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 투 리멤버
니콜라스 스파크스 지음, 손성경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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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다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극단론으로서 결코 좋지 않다고 경고했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집이 상당히 센 탓도 있지만 진짜 까닭은 따로 있다.
 

감정에 치우쳐 내가 정말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흘려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시간에 내가 헛되이 드러낸 감정이 휩쓸려 절망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리에는 허무가 남지만 흔적이 남은 자리에는 허무에 안타까움이 더해져 절망이 된다. 정신이 어떻게 이렇게 황폐해질 수 있단 말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갈수록 커져가는 지금 나에게 선택이란 없다. 계속 새롭게 생기는 상황에 적응하기도 벅차다. 순간마다 느끼는 즐거움으로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심각한 번민 때문에 나는 몸과 마음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고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 같아서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어깨를 움츠릴 필요가 없고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은 어떤 상황일까? 감정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가 아닐까?

 

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지금까지 정말 심각하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친 짓이다. 그래봐야 어차피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다가 갈 거면서 뭐하려고 그러냐고 수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하지만 수많은 시간 동안 미친 채 보내면서 내 정신은 헝클어 질대로 헝클어졌고 감정과 이성을 분리하는 일도 이제는 시도하기도 힘들어졌다. 나에 관하여 너무 복잡한 연구를 요구하는 작업이라서 끝이 안 보여서, 거기에 손을 댄 나는 벌써 지쳐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감정을 없앤다는 것은 어쩌면 내게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상당한 모순이기는 하지만 나는 매우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감정 때문에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 횟수는 셀 수 없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할 정도로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가 감정 때문에 이렇게 시달린다는 것은, 아마 어떤 까닭을 들어도 설명하기 힘든 문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긴 생각해 보니까 답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성보다 감정이 강해서 그런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감정이 나를 사로잡아서 통제가 안 될 때를 대비한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대개 차분하게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힘쓰는데, 책도 상황에 따라서 알맞은 책을 골라 읽는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소설은 읽을 때 내 상황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집에서 갑자기 우울해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동생 방에 가서 잡히는 대로 꺼내서 읽었다. 이 책을 읽은 뒤 나는 훨씬 더 우울해졌다.

 

무슨 일만 있으면 하나님이 뜻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셨을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제이미, 항상 손때에 절은 두툼한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제이미, 주말에는 항상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는 제이미,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효녀 제이미. 그런 제이미를 어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극찬하지만, 주인공인 '나' 랜던 카터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좀 이상한 여자 아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연히 제이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카터는 차츰 제이미에게 빠져들고, 결국 영혼을 나눌 사이로 발전한다. 무도회에 같이 가고, 연극을 같이 하면서 카터는 제이미가 지닌 진정한 아름다움에 완전히 반해 버린다.

 

그러나 제이미는 카터를 사랑하기 전부터 백혈병에 걸려 있었고, 오랫동안 제이미 안에 숨어 있던 그 병은 차츰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카터는 너무 안타까워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저승사자가 제이미 손을 잡고 가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터는 제이미가 죽기 전 그녀와 결혼하여 영혼을 나눠 영원한 연인이 된다. 그 결합은 제이미가 죽고 나서 40여 년이 지난 뒤에도 풀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랜던 카터라는 한 중년 남자가 그 기억을 여전히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니콜라스 스파크스라는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나 그렇기는 하더라도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렸다. 몬태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툼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하다가 둘 다 죽으면서 끝난다. 두 연인은 사랑으로서 오랜 앙숙이었던 두 가문을 화해하도록 했다.

 

줄거리는 좀 많이 다르지만 이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랜던 카터의 할아버지는 온갖 나쁜 방법으로 돈을 벌었고, 제이미의 아버지인 헤그버트 목사는 그 밑에서 일하다가 할아버지에게 크게 실망하고 바른 소리를 하다가 쫓겨났다. 그런 형편이니 랜던 카터의 아버지와 헤그버트 목사가 사이가 좋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카터와 제이미가 사랑하면서 두 집안 사이에 있던 싸늘한 얼음벽은 차츰 녹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카터에게 차가웠던 헤그버트 목사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카터의 아버지도 제이미가 백혈병으로 죽어간다고 하자 치료 장비를 마련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제이미를 살리려고 헤그버트 목사와 카터의 아버지는 힘을 모은다.

