끽하면서 같은 보르헤스 팬으로의 동질감과 공모자의 은밀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작은 부분 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면서 글귀를 되새김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르헤스 팬이라면 알 수 있을 무신론자라는 점이나 보르헤스가 말년에 비서와 결혼을 했다는 점이나 보르헤스 자신이 장님이며 또한 그것을 물려준 아버지, 즉 부성과의 관계 그리고 필연과 우연에 대한 생각 등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다. 마치 미로가 더 깊어질수록 웃음 짓는 책 안에서의 보르헤스처럼 말이다.

 모든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말이 되어야 한다는 책 안의 보르헤스의 말처럼 우리는 텍스트의 긴밀함과 끝없는 정보의 바다에서 모든 해답이 도서관에 있다고 믿는, 그래서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에서 자신을 그 속을 헤매고 정리하는 사서 노인으로 표현했던 것처럼 정말로 진실은 책들 안에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하고 금이 되기도 한다.

 끝으로 이 모든 것을 조합하고 보르헤스의 자취를 따랐을 저자에게 같은 보르헤스 팬으로서 찬사를 보내고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 또한 지극히 보르헤스를 따른 것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낸다. 마지막까지 독자에게 던지는 재해석의 여지를 위해 텍스트를 닫지 않고 열어둔 것에서도 감사하다. 나는 처음에 보르헤스를 알면 더 책이 재미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언제나 보르헤스의 방식처럼 이 책은 보르헤스를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거기서 뽑아내는 의미들은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 할 수 없다. 단지 추리소설로 읽던 보르헤스의 오마쥬로 읽던 읽고서 판단을 내릴 여지는 크고 또 커서 온전히 독자의 마음에 달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 보르헤스가 추구했던 탈구조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말이다.

 

 +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 읽어보면 좋을 책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황병하 역, 민음사, 199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우석균 역, 민음사, 199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대담:보르헤스가 보르헤스에 대해 말한다」,『불한당들의 세계사』, 황병하 역, 민음사, 1999.

이남호,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 민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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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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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오스터의 책에 대한 서평을 쓸 때는 나도 모르게 '그러니까'로 시작하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뉴욕에서 벌어진다. 거대한 매트로폴리스의 한복판에 널려진 사람들 사이로 한 명이 한 명을 추적하고 또 다른 한 명이 그를 주시한다. 이 이야기는 제목처럼 3부작인데 「유리의 도시」, 「유령들」, 「잠겨있는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이 세 소설들이 어떻게 해서 한 책에 실리게 되었는지 의문이 갈 것이다. 단지 장소적 특징인 뉴욕이라는 것밖에는 주인공도 모두 각기 다른 이야기인데 말이다. 하지만 책을 덮고나면 다시금 첫 장부터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유는 분명 다른 사람이지만 이름이 같은 사람들이 몇 번에 걸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읽고나면 다시 읽어도 그 사람들은 이름이 같은 완전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이름은 단지 이름에 불과하고 인칭대명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될 쯤, 소설의 참맛은 다가오기 시작한다.

 세 작품은 모두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주시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정말로 탐정이 등장하던가, 탐정이 아닌 사람이 탐정 노릇을 하게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삶의 편린 속에서 부유하는 거대 도시의 역시 편린들과도 같은 존재이다. 폴 오스터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그의 지루하리 만치 들쑥날쑥한 문장이랄지 두서없는 이야기의 전개랄지 끝도 없는 미로 속에 서있는 것같은 이야기의 갈래와 일화들 속에서 해매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뉴욕에서 자라고 뉴욕을 온전히 거리 묘사를 통한 것이 아닌 작품 분위기 속에서 펼쳐내는 작가의 마력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특징은 바로, 출처가 모호한 의문과 끝없는 탐색이다. 폴 오스터는 작은 일화들을 늘어놓는 것을 즐기는데, 익히 아는 바대로 그의 다른 작품인 『달의 궁전』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센트럴 파크에서의 거지 노릇과 어메이징 메츠에 대한 설명을 잊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작품을 휘어잡는 일화가 한 가지 있는데 우리는 바로 이 일화를 제대로 이해해야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세르반테스의 『돈 끼호떼』에서 등장하는 저자에 대한 논란이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이 그 책의 작가가 확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책의 안에서 사실은 이 책이 아랍에서 떠도는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를 다른 작가가 썼는데 자신은 번역을 한 것 뿐이라고 소개하는 대목이 있다. 이 부분은 다른 책에서도 소재로 활용되곤 하는데 가장 대표적으로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수록된 단편인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이다. 이 방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의심을 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야기 자체에 대한 허구를 던짐으로써 다시금 혼돈에 빠지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 방식은 온전히 폴 오스터에게 이식된다. 그 모호한 의문과 끝없는 추적은 탐정소설이라는 것과 맞물려 계속 의문을 던지고 또한 그것을 풀어나가기 위해서 내면으로까지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을 조명함으로 해서 극명하게 표출된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이 작자의 고민은 어디까지 이어지며 또한 끝은 어디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은 역시 질문과도 같이 미궁이며 끝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다. 마치 책 속에 등장하는 팬쇼의 장편소설과도 같은 것처럼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을 말이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활자의 미혹 속에서 지푸라기 하나를 잡으면 그 지푸라기는 다른 거대한 뿌리와 이어져 있고 그 뿌리는 땅 속에서 또 다른 뿌리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 하나 딱히 전면에 나서지 않고 비등한 주제들 사이에서 그때서야 한 가지도 간과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다시 책을 펴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리좀적인 이야기는 시종일관 비정상적이지만 인간적인 주인공의 사건을 대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폴 오스터의 글쓰기 방식과 주인공의 삶의 방식과 이야기의 결말과 더불어 독자들의 반응까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거창하게 소개하는 까닭은 나 역시 책을 덮고 나서도 혼몽 중의 실체를 잡은 듯한, 도시에 흘러다니는 유령이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폴 오스터의 책은 쉽지 않다. 줄거리가 명확하고 결론이 뻔하든 그렇지 않든 상상 용인 가능한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끝없이 펼쳐진 가판에서 무엇을 고를지 고민하는 어느 공산주의자의 선택과도 같이, 단 하나만이 유일한 진실이고 끝이라는 것은 통용되지 않는다. 조금만 방심하고 있으면 글을 유기체 돠어 머릿속을 돌아다녀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내가 폴 오스터를 읽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방식은 언제나 다시금 책을 들게 만드는 바로 그 혼몽과도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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