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는 없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41
서효인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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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1 서효인.

나는 결국 파편화된 이미지나 느낌보다는 산문시를 좋아하고, 사실 산문을 좋아한다. 운문형 인간이 못된다. 못 알아 들으면서도 좋은 글도 있지만 대체로 못 알아들을 걸 써 놓은 걸 보면 짜증이 난다. 부족한 나한테도 똑똑한 쓴 이한테도 그렇다. 나는 흩어진 글을 좋아한다. 그런데 사실 운율도 좋아해. 나도 모르게 라임을 맞춰 글을 쓰고 말을 해. 그래도 작사가나 랩퍼나 시인은 될 생각도 못 했다. 말장난을 섞어 주접 떠는 독후배설가가 되었다. 책들은 작가들은 원통하겠지. 아이고 내가 저놈 간식 거리나 되려고 숱한 밤낮을 불태웠던가. 입가심조차 못되고 잊히고 읽히지 않는 글은 더 많으니까 그냥 만족하세요.

두 권의 소설 머릿 부분을 읽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소설을 좋아한다면서 나는 늘 소설 읽기를 망설인다. 그래서 과학책도 읽고 시집도 읽게 되었다. 이번에도 또 소설을 어떻게 빠져나갈지 기웃대다가 우연히 얇으니까 하고 가볍게 꺼냈는데, 시가 많지 않은 시집에다 마지막에는 시인의 에세이가 한 편 낀 구성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좋았다. 결이 맞다, 라는 너무 자주 쓴 말 말고 다른 뻔하지 않은 적확한 표현을 쓰고 싶다. 세대론 같은 거 믿지도 매이지도 않고 싶은데, 사실 내 또래 사람들 이야기가 제일 잘 들리고 또 그 사람들이랑 이야기도 가장 잘 통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어느 나이부터는 내 또래를 새로 만나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 오래전 알던 이들도 다들 애키우고 돈벌러 다니느라 바쁜듯하다. 그래서 책으로라도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21세기까지 아직 안 죽고 비슷한 걸 보고 비슷하게 자라 각자의 사정을 안고 아이를 키우거나 키우지 않고 자기 자신만이라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의 글이 반가운 것 같다. 반가워만 하면 또 멍청이가 될 것 같이 마냥 가볍고 따뜻하고 그런 시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래서 또 반가웠던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죽음을 알리는 글이 존재하는 게 나는 반갑다.

+밑줄 긋기
-완전한 새로움이라는 건 가능한가
끝과 시작이라는 말
끝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말
그해에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언제나 핑계가 되는 일은 수치스럽다
수치심을 알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처음이자
끝으로
새로운 시작 따위
등산로 입구 쓰레기통에 버렸다
불이 나면 안 되니까
정상에 닿기 전에 해가 떠버려서
사위가 서서히 밝아졌다
시작도 끝도 완전한 새로움도 다 헛소리라는
좋은 예시였다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에
효도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 칭찬받았다
토끼봉을 돌아 올라가는 코스에
아무렇게나 스틱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가득 찼는데
서로를 베는 걸까
동강 내는 걸까
두꺼운 겨울옷 안에 놓인 상흔을
내장이랑 같이 쏟아버리는 게
새해의 첫 계획인 걸까
왜 아직도 모르지
신정 아침처럼 반복되는 거짓과 진실을
나는 당신에게 화가 나 있다
이 화를 다스리지 못해 슬프다
이런 감정은
긑이 휘어진 칼처럼
완전한 새로움
을 방해할 뿐인데
화는 끝도
시작도 없는데
등산로의 살얼음이
우리를 비추었다
새로 뜬 해가 녹일 수 있는 게
없었다 살얼음 아래에는 진짜 얼음이
차이가 있는 불행을 모두 쓸어버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실족사라 불렀지만
가족이라는 것은 언제나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완전히 새로울 가능성이 줄어든다
12월31일과 1월 1일의 차이를
칼로 무를 자르듯
칼로 물을 베듯
산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일찌거니 떠오른 해가 지껄이는
거짓말에 아버지와 나는 녹아서
목욕탕에 때를 벗기러
가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 모든 때에
새로이 내 몸에 나앉을 새로운 때에게도
시간에게도
끝도 시작도 없을 아무 때에
실족할까봐 벌벌 떨며
다음 계단에 난 칼 위에
발바닥을 내미는
(p.30-34, ‘등산로에서’ 전문. 효 가 이름에 들어가는 사촌 둘을 보며 나도 그랬더라면 아마도 개명했을 거야, 했다. 이 시는 왜 내 마음을 등산 지팡이로 계단의 칼로 베어내는지 모르겠는 건 아니고 잘 알겠어서 서글프다. 시간이 지나면 또 무뎌질까 했는데 아직 아닌 걸로. 다음 시 ‘선산에서’의 개를 매단 장면도 제삿날도 내가 아는 광경이라 아 이제 다 베끼기는 너무한 거 아냐 그냥 잘 읽기나 하자 했다. 하다가 결국 베끼고 싶어졌어. 으앙)

