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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관계
피에르 쇼데르로스 드 라클로 지음, 박인철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9월
평점 :
<발몽>·<사랑보다 위험한 유혹>·<스캔들>. 이 세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원작이 같다는데 있다. 영화화가 많이 된 만큼 원작의 위용도 빛이 나며 게다가 책을 읽으면서 전에 보았던 영화와의 비교를 하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재미가 한층 배가된다. 바로 그 원작 소설인 위험한 관계는 전직소설가가 아닌 군인이 여가시간을 이용해서 쓴 소설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편의 영화는 원작을 살린 영화인 <발몽>, 현대판으로 만든 <사랑보다 위험한 유혹>, 조선판으로 만든 <스캔들>, 이렇게 각기 다른 시점에서 원작을 토대로 이루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미망인 후작부인과 유명한 난봉꾼인 발몽 자작, 그런 발몽의 엽색행각 물망에 오른 투르벨 대법원장 부인,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 세실, 그를 좋아하는 당스니. 이 다섯 사람을 찬찬히 읽으면서 영화에서 주연했던 배우를 떠올리기도 하고 어떤 점이 다른지 어떤 점은 같은지 비교하면 더욱 재미있다.
영화에서는 연인의 사랑이 운명적으로 묘사되는 반면 원작에서는 단지 사랑놀음이라는 끝내 비극적이기까지 한 결말이다. 게다가 원작에 가장 충실했다는 <발몽>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지막에 발몽의 아이가 있어서 그의 백모인 로즈몽드 부인이 세실을 거두지만 원작에서는 이미 세실은 후반부에서 아이를 유산하며 심지어 아이를 가진 사실까지도 몰랐었다. 단지 발몽만이 그 사실을 알고 세실이 결혼을 하게되면 그것은 발몽가의 분가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조소를 보냈을 정도며 세실은 탕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수녀원으로 가서 수녀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영화는 하나같이 발몽이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거기에서 마음을 고쳐먹는 반면 원작에서는 발몽은 끝까지 자신이 정말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로맨틱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원작은 끝내 소중한 사랑도 결실도 없다. 단지 비극일 뿐이며 잠시의 사랑놀음이었다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렇게 냉소적이기까지한 결말로 끝나는 것은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의 전반에 깔려있는 사회 풍조에 있다.
한창 보나파르트의 위세가 유럽 전역을 떨게 하고 코르시카 섬에서 장교들이 주둔을 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귀족들의 사치풍조가 극에 달하고 결혼제도는 두 가문의 결합과 재산의 확장 수단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여자들의 정조에 대한 관념이 완고하고 여자 혼자서는 심지어 외출도 할 수 없었던 때에 한편으로는 사교계에서 인기가 있었던 인물들은 난봉꾼이었으니 이율배반적인 사회풍조에서 남녀의 연애는 한낱 놀이에 불과하다가도 평생을 수녀원에서 살 수 없게 할 수 있는 치명적인 독으로도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원작에서의 결말은 당연한 이치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사회풍조에 따라서 대놓고 연애를 하지 못하고 숨어서 비밀리에 할 수 없었기에 연애는 편지로 이루어졌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쩌면 서간소설이라는 것이 당연하다. 이 소설은 총 175통의 편지로만 이루어져있다.
서간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독자의 상상력을 유발한다는 점에 있다. 상황이나 여타 사건의 묘사는 없고 오로지 그 읽을 겪은 사람들이 보내는 편지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대체 그 시간 어떤 곳에서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일에 대한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인 것이다. 등장인물의 편지 쓰는 스타일들은 개성적이어서 작가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느껴질 만큼 생동적이다. 물론 나중에 발몽자작이 결투 중에 죽었다는 클라이맥스의 부분에서는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편지 한 장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주인공의 생사가 걸린 결투에 대해서는 전혀 진상을 알 수 없어 답답한 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서로 주고받는 편지들 안에서 한 인물을 두고 생각하는 여러 명의 다른 생각들을 보거나 사건의 전개가 엄청난 암투로 이루어져 있고 그 결과물을 다른 인물의 편지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기 때문에 흥미진진하다.
누가 누구를 유혹하려고 하고 그 유혹에 넘어가는 어쩌면 먹이사슬과도 같은 연애의 거미줄에서 과연 사랑이 빛을 발할 수 있을까. 단순한 한철의 사랑놀음이라고 치부하기엔 편지 속에서 풍기는 감정은 너무도 진지하다. 오로지 편지로 상대의 마음을 파악하고 같이 데이트를 하는 것을 꿈도 못 꿀 그 시대에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작은 감정이라도 진지할 수 밖에 없었을 시대에 그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위험한 관계에서는 위험하고도 은밀하게 이야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