 

제이미는 진정한 천사였다. 마을에 따뜻함을 가져다 주고 두 집안 사이에 남아 있던 앙금을 말끔하게 걷어버렸다. 정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제이미를 사랑한 카터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나는 아직 그 기분을 모른다. 아마 평생 모르고 지내다가 그저 이 세상 떠날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사랑을 아름답다고 외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파괴를 불러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혼자서 괴로워하고 감정을 억누르려고 많은 시간과 힘을 써야 하는가. 앞에서도 계속 말했지만 나는 왜 그럴까. 진정한 사랑은 나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 소설을 옮긴 손성경 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강한 한 마디가 수십 갈래로 나뉜 갈고리로 변해 내 심장을 후벼팠다. 책을 덮은 뒤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나는 과연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인가? 내가 지니고 있는 이 감정은 그저 남에게 피해만 주는 집착일 뿐인가? 이 따위 것을 가지고 있어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런 형편이니 내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런 극단에 치우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무 무서운 일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소설을 읽었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도 이 소설에 걸맞은 생각을 좀 하고 싶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어렵고 운도 따르지 않는 것 같다. 이 소설이 어찌나 내 마음을 심하게 자극했는지, 제이미만 생각하면 기운이 쭉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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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스펜서 존슨
스펜서 존슨 지음, 안진환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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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뒤바뀌는 감정 때문에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힘과 시간을 헛되이 날려버렸는지는 계산하기조차 힘들다. 특히 군대에서는 감정이 더욱 격렬하게 뒤바뀌어서, 몸은 나름대로 편한데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스트레스가 심하다. 군대에서 보낸 시간과 군대라는 조직 자체를 어떻게 판단하고 평가해야 할 지 오랫동안 고민했기 때문이다.

 

물론 군대에서 나는 많은 일을 해냈다. 그리고 병장이 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자유와 권리 속에서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은 여전히 많다. 그것을 모두 모으면 전역할 때쯤 엄청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 가운데 거의 모든 것이 군대에서 오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모든 것을 내가 해낼 수 있도록 해 준 군대라는 조직에 나는 마땅히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는 쉽지 않다. 얻은 것만큼이나 잃어버리거나 나빠진 것도 많았다는 생각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새로 싹을 틔우기 시작한 사랑을 포기해야 했고, 내가 그동안 벌여놓았던 일과 새로 시작하려고 했던 일도 접어야 했다. 많은 것이 부족했지만 나름대로 일이 잘 굴러가고 있었고, 새로 시작하려고 계획을 잘 짜 놓은 것들도 몇 가지 있었지만, 군대에 가기로 한 뒤 모든 것을 접고 그때까지 해 놓은 일을 잘 마무리하는 데만 힘써야 했다. 2005년 내내 의욕이 매우 좋았던 터라 더욱 안타깝다.

 

그런 것을 둘째로 쳐야 할 정도로 가장 심각한 문제도 있다. 원래 문제가 많았던 성격이 더욱 비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천부 인권에 따라 보장된 인권과 기본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온갖 악습과 군대라서 어쩔 수 없다는 허울 좋은 불가피론이 너무 싫어서 선임들과 사사건건 충돌했고, 그 때문에 내가 지니고 있던 추악한 본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바깥에서 나름대로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하면서 성격을 조금씩이나마 다듬고 있었는데,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과도 같은 힘들고 자유롭지 못한 시간을 군대에서 보내면서 간신히 다듬은 것들이 모조리 헝클어져 버렸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거칠고 이해할 수 없는 모순투성이인 환경에 적응하면서, 나도 모르게 입에 험한 말이 붙고 신경질과 짜증이 늘어났다. 이병과 일병일 때 느꼈던 욕지기가 무엇 때문인지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상병과 병장일 때 그런 욕지기를 불러 일으키는 것들을 멀리 해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해 놓고도, 막상 병장이 된 지금 내 모습과 행동을 분석해 보면 다짐한 대로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일이야 바깥에서든 군대에서든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어떻게든지 해낼 수 있지만, 성격과 생각에 문제가 생겨 버린다면 일 자체는 아무 뜻이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해낸 일에 상관없이 나를 이토록 심하게 뒤흔들어 놓고 성격과 생각을 삐뚤어지게 한 군대를 미워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와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온갖 부조리를 강요하는 싫은 선임들과 부딪치며 살도록 한 군대가 너무나도 싫었다. 