-천변에는 개를 거꾸로 매달고
때려서 죽여서 먹어서 행복한 인간들이
있었다 살코기가 타는 냄새
무안 일로에서 온 먼 친척 어르신을
당숙모라 불렀는데
골초였다
개의 살을 태우는 연기 하나와
담배 태우는 연기 여럿이 섞여 흘렀다
개 짖는 소리처럼
받아주지 않는 곳으로 천천히
당숙모는 선산 아래에 터를 닦은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데 평생을 썼다고 한다
그에게는 연기란 흔한 것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연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 죽은 개의 제사를 지내고 싶다.
개를 먹는 것이 인간의 증명이 되고
제사를 지내는 게 인간의 증명이 되니까
인간 중의 상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 개를 사랑했기 때문에
여러 인간을 증오했기 때문에
제사 후에는 다음 제시가 온다
죽음이 적체되어 산 자들의 당숙모를 괴롭히고
당숙모가 홀로 키우던 개를 공터에서
때려죽이고
앞마당에서 개의 삶을 삶는 사람들도
죽으면 또다시 제사를 지내겠지만
나는 거기에 절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숙모는 골초였고
어느 날 벌초를 미룬 선산에서 비롯된 불이 번져
개의 고향을 거개 태우고
개의 등허리를 몽둥이로 박살 내던 삼촌들도
질식사했다 고기 타는 냄새를
모르는 체하느라 킁킁거리던
개들이 당숙모의 곁을 빙글빙글 돈다
건강하고 날렵한 꼬리들이
연기 사이로 살랑거린다
당숙모가 연초를 태운다
산이 터져 나간다
새로 지을 고속도로가 지나갈 자리였다
보상금의 분배를 두고
한때 개를 나누어 먹던 많은 이들의
정과
의리와
명분이
연기보다 못하게 가벼이 흩어졌다
멀리 개가 짖는 소리
가까이 사람 싸우는 소리
당숙모는 그 후로 이십 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서해안고속도로 옆에서 골초로 살아남아
양껏

태워버렸다고 한다
(p.36-39, ‘선산에서‘ 전문. 이 시가 너무 신산해서 와 아는 맛이잖아, 하고 결국 베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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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0-12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운문형 인간이 못 되면서, 못 알아들을 걸 뻔히 알면서도, 시집을 펼치고 있네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5-10-12 10:02   좋아요 0 | URL
그러면서도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니까 안 읽는 안 운문형 인간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ㅋㅋㅋ
 
이것은 천재의 사랑 타이피스트 시인선 9
양안다 지음 / 타이피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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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1 양안다.


십 년 만이라는 뮤즈의 인천 콘서트에는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주경기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내가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이렇게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에 일부러 돈까지 내고 찾아오지 않았을 거야. 20여년 전에 내가 이 음악가들을 좋아해서 해외직구로 시디를 사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미디로 음원을 만들고, 그럴 때 여기 모여든 애들 대부분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내가 잘못 찾아온 것 같았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좋아하면 나까지 좋아할 필요는 없잖아? 그저 형님들도 나이가 드셨군요. 그런데도 20년 전 노래를 여전히 하고 계시네요. 여전하시네요. 전 여전하지 못합니다. 그런 걸 확인하러 온 걸까.

