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 투 리멤버
니콜라스 스파크스 지음, 손성경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다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극단론으로서 결코 좋지 않다고 경고했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집이 상당히 센 탓도 있지만 진짜 까닭은 따로 있다.
 

감정에 치우쳐 내가 정말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흘려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시간에 내가 헛되이 드러낸 감정이 휩쓸려 절망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리에는 허무가 남지만 흔적이 남은 자리에는 허무에 안타까움이 더해져 절망이 된다. 정신이 어떻게 이렇게 황폐해질 수 있단 말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갈수록 커져가는 지금 나에게 선택이란 없다. 계속 새롭게 생기는 상황에 적응하기도 벅차다. 순간마다 느끼는 즐거움으로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심각한 번민 때문에 나는 몸과 마음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고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 같아서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어깨를 움츠릴 필요가 없고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은 어떤 상황일까? 감정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가 아닐까?

 

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지금까지 정말 심각하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친 짓이다. 그래봐야 어차피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다가 갈 거면서 뭐하려고 그러냐고 수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하지만 수많은 시간 동안 미친 채 보내면서 내 정신은 헝클어 질대로 헝클어졌고 감정과 이성을 분리하는 일도 이제는 시도하기도 힘들어졌다. 나에 관하여 너무 복잡한 연구를 요구하는 작업이라서 끝이 안 보여서, 거기에 손을 댄 나는 벌써 지쳐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감정을 없앤다는 것은 어쩌면 내게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상당한 모순이기는 하지만 나는 매우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감정 때문에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 횟수는 셀 수 없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할 정도로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가 감정 때문에 이렇게 시달린다는 것은, 아마 어떤 까닭을 들어도 설명하기 힘든 문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긴 생각해 보니까 답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성보다 감정이 강해서 그런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감정이 나를 사로잡아서 통제가 안 될 때를 대비한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대개 차분하게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힘쓰는데, 책도 상황에 따라서 알맞은 책을 골라 읽는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소설은 읽을 때 내 상황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집에서 갑자기 우울해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동생 방에 가서 잡히는 대로 꺼내서 읽었다. 이 책을 읽은 뒤 나는 훨씬 더 우울해졌다.

 

무슨 일만 있으면 하나님이 뜻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셨을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제이미, 항상 손때에 절은 두툼한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제이미, 주말에는 항상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는 제이미,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효녀 제이미. 그런 제이미를 어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극찬하지만, 주인공인 '나' 랜던 카터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좀 이상한 여자 아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연히 제이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카터는 차츰 제이미에게 빠져들고, 결국 영혼을 나눌 사이로 발전한다. 무도회에 같이 가고, 연극을 같이 하면서 카터는 제이미가 지닌 진정한 아름다움에 완전히 반해 버린다.

 

그러나 제이미는 카터를 사랑하기 전부터 백혈병에 걸려 있었고, 오랫동안 제이미 안에 숨어 있던 그 병은 차츰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카터는 너무 안타까워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저승사자가 제이미 손을 잡고 가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터는 제이미가 죽기 전 그녀와 결혼하여 영혼을 나눠 영원한 연인이 된다. 그 결합은 제이미가 죽고 나서 40여 년이 지난 뒤에도 풀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랜던 카터라는 한 중년 남자가 그 기억을 여전히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니콜라스 스파크스라는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나 그렇기는 하더라도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렸다. 몬태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툼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하다가 둘 다 죽으면서 끝난다. 두 연인은 사랑으로서 오랜 앙숙이었던 두 가문을 화해하도록 했다.

 

줄거리는 좀 많이 다르지만 이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랜던 카터의 할아버지는 온갖 나쁜 방법으로 돈을 벌었고, 제이미의 아버지인 헤그버트 목사는 그 밑에서 일하다가 할아버지에게 크게 실망하고 바른 소리를 하다가 쫓겨났다. 그런 형편이니 랜던 카터의 아버지와 헤그버트 목사가 사이가 좋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카터와 제이미가 사랑하면서 두 집안 사이에 있던 싸늘한 얼음벽은 차츰 녹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카터에게 차가웠던 헤그버트 목사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카터의 아버지도 제이미가 백혈병으로 죽어간다고 하자 치료 장비를 마련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제이미를 살리려고 헤그버트 목사와 카터의 아버지는 힘을 모은다.

 

제이미는 진정한 천사였다. 마을에 따뜻함을 가져다 주고 두 집안 사이에 남아 있던 앙금을 말끔하게 걷어버렸다. 정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제이미를 사랑한 카터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나는 아직 그 기분을 모른다. 아마 평생 모르고 지내다가 그저 이 세상 떠날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사랑을 아름답다고 외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파괴를 불러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혼자서 괴로워하고 감정을 억누르려고 많은 시간과 힘을 써야 하는가. 앞에서도 계속 말했지만 나는 왜 그럴까. 진정한 사랑은 나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 소설을 옮긴 손성경 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강한 한 마디가 수십 갈래로 나뉜 갈고리로 변해 내 심장을 후벼팠다. 책을 덮은 뒤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나는 과연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인가? 내가 지니고 있는 이 감정은 그저 남에게 피해만 주는 집착일 뿐인가? 이 따위 것을 가지고 있어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런 형편이니 내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런 극단에 치우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무 무서운 일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소설을 읽었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도 이 소설에 걸맞은 생각을 좀 하고 싶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어렵고 운도 따르지 않는 것 같다. 이 소설이 어찌나 내 마음을 심하게 자극했는지, 제이미만 생각하면 기운이 쭉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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