 

결국 나는 군대에서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병장이 된 지금도 행복하지는 않다. 항상 뭔가 빠진 느낌에 시달리고 있다. 따지고 보니까 사회에서나 군대에서나 행복하다는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보람이 있을지언정 행복은 없었다. 그런데 그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계획을 많이 세워서 그에 따라 일하고 그런 내 모습 자체에 만족하려고 애쓰고 내가 해낸 것들 되짚어 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작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군대에서 이 책 '행복'을 읽으면서, 나는 그 까닭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자책에 지치 자아를 달래주는 온갖 글을 읽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까닭을, 하필이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깨달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지금까지 너무 많은 욕심을 품고 자기를 너무 심하게 다그쳤던 나에게, 이 책을 쓴 스펜서 존슨은 그러지 마라고 부드럽게 충고했다. 자기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결국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행복해지는데 반드시 필요한 7가지 원칙을 살펴보자.

 

 

1.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제대로 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소중히 여길 수 없다. 자기를 너무 심각하게 바라보지 마라. 어리석음, 불완전함, 인간미를 즐겨라.

 

2.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우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자기가 품은 이상이나 꿈을 기준으로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버리고, 좋은 현실을 인정하며 거기에 감사하라. 'Need'에 감사하고 'Want'를 줄여라.

 

3.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그것이 두려워서 내리는 결정인지 아니면 좋아서 내리는 결정인지 생각하라.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며, 그 덕분에 두려움이 없어진다.

 

4.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라. 아주 짧은 시간에도 상황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바꿀 수 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하루 전체를 그리고 인생 전체를 바꿀 수도 있다.

 

5.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지 마라.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수록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 큰 애정을 갖는 사람이 될 수 있다.

 

6. 자기 자신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해서 끼니때마다 그것만 먹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을 돕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그들도 자기 자신을 더 소중하게 여기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실행하면, 그들 자신에 대해 더욱 만족할 뿐만 아니라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7.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주는 일이다. 내가 행복하고 걱정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할 수 있다.

 

 

이 7가지 원칙이 진리임을 인정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더욱 소중히 여기면, 우리는 마침내 서로를 더 배려할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세상은 더욱 살기 좋아지고 따뜻해질 것이다.

 

 

스펜서 존슨에 따르면 내 안에는 '최상의 자아'가 있다고 한다. '최상의 자아'는 자신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내면 가운데 일부분이며 '직관하는 존재(The Intuitive)'이라고도 한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최상의 자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이 책에 따르면 자기만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닌데, 이 세상을 바라보면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현실이 그러니 이 세상이 어떻게 살기 좋아질 수 있을까. 그 전에 일단 나부터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지 생각해 봐야겠다.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면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군대에서 지독하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는 오로지 군대 때문에 생긴다고만 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워낙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고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강요한 탓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군대보다도 훨씬 더 오랫동안 나를 이렇게 행복에서 멀어지게 한 근본에 가까운 까닭일지도 모른다. 일이야 나름대로 꽤 많이 하지만, 거기에서 진정한 행복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에 파묻혀 수 십 해를 보낸 뒤, 나이가 지긋해져서야 후회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자. 그렇다면 내 의지대로 보낸 시간도 소중하다. 군대에서 많은 제약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지 시간을 짜내서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많은 일을 해냈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에서도 나름대로 뜻과 보람을 찾아냈다. 그렇기에 군대에서 보낸 시간은 결코 헛되이 보낸 시간이 아니다. 잃어버린 것이 많을지언정 군대가 아니었으면 얻어낼 수 없었을 그런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잃는 것이 두려워서 얻는 것을 포기해 버린다면, 그 사람은 발전할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최상의 자아'가 있다. '최상의 자아'는 내가 군대에서 잃어버리거나 나빠진 것이, 사회에 나갔을 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계속 경고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남은 복무 기간 동안 삐뚤어진 내 성격과 생각을 다듬고자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7가지 법칙을 나에게 유리한 대로 비틀어서 해석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 진정으로 행복해지고자 힘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군대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지 않고 군대를 무조건 긍정하겠다는 건 절대 아니다. 장점은 장점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단점은 단점대로 비판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로서 따로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7가지 원칙이 지니고 있는 모호함과 그 때문에 적용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점도 분명히 인식하고, 그 문제점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곧 이 책은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완벽하다고 박수를 받을 만한 책은 아니다. 지나치게 논리만 따지려고 드는 태도가 '최상의 자아'오는 결국 서로 충돌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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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스펜서 존슨 지음, 형선호 옮김 / 청림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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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행복'을 읽은 뒤 바로 이 책 '선택'을 읽기 시작했다. 스펜서 존슨이라는 한 사람이 내놓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선물', '행복'에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나는 그 세 권을 읽으면서 별다른 마음울림을 받지 못했고, 결국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하는 이야기에는 신물이 났다. 내가 글마다 육군사관학교와 군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니까, 그 참을 수 없는 진부함에 신물이 났다면서 좀 다르게 써 보라고 일갈한 어느 사람처럼 말이다. 읽기 싫었지만 그래도 뭔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끝까지 읽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그 두 가지 생각을 풀어놓기 전에, 일단 이 책에 나오는 주요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우유부단하지 않으며 중요한 부분이 빠진 어중간한 결정을 하지 않는다. 나는 이 확실한 시스템의 두 가지 부분을 모두 사용해, 곧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으로 지속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한다. 나는 스스로 실제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머리를 써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개인적인 질문을 던져 내 마음에 묻는다. 그런 후에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행동한다.