그러니까 나는 음악가도, 소설가도, 시인도, 무엇이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너무 많은 남들이 좋아하기 시작하면 난 이만 갈게, 하는 버릇이 있다. 반대로 남들이 사랑하던 사람은 내내 그 열광을 환호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한물 간 뭔가가 되면 뒤늦게 뒤적뒤적 남들 몰래 좋아해야지, 하는 버릇도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양안다가 대중적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된 것처럼(사실 잘 모른다 얼마나 좋아하는 애들이 많은지는), 내가 좋다고 할 때는 별로 읽는 사람이 없던 것처럼 떠드는 것 같은데, 잘 모른다. 시인이 등단하고나서 십 년이 다 되어서 처음 읽었잖아. 사실 하나도 모른다. 이번 시집은 또 결이 많이 달라졌고, 유럽 잔혹 동화 같은 느낌도 났고, 더 어린아이의 어조 같은 기분도 들었는데 아 난…이제 진짜 그만 읽어야겠어 새로 나오는 건...하는 기분이 책의 절반도 읽지 않았을 때 들었다. 나는 이렇게 작가들과 작별인사를 아무도 모르게 저혼자 요란 뻑쩍지근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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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은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을 무시하잖아요. 오직 그들의 아버지의 아름다움만…...
(…)
보고 싶어.
난 지금은 예쁘기만 하고 멋이 없어.
여름만 잘 버티고 있어.
세상을 속이고 가을에 갈게.
(‘델피니움 꽃말’ 중. 검색해본 꽃말은 ˝당신은 왜 저를 미워하나요(원망), ˝제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경솔, 자유, 깊이 생각치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숙명˝ 꽃말이란 무슨 꽃이든 어딜 가든 일치하지 않고 중구난방 나오는 대로 적어 놓은 기분이다. 누가 만들까 저런 꽃말은. 시인 되고 싶은데 못 된 꽃집주인? 원예농업인? 단체로 나를 때리러 오는 소리...손에는 모종삽 하나, 호미 하나씩 들고...)


-누군가가 불안을 내다 버리기 위해 인간을 만든 건 아닐까. 뒷골목에 쓰러져 있는 당신을 내가 주워 왔다. 불안을 전부 게워 내라고 두들겨 주었지. 도대체 나는 누가 내다 버린 불안이지? 있잖아요, 온 세상이 잠들었을 때에도 나는 어지러움을 느껴요. 나 빼고 모두가 춤을 추는 기분이고 나 혼자 쓰러지죠.

그렇다면 당신은 무용수가 버린 불안인가 봐.
(‘하늘은 다홍빛 불타는 시간에’ 중. 나한테 버리지 마 임마)


-모든 생물은 꿈을 꾼다. 다만 그것이 꿈인지 모를 뿐.

이만 갈까요?

선전용 전단지가 흩날리고 있었다. 영원한 저항은 없지. 그것은 단지 믿음.

거리를 이롭게 하는 것들의 목록-마드모아젤이라 부르지 않는 것. 낡은 만화책을 돌려 보는 것. 보고 또 보는 것. 악인들이 원하지 않는 말을 하는 것. “맞아. 우린 미친 마음의 주인이야!” 유행가, 유행가를 반복하지 않는 것.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를 구속한다니?
목동은 왜 양을 키우는 걸까. 약을 오남용하는 애들은 왜 꿈속을 헤매는 걸까. 가짜인 너. 가짜 마음을 가진 너.
부모님이 너에게 평범한 이름을 주신 거에 감사하렴. 죄를 지어도 누구도 모를 테니. 나는 거리의 마음을 팔지 않아. 너나 나가 죽으렴.
인쇄 활자.
2층 건물.
갓난아기가 발코니를 이해하지 못해서 기어간다. 어어, 하다가 달려가는 사람들. 간신히 아기를 받아 내는 사람들.

-눈을 감으면 가끔 당신이 보여요.
-그게 내 영혼이에요. 당신이 훔쳐 간.

한 침대에서 같이 깨어날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요. 많은 걸 이해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좋아서요.

세상에는 미친 사람들이 많아서요. 그게

나였을까요?

나는 선한 마음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연구했어요.
그것은 악행의 반대편으로 걷는 것.

아름다움. 아름다움.

아니요. 나는 그렇지 않아요. (118-119, ‘캐노피 마음’ 전문. 내가 좋아하는/했던 시 속 단어들을 한 편에 꽉꽉 그런데 붐비지 않게 담아 놓은 시를 발견해서 아휴 이걸 만나려고 시집의 절반 이상을 참고 읽어야 했구나...전문 베끼고 싶은 시를 하나라도 발견해서 다행이야 싶었다. 이러면 헤어질 결심이 흔들린단 말이지.)

-화단에 죽은 길고양이를 묻어 주는 일.
우리보다 먼저 갔으니 천국에선 우리가 동생이겠구나. (161, ‘Fin’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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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은 어떻게 내가 되었을까 - 지구, 인간, 문명을 탄생시킨 경이로운 운석의 세계
그레그 브레네카 지음, 이충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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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8 그레그 브레네카.

