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의 신작이 나왔다. 글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가 나를 이끌고 나는 또 다시 책장을 덮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버렸다. 글에서는 작가의 삶에 대한 진지한 독백은 있을지언정 늙은이의 한탄이 없다. 글만 읽는다면 누가 그녀를 할머니라고 생각할까? 언제나  생각하건대 글만을 읽고서 작가의 나이를 추측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글만 읽고서 작가를 추측하기란 쉽다. 아치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식물을 가꾸고 가끔 글도 쓰고 말벌과 한판 실랑이도 하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알아보고, 삶 속으로 한발 걸어 들어가 보자.
 
 그곳은 마냥 행복하지도 마냥 슬프지도 않은 곳이다. 누군가 죽기도 하고 낭보에 웃음 짓기도 하고 일상의 소소함에서 삶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 살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 「나목」에서의 떨어지던 은행잎과도 같은 삶의 편린이 숨어 있기도 하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머나먼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애달아하는 마음이 점점이 찍힌 곳. 그리고 그런 밭에다가 물도 주고 잡초를 뽑아내기도 하고 호미로 다듬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 뒷모습은 평범하지만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글귀들로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작가, 그 호미를 든 뒷모습의 주인공은 바로 박완서.
 
 호미는 김을 매는 도구이다. 그 한국산 무쇠로 된, 예쁜 날을 가진 농기구가 전면에 나선 것은 그녀의 글이 아마도 호미처럼 한국에서 나고 한국에서 자라고 한국적인 바로 그 작가의 씀씀이와 닮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가 든 호미로 솎아내는 것은 비단 잡초뿐이었던가! 그녀의 화단에는 백여 가지의 식물들이 살고 있다. 그 이름들을 모두 헤아리고 또 개화시기까지 꼼꼼하게 적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그녀는 타고난 정원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글도 식물도 마찬가지로 쓰는 사람마다 키우는 사람마다 그 내공을 톡톡히 치르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가 탁월한 정원사 소리를 들어도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정원사와 작가 그리고 화단과 삶. 이 두 가지의 교묘한 크로스오버 안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오로지 그 화단과 삶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다. 손녀에게 글을 가르치며 행복을 느끼고 가끔 친절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작가의 모습을 느껴야 할까 아니면 노인의 모습을 느껴야 할까. 나는 이 두 가지 모두를 느껴야 당연하다 여긴다. 이제 노인인 작가이기 때문에. 모름지기 삶에서 글을 뽑아내는 작가에게 삶과 분리시켜서 한 이미지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나는 글을 읽으면서도 우리 할머니에게 느꼈던 애달음과 닮아있는 감정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고, 글다운 글이 아닌 글을 내려는 자신을 말려달라는 당부를 당신의 딸에게 던지는 부분에서는 찡한 작가 정신을 발견했다. 누구에게나 삶이 있고 그 삶을 지고 살기 마련인데 그녀는 그 삶도 삶이거니와 그것을 써내느라 또 다른 삶을 쓰고 있었다. 가슴이 찡하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박완서가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작가임에 안도감도 느낀다.
 
 표지에 노란색으로 쓰여진 홍보문구 '깊은 성찰'에 나는 의의를 던진다. 그녀는 깊은 성찰을 한 것이 아니리라. 호미든 손이 늙고 구부정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서운 호미로 그렇게 삶도 글도 솎아내는 것이 어찌 깊은 성찰이랴. 그것은 그녀에게 으레 그렇게 해온 삶 자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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