 

정말로 필요한 것만을 추구할 때 더 나은 결정을 더 빨리 할 수 있다.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정보를 모아 선택의 폭을 넓히며, 미리 충분히 생각하고 있는가?

 

(필요한) 정보는 사실과 느낌의 집합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정보를 얻을 때는 직접 확인한다. 나를 가르치는 가장 좋은 스승은 과거에 내가 했던 결정이며 거기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며 그저 그것으로서 배우면 된다. 내가 잘못 내린 결정은 그 당시 내가 한 착각에서 비롯되었다. 진실 같은 허구를 찾아내고 그 길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라. 시간이 지나면 명백해지는 진실을 보고 현실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라.

 

지속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하려면 나는 더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면서 믿으면서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행동해야 한다. 결정을 내릴 때 느낌이 좋지 않으면 자기 직관을 믿고 결정을 다시 돌이켜 봐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두 가지 또는 두 가지가 넘는 대상을 놓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시도 때도 없이 맞이한다. 그런 때 모두 나름대로 기준이 있기는 한데, 그 기준이 반드시 논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꼬치꼬치 파고들자면 결국 살아남는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는가가 기준이 되겠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따져볼 정도로 한가롭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따져볼 능력도 사실 없다. 그렇게 따져볼 능력은 오로지 순수한 이성으로만 완벽하게 내릴 수 있는데, 애당초 순수한 이성이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처럼 현실에는 절대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생각은 이 책에 나오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가 사실과 느낌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에 나오는 '최상의 자아(The Intuitive)'라는 개념을 다시 떠올려 보면, '선택'에 나오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그것이 두려워서 내리는 결정인지 아니면 좋아서 내리는 결정인지 생각하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이는 '행복'에서 나오는 일곱 가지 원칙 가운데 세 번째 원칙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곧 사실과 느낌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인 정보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정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감정만 앞선다면 당연히 판단을 그르치겠지만, 이성만 너무 지나치게 믿어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흔히 열심히 공부하고 세상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진 젊은이들이 그런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은데, 그런 젊은이들은 사회 경험이 많은 어른들이 내리는 판단이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데도 잘 들어맞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나도 그런 젊은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두 번째 생각은 실제로 쓸모가 있는 것을 찾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각자 자기에게 실제로 쓸모가 있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인생 자체마저도 바뀔 수가 있다. 각자 나름대로 정의하겠지만, 나는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정의는 자기가 나중에 홀로 서서 한 인격체로서 사회에 공헌하며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실제로 자기에게 쓸모가 있는 것을 찾는데 가장 필요한 자세는 자기가 헛된 욕심이나 거짓에 홀려 있지 않은지 꾸준히 성찰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혼란스럽고 삐뚤게 만드는 가장 큰 까닭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Need)과 원하는 것(Want)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헛된 욕심이나 거짓 때문에 쓸데없이 원하는 것(Want)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만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믿을 줄 알고 정말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글을 써 놓고 읽어보니 안타깝게도 내가 그토록 비판하던 당위론에 가깝다. 앞에서 말한 그 두 가지 생각 말고도 뭔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표현하지 모해 결국 이 정도밖에 쓰지 못했다. 그 생각을 글로 나타내 정리하려면 '생각의 기술'이라는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선택'에 이어 나온 스펜서 존슨이 쓴 최신작인 '멘토'는 읽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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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 개정판
베티 스미스 지음, 김옥수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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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를 대충 끝낸 뒤 오랜만에 집에 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잘 익은 열무김치와 배추김치, 콩 건더기와 무와 두부 조각이 떠 있고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와 양념장으로 무친 취나물이 차려진 밥상을 받았다. 다음 날 오후에는 논에 잡풀을 뽑으러 갔다. 사실 넓게 펼쳐진 들과 산과 시내와 논에 있는 생물을 관찰하느라고 일에 집중하지도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변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시내에 산책을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감리교회와 못 보던 가게 몇 군데가 새로 생겼을 뿐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아직 내가 세상에서 산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여유롭게 길을 걸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영향을 준 모든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특히 깊이 생각했다. 까닭없는 방황과 분노와 절망으로 온 가족이 얼룩졌던 시절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자세하게 적기도 싫지만, 한편으로는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오른다.