원제는 Impact, 충격, 충돌이다. 번역판 제목을 보면 별, 그러니까 항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부제를 보면 사실 운석에 관한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자세히 안 보고 (번역자 선생님만 보고 믿고) 고른 나는 좀 낚였다. 운석은 별 쪼가리일 수도 있고, 행성이나 위성(달) 쪼가리, 행성이 미처 못된 미행성? 우주 먼지? 이런 걸 수도 있다. 초신성 폭발이니 이런 게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긴 나왔는데 그 영향으로 태양계가 생겼을 수도 있을 걸? 뭐 이 정도였다.

이 책을 읽고도 아직도 운석, 유성, 별똥별 구별 못하겠는 거 보면 제대로 안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정리해 보면, 대기 밖 우주에서 지구 대기로 암석 물질 같은 게 들어오면서 마찰열로 타면서 빛나는 게 유성=별똥별, 그게 지구 표면과 충돌하고 남은 암석, 돌멩이가 운석이다. 와 짝짝짝짝.

책의 초반 절반 정도는 운석의 충돌과 관련한 역사적 사례들이나 각 지역과 시대별 사람들의 반응, 운석연구사 같은 걸 적어 놨다. 운석과학사에 가까운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리고나서 운석이 생명 구성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 달이나 화성에서 떨어져 나온 운석이 왜 중요한지, 운석을 캐는 일의 현실적인 어른의 사정들(돈 문제, 국가의 제도나 법 문제), 운석 피해에 대해 내가 어려서 히트 쳤던 아마겟돈이나 딥임팩트 같은 영화처럼 또는 그와 좀 다르게 대처할 방안 같이 어린이들이 궁금해할 법한 걸 적어 뒀다.
그러니까 대부분은 아직 연구 중이야! 추정할 뿐이야! 더 많은 연구자의 연구와 기금이 필요해! 그래도 운석 덕에 알게된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러면서 운석학 연구하는 사람이 일반인 대상으로 이해할 만큼만의 썰을 풀어주는 책이다. 오히려 책 말미 거의 100페이지 가깝게 붙은 부록이 과학적 지식이나 연구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사실 이 부분부터는 나도 너무 어려워 보여서 그냥 슉슉 훑어만 보고 뭐? 콘드라이트? 아콘드라이트? 콘푸라이트? 이러고 말았다.

저자는 말장난을 제법 하고, 나는 유머를 좋아하는 과학 저자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약간은 아재 개그 같이 굳이? 싶은 비유나 표현이 많았다. 썰렁한 남의 이름이나 운석 이름 개그 같은게 특히 좀 그랬다. 운석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나 사례를 상세하게 다뤄주는 건 좋은데, 본격적인 분석에 관한 건 말해도 모를 걸? 이러고 일반인 수준에 맞춰 설명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흥미거리 위주로 책 대부분을 구성하고, 끝에 어려운 건 읽을 놈만 읽어라,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철의 제련 기술 발달하기 전부터 고대인들이 운석의 제법 순수한 (그리고 니켈 많이 섞인) 철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유물들도 알려주고, 운석이 물과 아미노산을 지구에 공급했을 가능성, 운석을 통해 우주의 역사나 태양계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가능성도 알려줬으니 뭐 개그만 치다 끝난 건 아니다. 과학 교양서 제법 읽는 나놈 보기엔 그러니까 막 전문적이고 깊이 있진 않은데, 재미로 읽기에는 나쁘지 않고, 그런데 좀 변죽만 울리다 끝나는 기분도 들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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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계와 이웃 행성계들에는 놀랍도록 기이한 환경들이 존재한다. 태양계 안에서도 메탄 호수와 얼음 화산, 지하 바다 같은 것이 존재하며, 가까운 행성계들에는 철이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천체와 핵이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행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렇게 낯선 환경에서는 생명이 어떻게 나타날지 예측하기가 아주 어렵다. (186)

-나는 운석에 심지어 기본적인 유기 분자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깜짝 놀랐고, 우리 DNA와 RNA의 주요 성분이 우주 암석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운석 물질에 이 유기 분자들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지구에서 생명이 발달하는 과정에 운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설령 운석의 영향이 생명의 기원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초기 지구에 운석이 공급해준 유기 분자들은 적어도 생명과 그 구성 성분의 진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08-209)

-수많이: 수효가 매우 많이 라는 뜻의 부사. 번역에 여러번 사용되었는데 용례를 처음 봐서 사전 찾아 놨다.

