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발언 -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유민석 옮김 / 알렙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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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0 저자: 주디스 버틀러.

청소년들과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면서 느끼는 큰 고통 중 하나는 언어 폭력에 직, 간접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욕설 자체를 금지한다면 내 일은 욕한 아이들을 하루 백여 명씩 벌주다가 끝날 것이다. 아이들은 서로를 욕설로 호명하고, 혼잣말이라 주장하며 남들 앞에서 욕설이 들리게 크게 말한다. 내 앞에서 크게 욕설을 하더라도 “얘 한테 그런 건데요?” 하면서 옆의 아이를 가리킨다. 어른한테 직접 건넨 욕설이 아니라면 누가 듣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냐 하는 것이다.

욕설과 패드립, 그러니까 상대방의 부모를 들먹이거나 욕보이는 짓이 놀이처럼 행해진다. 그러면서 교사를 도구처럼 이용한다. 저 녀석이 패드립을 했으니 자기 대신 혼내달라고 끝없이 이르면서 수업을 방해한다. 이르는 녀석도 평소에는 서로 같은 짓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일러바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선생이 보지 못한 잘못을 저지른 다른 아이를 혼내는 행위를 하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렇게 누군가를 움직였다는 효능감을 얻으려고 하는 것 같다. 선생이 직접 못 봐서 지도할 수 없다하거나, 직접 지도하려해도 당사자가 끝까지 부인하거나, 사소한 장난이라고 이른 것을 무시하면 이른 아이는 선생에 대해 거의 원한에 가까운 감정과 적대감을 보인다. 사실 상대방이 자신과 자신의 부모에게 뭐라고 했든 쟤는 원래 저러고 나도 걔한테 가끔 그러니까 별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보기에 막아야 할 책임이 있는 교사가 그걸 별일 아닌 듯 대하면, 욕한 아이보다 교사가 더 나쁜 사람이 된다.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 어렵고 괴롭다. 마치 욕설과 비하와 혐오라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비는 기분이다. 나에게 한 말이 아니지만 내 예민한 교감신경은 늘 과활성화된다. 예전 어떤 연수에서 생활지도 전문가라는 경력 교사가 노하우라고 전해준 게 내내 기억에 남는다. 욕설을 들었다면? 무시하라. 못 들은 척 하라. 이렇게 강조했었다. 그러기에는 총알이 너무 많고 너무 크다. 이게 일상이다, 하고 무뎌져야 하는데 그걸 아직도 못해서 나는 부적응자이다.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 들고 바로잡으려 드는 내 정신은 적당히, 무사히 정도로 타협하는 능력을 길렀으면 좋겠다. 하필이면 내 과목은 인권과 자유와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추상적으로 부르짖고 있다. 그 공중에 흩어지는 말들과 현실의 괴리를 버텨내는 것은 쉽지 않다.

삶은 단순해야 덜 불행하지만, 법과 철학과 학문은 일상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간다. 언어가 전달하는 내용에 어떤 행동이 담겨 있는지,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어떤 행동이 되는지, 권력이 언어를 해석하는 방식이 그 언어에 어떤 힘을 부여하는지 묻는다. 이 책에서 주디스버틀러는 ‘혐오 발언’(격분시키는 말, 상처를 주는 말)이 어떻게 생산되고 호명되는 대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다. 다른 학자의 비유와 판례의 법적 해석이 어떤 부분이 문제의 여지가 있는지 따져본다. 그 과정을 눈으로 적당히(책 읽기에서는 타협이 된다. 내 그릇을 이제 대충 아니까) 따라간다.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오스틴의 ‘발언내행위’와 ‘발언효과행위’, 푸코의 ‘주권’, ‘권력’, 마리 마츠다, 매키넌의 포르노 담론, 프로이트의 ‘터부’등을 끌어온다. 배경 지식이 없으니 주해와 저자의 인용을 보고 그런가보다 한다.