그런 욕망을 지니고 있기에 성장 소설이나 자서전이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것 같다. 주인공이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마침내 행복과 성공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즐겁다. 힘들 때 그런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런 힘든 일이 행복과 성공을 키우는 밑거름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삶을 모른다. 그렇게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 하는 말과 이야기에 나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빈부 격차가 가장 크기로 유명하다. 몇몇 사람들이 최고급 캐비아와 포도주를 즐길 때 끼니를 제대로 때우기도 힘든 사람들이 배를 움켜쥐고 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가는 현실은 가슴을 매우 아프게 한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초강대국으로서 엄청난 경제력을 지니고 있는 지금도 미국 빈민가에서는 하루 한 끼마저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이 고픈 배를 움켜쥐고 방황하고 있다. 그런데 그저 새로운 대륙에 있는 평범한 나라일 뿐이었던 시기에는 과연 어떠했을까? 피아노를 가르쳐 준 뒤 집에서 대접하는 차로 연명하는 부인. 중산층이 흔히 차리는 식탁에 나오는 요리만 못한 특별 요리. 크리스마스 나무를 받으려고 큰 트럭 뒤에 진을 치는 사람들. 가난에 지쳤고 아동심리학과 아이 인격 존중 따위는 전혀 모르는 형편없는 교사들에게 매질을 당하는 아이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그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1900년대 초기에 소시민들이 보여준 애환이 이 소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이 가지는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처한 환경에 만족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과 자기를 견주어 보면서 자기 삶에 만족하려고 한다. 나도 그 방법을 매우 자주 쓴다. 소설을 읽는 것은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저 생각하는 것보다는 도움이 된다. 1900년대 초기에 뉴욕 빈민가에는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 빈민가에서 주인공 프랜시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토요일에만 소혀 한 덩이와 달콤한 롤빵이라는 특별 요리를 먹었고, 형편없는 학교에서 매질을 당하기 일쑤였고, 열네 살밖에 안 된 나이에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프랜시는 꿋꿋하게 자랐다. 지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를 다녔고 동생을 보살폈고 집안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도왔다. 결국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사랑도 찾으면서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꾸려갔다. 그런 프랜시에게 어린 시절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이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내가 세상에 처음 나타난 뒤 지금까지 보낸 시간들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렇다면 내 어린 시절은 주인공과 견주어 봤을 때 어떠한가? 내가 도대체 주인공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항상 주인공과 나를 견주면서 스스로 던지는 물음이다. 답은 확실하다. 하지만 내가 여러모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기에 여전히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럽기도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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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편지 (구) 문지 스펙트럼 5
에드가 앨런 포 지음, 김진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때 어머니께서 '세계명작전집'을 사 오셨다. '파리대왕', '보이지 않는 침입자', '잃어버린 세계', '보물섬', '걸리버 여행기', '파리대왕', '카르멘', '어린 왕자'……제법 많은 작품을 읽었는데 그 가운데 '모르그가 살인사건'도 있었다. 그 작품 덕분에 나는 에드거 앨런 포우라는 작가를 알았다. 처참하게 죽은 부인과 그 딸을 살해한 범인이 오랑우탄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뒤팽이 보여주는 놀라운 연역 추리와 그 기반이 되는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이성에 나도 모르게 반했던 것 같다. 그 때까지 나는 올바른 이성에는 관심도 없는 철부지였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 때부터 추리소설을 읽는데 재미를 붙인 나는 '바스커빌가의 개', '얼룩끈', '오리엔트 급행열차 살인사건', '사자의 갈기', '괴도 루팡', 특히 에드거 앨런 포우가 쓴 소설을 모두 읽어보고 싶어서 나중에 '마리로제 살인사건'도 읽었다. 세월이 흐른 뒤 대학교 2학년 때 드디어 뒤팽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이야기인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를 원서로 읽었다. 이는 매우 독특하고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대부분 추리 소설에서는 범인을 전혀 알 수 없고 도저히 단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궁금증만 불러 일으키는 것만 몇 가지 알 수 있다. 탐정은 사건을 조사하면서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내고, 그것들을 연결하고 그를 바탕으로 추리하여 결국 범인을 찾아낸다. 그 뒤 범인을 궁지에 몰아붙이는 탐정을 바라보면 매우 후련한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도둑맞은 편지'는 대부분 추리 소설이 보여주는 이런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뒤팽을 찾아온 경시총감은 편지를 훔쳐간 범인이 D 장관이라고 대뜸 밝힌다. 편지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면 편지 주인인 여왕이 매우 곤란해지기 때문에 범인을 알면서도 체포할 수 없다. 그래서 경시총감은 부하들을 동원해 D 장관이 사는 집을 몰래 샅샅이 수색하지만 결국 편지를 찾아내지 못한다. 경시총감이 저지른 잘못을 알아챈 뒤팽은 즉시 편지를 찾아내 그에게 돌려주고 소설에서 뒤팽과 함께 살고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나'에게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도둑질해온 편지를 다시 도둑질하는 순환 구조가 매우 흥미롭다. 이는 소설 배경으로 깔려 있는 정치 대립 구도를 알고 있어야 깨달을 수 있다. 편지를 전혀 모르는 왕과 왕 때문에 편지를 어쩌지 못하는 여왕 사이에서 D 장관은 제 3자이다. 그리고 편지를 도둑맞은 여왕과 편지를 훔친 D 장관 사이에서 뒤팽은 제 3자이다. 제 3자가 편지를 훔치고 또 훔치는 구조가 나타난다. 이 구조 속에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이는 매우 독특한 구성이다. 보통 추리 소설에서는 사건에 이처럼 직접 끼어드는 제 3자는 없다. 탐정과 그를 돕거나 그에게 협조하는 사람들, 그리고 범인과 그를 돕거나 그에게 협조하는 사람들이 대립 구도를 이룬다. 하지만 '도둑맞은 편지'에서는 제 3자가 사건에 직접 끼어들어 범인이 되고 사건을 해결하기에, 이와 같은 독특한 구조가 나타날 수 있다. 뒤팽이 탐정이고 D 장관이 범인이라고 그저 단순하게 말하기도 곤란하다. D 장관이 보기에는 뒤팽도 자기 편지를 훔쳐간 범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독특한 구조는 지금까지 전혀 접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상당히 즐거웠다.