-하지만 우주 공간에는 해저 퇴적과 판 구조론이라는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행성들 중에서 바다가 있고 판들의 활동이 일어나는 곳은 지구밖에 없다. 알려진 운석들 중 대다수는 진공 상태의 우주 공간에서 가스와 먼지가 서로 들러붙으면서 생겨나 대체로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했거나 혹은 전체가 거의 다 고체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운석은 기묘한 암석이다. (341, 그래서 내가 지구과학에서 배운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하고는 다른 분류체계가 필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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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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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6 황정은.

종일 비가 내렸다. 밤이 되어도 내린다. 보름이지만 둥그런 달은 볼 수 없다. 보이지 않아도 달이 뜨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빗물 위에, 구름 위에 열심히 빛을 반사하고 있다. 1997년 추석에는 개기월식이 있었다. 외할머니댁 마당에 자리 잡고 앉아 기다렸다. 언제 가려져? 하다가 잠시 졸다 깨보니 벌써 이만큼 그림자가 달을 가렸다. 지구 그림자에 가리나, 구름에 가리나, 달은 그대로인데 우리는 어떤 때는 가리기를 기대하고, 어떨 때는 가리는 걸 아쉬워 한다.

우리 엄마도 나를 가졌을 때 달꿈을 꾸었다 하는데, 소설 속 나나는 태몽을 아주 많이 꾸고 커다란 달이 창에 가득차는 꿈도 꾼다. 추석날 이 소설을 읽으니 소설이 대신 달도 보고, 성묘도 가고, 제사도 지낸다. 아직은 가까운 누군가 죽음으로 떠나간 경험이 없고,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듣길 바랄 만큼 못 만나 그리운 이도 없다. 황정은 소설은 5년 전에 연년세세를 마지막으로 읽었는데, 이 소설에도 순자씨가 나오고, 외진 곳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는 어머니가 나오고(그것도 순자씨), 진짜 혈연은 아니지만 너무도 다정한 오누이 같은 세 사람, 나비바, 소라, 나나, 나기가 나온다. 소라랑 나나는 진짜 자매이긴 하다. 나는 내 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고, 서로 애틋하지도 않고, 명절이라고 서로 만나지도 않고, 뭐 그래서 자매끼리 왕래하고 친한 남들을 보면 신기하다. 우리가 별난 거겠지. 우연히 이웃이 되었다가 나이를 먹도록 서로 챙겨주고 친한 셋이 역시나 신기하고 부럽다. 나나의 사랑도, 나기의 사랑도 그렇게 좋은 것은 못 된다. 밀어내야 하거나, 계속 불러도 답이 없는 사랑은 그것도 사랑이겠지만 고통이 크고 행복하고는 멀어지니까.

꽂혀 있는 걸 보고 오래 내버려둔 게 눈에 걸려서 읽었는데 왜 읽었는지 모르겠다. 달 보는 대신이었던 같다. 그리고 나는 계속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누구에게든 말해주고 싶다.

+밑줄 긋기
-뭘 하며 걸었어?
라고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애자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야기했지, 라고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느 것 하나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기억나는 것이 없느냐고 재차 묻자 그건 말이지, 라고 애자는 말했다.
너무 소중하게 너무 열심히 들어서 기억에 남지 않고 몸이 되어 버린 거야.
몸?
들었다기보다는 먹은 거야.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남김없이 먹고 마셔서, 일체가 되어버린 거야. (9, 몸이 된 이야기들.)

-있지 인간이 조그만 덩어리도 되지 못하고 부서지고 흩어진 채로 형체도 없이 다만 한줌 무더기가 되고 말 때 그럴 때 인간은 어디에 있다고 해야 좋으니? 무엇으로 있다고 해야 좋으니? 어디가 어디라는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고 내가 만졌던 목, 내가 매달렸던 어깨, 내가 만졌던 팔꿈치, 내가 들여다봤던 눈, 둥근 턱, 내가 쓰다듬었던, 따뜻한 머리, 내 이름을 부르고 너희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내던 몸, 생각하고 기억하고 감각하던, 내 사랑, 그 사랑의 몸, 그 몸이 도저히 몸일 수는 없는 형태로 흘러내렸을 때, 그럴 때 그는 어디에 있니?
영혼은 어디에 있니?
어디에 있다고 믿어야 좋으니? (26, 쇳물, 반죽, 무더기, 어쩌면 덩어리가 된 몸. 죽음을 너무 홀가분하게 생각하지 말아야겠어.)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187)

-공룡이 사라졌잖아.
어.
멸종했잖아.
멸종했지.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 서서히 사라진 거야.
꽤 기네.
길지.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221-222)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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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 - 브로콜리너마저 덕원의 가사, 노래, 글을 짓는 마음가짐
윤덕원 지음 / 세미콜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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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5 윤덕원.

