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둑맞은 편지 ㅣ (구) 문지 스펙트럼 5
에드가 앨런 포 지음, 김진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때 어머니께서 '세계명작전집'을 사 오셨다. '파리대왕', '보이지 않는 침입자', '잃어버린 세계', '보물섬', '걸리버 여행기', '파리대왕', '카르멘', '어린 왕자'……제법 많은 작품을 읽었는데 그 가운데 '모르그가 살인사건'도 있었다. 그 작품 덕분에 나는 에드거 앨런 포우라는 작가를 알았다. 처참하게 죽은 부인과 그 딸을 살해한 범인이 오랑우탄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뒤팽이 보여주는 놀라운 연역 추리와 그 기반이 되는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이성에 나도 모르게 반했던 것 같다. 그 때까지 나는 올바른 이성에는 관심도 없는 철부지였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 때부터 추리소설을 읽는데 재미를 붙인 나는 '바스커빌가의 개', '얼룩끈', '오리엔트 급행열차 살인사건', '사자의 갈기', '괴도 루팡', 특히 에드거 앨런 포우가 쓴 소설을 모두 읽어보고 싶어서 나중에 '마리로제 살인사건'도 읽었다. 세월이 흐른 뒤 대학교 2학년 때 드디어 뒤팽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이야기인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를 원서로 읽었다. 이는 매우 독특하고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대부분 추리 소설에서는 범인을 전혀 알 수 없고 도저히 단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궁금증만 불러 일으키는 것만 몇 가지 알 수 있다. 탐정은 사건을 조사하면서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내고, 그것들을 연결하고 그를 바탕으로 추리하여 결국 범인을 찾아낸다. 그 뒤 범인을 궁지에 몰아붙이는 탐정을 바라보면 매우 후련한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도둑맞은 편지'는 대부분 추리 소설이 보여주는 이런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뒤팽을 찾아온 경시총감은 편지를 훔쳐간 범인이 D 장관이라고 대뜸 밝힌다. 편지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면 편지 주인인 여왕이 매우 곤란해지기 때문에 범인을 알면서도 체포할 수 없다. 그래서 경시총감은 부하들을 동원해 D 장관이 사는 집을 몰래 샅샅이 수색하지만 결국 편지를 찾아내지 못한다. 경시총감이 저지른 잘못을 알아챈 뒤팽은 즉시 편지를 찾아내 그에게 돌려주고 소설에서 뒤팽과 함께 살고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나'에게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도둑질해온 편지를 다시 도둑질하는 순환 구조가 매우 흥미롭다. 이는 소설 배경으로 깔려 있는 정치 대립 구도를 알고 있어야 깨달을 수 있다. 편지를 전혀 모르는 왕과 왕 때문에 편지를 어쩌지 못하는 여왕 사이에서 D 장관은 제 3자이다. 그리고 편지를 도둑맞은 여왕과 편지를 훔친 D 장관 사이에서 뒤팽은 제 3자이다. 제 3자가 편지를 훔치고 또 훔치는 구조가 나타난다. 이 구조 속에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이는 매우 독특한 구성이다. 보통 추리 소설에서는 사건에 이처럼 직접 끼어드는 제 3자는 없다. 탐정과 그를 돕거나 그에게 협조하는 사람들, 그리고 범인과 그를 돕거나 그에게 협조하는 사람들이 대립 구도를 이룬다. 하지만 '도둑맞은 편지'에서는 제 3자가 사건에 직접 끼어들어 범인이 되고 사건을 해결하기에, 이와 같은 독특한 구조가 나타날 수 있다. 뒤팽이 탐정이고 D 장관이 범인이라고 그저 단순하게 말하기도 곤란하다. D 장관이 보기에는 뒤팽도 자기 편지를 훔쳐간 범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독특한 구조는 지금까지 전혀 접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상당히 즐거웠다.
배경과 구조를 이해하기는 제법 재미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있다. 바로 편지를 경시총감에게 넘겨준 뒤 뒤팽이 '나'에게 하는 말이다. 경시총감이 저지른 잘못이 왜 나타났는지 설명하면서 뒤팽은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과학과 철학과 형이상학이 복잡하게 얽힌 설명을 내놓는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상식과 법칙과 편견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경시총감은 편지를 숨길 때는 남들이 볼 수 없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길 것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결국 가장 평범한 곳에 약간 위장되어 보관되어 있던 편지를 발견하지 못한다. 적용되지 않아야 할 곳에 적용되는 원칙은 전혀 쓸모가 없다. 부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전체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나무를 관찰하는데 지나치게 매달리면 숲은커녕 다른 나무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좀 더 깊이 있는 논의는 나중에 따로 써야겠다.
여러모로 생각할 점이 많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마리로제 살인사건'에서 끔찍한 시체 이야기만 들으면서 약간 거북했는데, 에드거 앨런 포우는 내 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도둑맞은 편지'에서 독특한 구조와 흥미로운 설명으로 속을 풀어줬다. '도둑맞은 편지'를 읽다가 추리 소설이 갑자기 어찌나 그리워졌는지 감상문을 쓰다가 셜록 홈즈 전집을 계속 뒤적거렸다. 결국 '사자의 갈기'와 '얼룩끈'을 단번에 읽어치웠다. 연애 소설 따위보다는 확실히 머리가 즐겁다. 어떤 때는 머리가 좀 아프고 읽기가 싫어질 때도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