‘그거 혐오 발언이야’ 하는 권력이 등장하는 순간 권력은 혐오 발언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혐오 발언 자체가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 논리를 교실에 대 보면, 내가 욕설을 금지할수록 욕설에 힘이 있다고 인정하는 셈인가? 뭐 이렇게 내 방식대로 읽고 있다. 미국은 수정헌법 1조 때문인지 표현의 자유에 극도로 민감하다. 우리나라는 명예훼손이나 모욕에 관한 형법이 있지만, 그 모든 나쁜 말들이 모두 처벌받지는 않는다. 공정하게 법이라는 게 집행된다면 모두들 감옥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교육은 바른 언어 생활, 타인에 대한 존중 같은 걸 계속 말하지만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하위문화가 생기고 계속 유지되고 전승된다. 뭐라도 해야 되니까 하긴 하는데 아무도 듣지 않고 별다른 효과도 없다는 무력감. 이 좌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말로만 내려놓은 인간에 대한 기대를 언제 정말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내 일은 그렇게 시지프스의 바위 굴리기 같다. 그리고 이 책 읽기도 그렇게 바위 굴리기만큼 어렵다. 뭘 알고 읽는 건 아닌 듯한 기분으로 책장 넘겼다.
책 말미에 옮긴이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해제를 달아 주요 내용에 밑줄을 긋고 관련 인용문도 같이 제시해주셨다. 그걸 다 본다고 이 책을 다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하여간에 누가 뭐래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뒤로 넘어가는 건 앞으로 쏘아올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 하면서 용감해지라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피해자가 되지 말고 뒤집어서 되돌려주라고 하는 응원으로 읽고 질질 짜지 말아야겠다.


+밑줄 긋기
-사람은 자신이 불리게 된 그 이름으로 단지 고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처가 되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폄하되고 비하된다. 그러나 그 이름은 또한 또 다른 가능성을 보인다. 다시 말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림으로써 그에게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주어지게 되고, 또한 그는 그 부름을 발생시킨 과거의 목적을 넘어서는 언어의 새로운 시간적 삶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상처를 주는 말의 전달은 그것이 호명한 사람을 고정시키거나 마비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예상 밖의 가능성을 여는 응답을 낳을 수 있다. (13, queer란 말이 멸칭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전복된 의미로 스스로 프라이드를 가지고 사용하게 된 것처럼)

-‘퀴어queer‘와 같은 용어들에 대한 가치 전도는 말이 그 말의 발언자에게 다른 형태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원래의 목적과 반대로 인용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효과의 반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36, 위에서 덧붙일 필요도 없이 결국 제시된 사례)

-발언내행위는 무언가를 말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행하려는 것이다. (…)그의 말하기는 그 자체로 일종의 행하기이다. (…) 한편 발언효과행위는 일련의 결과를 개시하는 발언이다.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것과 생산된 결과는 시간적으로 구분된다. 결과는 언어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야기하거나 성취하는 것”이다. (41, 오스틴의 발언행위 유형 분류)

-어떤 의미에서 관습은 상속된 일련의 목소리들, 즉 ‘나’로서 말하는 타자들의 메아리다.(58)

-혐오 발언을 발언하는 자는 그런 발언이 반복되는 방식에, 그런 발언을 재활성화시킨 것에, 혐오와 상처의 맥락을 재확립시킨 것에 책임이 있다. (61-62)

-인종차별적인 비유는 성별과의 잘못된 비유를 위해 착취되며, 둘 사이의 교차점은 비판적으로 심문되지 않은 채 남게 된다. (84, 이전에 읽은 ‘혐오에서 인류애로’에서 인종차별 문제-성소수자 차별 문제 두 사이의 유비가 많이 나왔다. 성별은 아니고 성적지향에 관한 것이지만, 버틀러는 너스바움의 그런 비유를 비판하겠구나 싶다.)

-주체는 어떤 선별 과정을 통해 언어로 구성된다. 그 과정에서 주체성에 대한 판독 가능하고 인식 가능한 용어가 규제된다. 그 주체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가는 그 혹은 그녀가 전혀 불린 적이 없는 이름에 달려 있다. 언어적 삶을 위한 가능성들은 이름을 통해 개시되고 동시에 배제된다. (86, 나를 부르지 마…)

-즉, 국가는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 (150)

-국가는 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발언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생산한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선을 표시함으로써, 그리고 그 결과 경계선을 구성하며 존속시키는 권력을 보유함으로써 말이다.위에서 논의된 정치화된 일부 맥락들 속에서 혐오 발언에 귀속된 과장되고 효과적인 발언은 주권적인 언어 행위, 즉 자신이 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갖는 언어 행위로 인식됨으로써, 스스로 주권 국가의 발언을 본뜬다. 이런 주권 권력은 혐오 발언이 우리에게서 권리와 자유를 ‘박탈한다’고 할 때 혐오 발언에 귀속된다. 혐오 발언에 귀속된 권력은 절대적이며 효과적인 행위 능력, 즉 수행성이자 동시에 이행성이 된다(그것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행하며 자신이 그 발언에 의해 수신된 자에게 행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행한다). (151)

