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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평점 :
-20251006 황정은.
종일 비가 내렸다. 밤이 되어도 내린다. 보름이지만 둥그런 달은 볼 수 없다. 보이지 않아도 달이 뜨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빗물 위에, 구름 위에 열심히 빛을 반사하고 있다. 1997년 추석에는 개기월식이 있었다. 외할머니댁 마당에 자리 잡고 앉아 기다렸다. 언제 가려져? 하다가 잠시 졸다 깨보니 벌써 이만큼 그림자가 달을 가렸다. 지구 그림자에 가리나, 구름에 가리나, 달은 그대로인데 우리는 어떤 때는 가리기를 기대하고, 어떨 때는 가리는 걸 아쉬워 한다.
우리 엄마도 나를 가졌을 때 달꿈을 꾸었다 하는데, 소설 속 나나는 태몽을 아주 많이 꾸고 커다란 달이 창에 가득차는 꿈도 꾼다. 추석날 이 소설을 읽으니 소설이 대신 달도 보고, 성묘도 가고, 제사도 지낸다. 아직은 가까운 누군가 죽음으로 떠나간 경험이 없고,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듣길 바랄 만큼 못 만나 그리운 이도 없다. 황정은 소설은 5년 전에 연년세세를 마지막으로 읽었는데, 이 소설에도 순자씨가 나오고, 외진 곳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는 어머니가 나오고(그것도 순자씨), 진짜 혈연은 아니지만 너무도 다정한 오누이 같은 세 사람, 나비바, 소라, 나나, 나기가 나온다. 소라랑 나나는 진짜 자매이긴 하다. 나는 내 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고, 서로 애틋하지도 않고, 명절이라고 서로 만나지도 않고, 뭐 그래서 자매끼리 왕래하고 친한 남들을 보면 신기하다. 우리가 별난 거겠지. 우연히 이웃이 되었다가 나이를 먹도록 서로 챙겨주고 친한 셋이 역시나 신기하고 부럽다. 나나의 사랑도, 나기의 사랑도 그렇게 좋은 것은 못 된다. 밀어내야 하거나, 계속 불러도 답이 없는 사랑은 그것도 사랑이겠지만 고통이 크고 행복하고는 멀어지니까.
꽂혀 있는 걸 보고 오래 내버려둔 게 눈에 걸려서 읽었는데 왜 읽었는지 모르겠다. 달 보는 대신이었던 같다. 그리고 나는 계속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누구에게든 말해주고 싶다.
+밑줄 긋기
-뭘 하며 걸었어?
라고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애자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야기했지, 라고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느 것 하나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기억나는 것이 없느냐고 재차 묻자 그건 말이지, 라고 애자는 말했다.
너무 소중하게 너무 열심히 들어서 기억에 남지 않고 몸이 되어 버린 거야.
몸?
들었다기보다는 먹은 거야.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남김없이 먹고 마셔서, 일체가 되어버린 거야. (9, 몸이 된 이야기들.)
-있지 인간이 조그만 덩어리도 되지 못하고 부서지고 흩어진 채로 형체도 없이 다만 한줌 무더기가 되고 말 때 그럴 때 인간은 어디에 있다고 해야 좋으니? 무엇으로 있다고 해야 좋으니? 어디가 어디라는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고 내가 만졌던 목, 내가 매달렸던 어깨, 내가 만졌던 팔꿈치, 내가 들여다봤던 눈, 둥근 턱, 내가 쓰다듬었던, 따뜻한 머리, 내 이름을 부르고 너희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내던 몸, 생각하고 기억하고 감각하던, 내 사랑, 그 사랑의 몸, 그 몸이 도저히 몸일 수는 없는 형태로 흘러내렸을 때, 그럴 때 그는 어디에 있니?
영혼은 어디에 있니?
어디에 있다고 믿어야 좋으니? (26, 쇳물, 반죽, 무더기, 어쩌면 덩어리가 된 몸. 죽음을 너무 홀가분하게 생각하지 말아야겠어.)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187)
-공룡이 사라졌잖아.
어.
멸종했잖아.
멸종했지.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 서서히 사라진 거야.
꽤 기네.
길지.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221-222)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