윤덕원의 노랫말을 좋아했다. 좋아한다, 라고 하지 않는 건 김미월 선생님의 소설에서 고백은 과거형으로 하라고 하셔서 그냥 한 번 해 봤다.
머리를 긁적이며 학생회관의 밀크셰이크를 들고 멀어지는 뒷모습, 민중가요 노래책 한 페이지에 아침 면도로 벤 자리에 붙였던 걸 옮겨 붙인 지저분한 반창고(하필이면 아침이슬에다), 빡빡이 머리를 하고 잔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밥도 안 먹고 시무룩하게 앉아있던 구석 자리…
적어두지 않아도 휘발되지 않던 주변 이들에 대한 어떤 기억들이 너무 많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 지인들은 자기 동생 이름이나 생일까지 외우고 있는 나를 파묻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흑역사 녹음기 같은 넌 죽어라, 하고.

그런 반짝이는 기억력은 유효기간이 있었다. 흐릿하고 희미해진 걸 깨닫고 나서야 아 내가 뭘 잃었구나, 잊었구나 싶었다. 그나마 적어둔 흔적들을 찾았을 때, 내게 이런 일과 기분이 있었구나, 그러고는 또 잊는다.

아마도 잊을 건 다 잊고, 나머지를 잊지 않으려고 적어둔 일기 같은 글들이어서 생각보다 잘 읽혔다. 노래를 쓰고 글을 쓰고 그걸 입에 올리는 사람의 글과 생각은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니까 제목의 대충은 어떤 다짐 같이 느껴졌다. 완벽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읽는 이들을 다독이는 말로 대충을 써 먹을 수도 있구나. 계속 쓰고 부르는 사람으로 삶을 이어가는 게 존경스럽고, 앞으로도 오래 그런 사람으로 잘 해내가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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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세심하게 글을 다듬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되 읽을 만한 글도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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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때로 기억은 엄청나게 힘이 강하기도 하잖아? 그때를 증명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누군가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떠오르는 일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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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어색할 수 있는 표현을 곱씹어보고, 다른 입장에서 어떻게 들릴지 예상해서 뺄 수 있는 표현을 최대한 삭제한다. 함량 미달의 단어를 더 채워 넣느니 차라리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사의 밀도를 높인다. 노래가 일종의 기원이나 주문(呪文)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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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저의 마지막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끝은 차라리 아름답다. 그러기 쉽지 않은 것이 문제다. 더 해보기 위해서가 아닌 마무리하기 위해 남은 역량을 투입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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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울림을 지닌 단어는 많지만 노래에 담고자 하는 의미는 필연적으로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을 움츠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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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변명만 늘어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은 영영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가능성을 파괴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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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더 좋은 결과물을 얻고 싶다는 순수한 욕심에서 새로운 장비와 악기를 사기 시작했더라도 어느 시점 이후에는 더 비싸고 좋은지와는 별개로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해지는 것 같다. 언제나처럼 반복되는 작업과 연습 과정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쳐갈 때, 새롭게 만난 매력적인 기기들과 친해지는 과정은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꼭 필요하지 않은 악기를 살 때도 많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어떤 기타를 구매해야 하나요?” 하는 질문에 “모양이 마음에 드는 것을 사세요.”라고 답하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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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둥글게 말아서 비닐 포장을 뜯어낼 때 나는 새 책 냄새를 맡으면 아무리 울적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최고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에 이런 확정적인 행복이 주기적으로 있으면 빡빡한 날들을 버티는 데 큰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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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딩을 하면서 마이크를 자주 다뤄본 경험은 방송에서 목소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가창력과는 상관없다…….) 마이크의 작동 방식이나 원리를 안다면 같은 환경에서도 더 좋은 소리를 입력할 수 있다. 녹음할 때 얼굴을 어느 위치로 이동하면 목소리 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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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은 채로 발표된 노래가 계속해서 불러주는 사람에 의해 완성되는 것처럼, 조금 느슨한 마음으로 오래 곁을 지켜 서서히 완성하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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