-애니타 힐이 토머스 판사와 상원 청중들에게 그녀의 주장을 행하려면 그녀는 또다시 증언을 해야 할 것이고, 그 증언은 그 상처를 반복하고, 기록하고, 또다시 말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부당전유에 스스로를 내놓게 될 것이다. 증언과 증언이 기록하는 그 사건을 구별하기 위해 우리는 증언이 수행하는 상처의 반복과 증언이 지칭하는 상처의 수행을 구별해야만 한다. 그런데 만일 증언이 자신의 주장을 하기 위해 그 상처를 반복해야만 한다면, 그리고 그 반복이 행위능력의 어떤 증표로 여겨진다면, 증언을 공모의 고백으로 곡해하는 것은 어떤 구별로도 보호할 수 없는 위험인 것 같다. (182)

-혐오 발언의 결정은 따라서 국가의 문제, 더 구체적으로는 국가 사법부의 문제이다. 어떤 국가에 의해 행해진 결정인 혐오 발언은 이제 또 다른 ‘언어 행위’-법의 언어-에 의해 행해진 결정이 된다. 이런 혐오적인 발언의 존재가 법원의 목소리에 기이하게 의존한다는 것은 혐오적인 발언이 궁극적으로 그것이 결정되는 국가의 발언과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84-185, 꽤 극단의 구성주의라고 해야 하나?)

-혐오 발언을 결정하는 작업을 국가에 양도하는 것은 그런 오용 작업을 국가에 양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종차별적인 욕설과 성차별적인 욕설에 관한 법적 담론이 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욕설들을 재반복하고 재수행하며, 이번에는 국가가 승인한 표현으로 재생산한다. 국가가 어떤 형태의 상처가 되는 표현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권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법적 언어의 정치적인 중립성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192-193)

-말하기가 그 자체로 행하기인 것은 아니며, 그것은 저항되어야만 하는 피해의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말함과 행함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비록 어렵다 하더라도 발언이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피해를 행하는지 말할 수 있는 어떤 이야기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3)

-동성애자는 그의 정의가 타인에게 맡겨져야 하는 자, 그 또는 그녀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자기 정의의 행위가 부정당하는 자, 그의 자기 부정이 군복무를 위한 전제 조건인 자이다. (202, 내가 나라고 말하면 안 되는데, 권력은 내가 나 자신이 말하려던 그 존재라는 것을 말하면 안 된다고 하는 와중에 그 존재라는 말을 반복하게 된다. 이게 뭐야.)

-욕망에 대한 금지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욕망이며, 이러한 기만 자체가 이후 ‘양심’이라고 불리는 것의 시작이 된다. 따라서 ‘양심’의 명사적 형태가 정신적인 실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길들여진 반성적 활동, 즉 자아에 대한 기만, 욕망을 외면하는 욕망의 경로, 그 금지가 욕망 충족의 장소가 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 반복된 내면화의 실천이 정신적인 능력으로서의 ‘양심’에 대한 잘못된 명칭에 해당하는 것이다. (211)

-검열은 자신이 검열하고자 하는 것과 절대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검열은 역설적인 결과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자기 스스로 부인했던 소재와 연루된다. (243)

-즉 인식 가능성의 조건은 그 자체로 권력 내에서 그리고 권력에 의해 형성되며, 권력의 이러한 규범적인 행사는 권력 작용으로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은폐된 형태의 권력 가운데 하나로, 즉 자신의 인식 가능성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자신이 야기하는 판독 가능성의 조건들을 벗어난다. (252, 즉이 세 번 연달아 나왔지만 하여간에 실존을 권력이 (존재를 금지하는 방식으로도) 구성한다는 말로 대강 알아들음)

-비록 배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사용이 대단히 복잡하기는 하지만, 검열이 ‘생산적’인 권력의 형태로 행위하는 방식을 재사유하는 작업을 위해, 나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서 그 용어를 부당 전유할 것을, 그것의 적합한 의미를 부적합한 의미로 전치시킬 것을 주장한다. 나는 그런 전치가 흥미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배제의 행위가 단지 한 번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발생하며, 계속된 배제 행위에 의해 재환기되는 것이 주체의 형성이 발언 가능한 것의 영역이 차지하는 한정된 생산에 엮이게 되는 주된 현장이기 때문에 이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발언의 가능성이 배제될 때 위험에 처해지는 주체의 상황을 설명한다. (260-261)

-우리가 불리는 이름은 우리를 종속시키기도 하지만 행위능력의 장면을 양가성으로부터 생산함으로써 그 부름이 발생한 의도를 넘어서는 일련의 효과들 또한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불리는 이름을 떠맡는 것은 과거의 권위에 대한 단순한 종속이 아니다. 그 이름은 이미 과거의 맥락에서 이탈해 자기 정의의노력으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상처를 주는 말은 그것이 작동했던 과거의 영토를 파괴하는 재배치 속에서 저항의 도구가 된다.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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