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 개정판
베티 스미스 지음, 김옥수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기말고사를 대충 끝낸 뒤 오랜만에 집에 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잘 익은 열무김치와 배추김치, 콩 건더기와 무와 두부 조각이 떠 있고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와 양념장으로 무친 취나물이 차려진 밥상을 받았다. 다음 날 오후에는 논에 잡풀을 뽑으러 갔다. 사실 넓게 펼쳐진 들과 산과 시내와 논에 있는 생물을 관찰하느라고 일에 집중하지도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변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시내에 산책을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감리교회와 못 보던 가게 몇 군데가 새로 생겼을 뿐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아직 내가 세상에서 산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여유롭게 길을 걸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영향을 준 모든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특히 깊이 생각했다. 까닭없는 방황과 분노와 절망으로 온 가족이 얼룩졌던 시절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자세하게 적기도 싫지만, 한편으로는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오른다.

그런 욕망을 지니고 있기에 성장 소설이나 자서전이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것 같다. 주인공이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마침내 행복과 성공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즐겁다. 힘들 때 그런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런 힘든 일이 행복과 성공을 키우는 밑거름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삶을 모른다. 그렇게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 하는 말과 이야기에 나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빈부 격차가 가장 크기로 유명하다. 몇몇 사람들이 최고급 캐비아와 포도주를 즐길 때 끼니를 제대로 때우기도 힘든 사람들이 배를 움켜쥐고 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가는 현실은 가슴을 매우 아프게 한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초강대국으로서 엄청난 경제력을 지니고 있는 지금도 미국 빈민가에서는 하루 한 끼마저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이 고픈 배를 움켜쥐고 방황하고 있다. 그런데 그저 새로운 대륙에 있는 평범한 나라일 뿐이었던 시기에는 과연 어떠했을까? 피아노를 가르쳐 준 뒤 집에서 대접하는 차로 연명하는 부인. 중산층이 흔히 차리는 식탁에 나오는 요리만 못한 특별 요리. 크리스마스 나무를 받으려고 큰 트럭 뒤에 진을 치는 사람들. 가난에 지쳤고 아동심리학과 아이 인격 존중 따위는 전혀 모르는 형편없는 교사들에게 매질을 당하는 아이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그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1900년대 초기에 소시민들이 보여준 애환이 이 소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이 가지는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처한 환경에 만족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과 자기를 견주어 보면서 자기 삶에 만족하려고 한다. 나도 그 방법을 매우 자주 쓴다. 소설을 읽는 것은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저 생각하는 것보다는 도움이 된다. 1900년대 초기에 뉴욕 빈민가에는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 빈민가에서 주인공 프랜시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토요일에만 소혀 한 덩이와 달콤한 롤빵이라는 특별 요리를 먹었고, 형편없는 학교에서 매질을 당하기 일쑤였고, 열네 살밖에 안 된 나이에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프랜시는 꿋꿋하게 자랐다. 지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를 다녔고 동생을 보살폈고 집안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도왔다. 결국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사랑도 찾으면서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꾸려갔다. 그런 프랜시에게 어린 시절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이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내가 세상에 처음 나타난 뒤 지금까지 보낸 시간들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렇다면 내 어린 시절은 주인공과 견주어 봤을 때 어떠한가? 내가 도대체 주인공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항상 주인공과 나를 견주면서 스스로 던지는 물음이다. 답은 확실하다. 하지만 내가 여러모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기에 여전히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럽기도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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