배경과 구조를 이해하기는 제법 재미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있다. 바로 편지를 경시총감에게 넘겨준 뒤 뒤팽이 '나'에게 하는 말이다. 경시총감이 저지른 잘못이 왜 나타났는지 설명하면서 뒤팽은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과학과 철학과 형이상학이 복잡하게 얽힌 설명을 내놓는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상식과 법칙과 편견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경시총감은 편지를 숨길 때는 남들이 볼 수 없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길 것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결국 가장 평범한 곳에 약간 위장되어 보관되어 있던 편지를 발견하지 못한다. 적용되지 않아야 할 곳에 적용되는 원칙은 전혀 쓸모가 없다. 부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전체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나무를 관찰하는데 지나치게 매달리면 숲은커녕 다른 나무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좀 더 깊이 있는 논의는 나중에 따로 써야겠다.

여러모로 생각할 점이 많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마리로제 살인사건'에서 끔찍한 시체 이야기만 들으면서 약간 거북했는데, 에드거 앨런 포우는 내 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도둑맞은 편지'에서 독특한 구조와 흥미로운 설명으로 속을 풀어줬다. '도둑맞은 편지'를 읽다가 추리 소설이 갑자기 어찌나 그리워졌는지 감상문을 쓰다가 셜록 홈즈 전집을 계속 뒤적거렸다. 결국 '사자의 갈기'와 '얼룩끈'을 단번에 읽어치웠다. 연애 소설 따위보다는 확실히 머리가 즐겁다. 어떤 때는 머리가 좀 아프고 읽기가 싫어질 때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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