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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20260719 저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내 사람은 아픈 걸 싫어한다.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것도 질색한다. 그게 인간의 디폴트 값인가? 폭력이 대물림된 가정에서 자라나면 그런 것마저 헷갈린다.
나는 일부러 아프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다른 감각에서는 극도로 예민한데, 고통에는 둔감한 편이다. 몸의 이상은 감지했는데 덤덤한 태도를 보여서 진단이 늦어진 적도 있다. 배가 아픈데 참을만 하다고 했더니 의원에서 장염약을 지어주었다. 그날 저녁 응급실에서 CT를 찍어보니 충수돌기염이었다. 발목 인대가 파열된 걸 모르고 참고 걸어간 의원에서는 몇 번 눌러보고는 발목 염좌로 가볍게 진단했다. 두 달 후에 조금 더 큰 병원에서 MRI찍어보고나서야 인대가 끊어진 것을 알았다.
폭력과 학대를 겪은 사람 중 많은 수는 사랑, 지배, 굴종이 뒤섞여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 사랑의 범위를 넓히고 넓히다보면, 모두가 사랑하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소설 속 두 인물은 각자 사랑이라 이름 붙인 게 너무도 어긋나서 마음이든 몸이든 좀 많이 망가진다.
심한 압력, 구속, 집착, 폭력으로 자신을 양육(사육)한 어머니에 대해, 에리카는 분리되고 싶은 욕구와 얼른 다시 함께 하고픈 마음이 혼란스럽게 교차한다. 그런 성향은 겨우 상호작용을 하려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도 상대가 고통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하고 싶은 욕망과,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에리카의 이중적 심정으로 이어진다.
에리카가 긴 편지에 목록처럼 열거한 행위들에 충격을 받은 클레머의 전환은 조금 과장되었다 싶었다. 너무 자신만만한 나르시시스트였던 클레머는 에리카를 가벼운 연애 상대로 삼고자 했다. 원체 여성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긴 했지만,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자신에게 요구한 것들이 터무니없어서 분노로 반쯤 미쳐 공격적이 되고 결국 에리카에게 해를 입힌다. 여자를 패고 강간하고 그 이전에도 자신이 지은 틀 속에 여자를 우겨넣으려 했던 클래머가 엄청 나쁜 놈은 맞는데, 후반부의 폭력성을 드러내려고 너무 순식간에 인물 하나를 망쳐 놓았다 싶었다. 원래 좀 그런 놈인데 백지 같은 놈이 그런 거에도 영향을 받았다, 하기엔 인간이 그렇게 얄팍하진 않은 것 같다.
1983년도에 이 책이 나올 무렵 사회가 지금보다는 더 보수적이었다면 그런 특수한(?) 성애표현에 대해 논란이 있었을 법하다. 그렇지만 인터넷이 등장한 이후 온갖 괴상한 성벽을 맞춰주는 음란물들이 검색어나 해쉬태그로 간단하게 접속된다. 그래서 현대의 독자들은 그 부분에서 저 정도로 왜? 하고 무감해질 것 같다. 그게 아니라 하면 나란 인간이 사드를 너무 읽었나 보다. 사드는 타격도 주고 단련도 주었음이 입증되었다.
아주 어릴 때, 유대인이 나오는 ‘피아니스트’와 헷갈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를 봤다. 그때는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액이 묻은 휴지를 집어 올려 냄새를 맡고, 자기 몸을 면도날로 상처 내거나 칼로 찌르는 장면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 소설과 영화가 어떻게 다른지 다시 확인해보고 싶긴 하지만, 또 확인하기 싫기도 하다. 더럽게 지루하고 재미없었다는 기억이 슬쩍 올라왔기 때문이다. 나마저 이중적이 되게 하는 이 서사...
장황하고 반복적인 서술, 심리와 장면에 대한 비유, 그런게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장식인가 싶다. 한 상황에 대한 표현의 밀도가 제법 높고 집요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제목에 피아노 들어가고 레슨 받거나 연주회 연습하는 장면도 제법 등장하는데 쓰다보니 피아노 얘기는 하나도 안했다. 피아노는 두 사람이 이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가르침과 배움, 위계관계, 이런 것들이 연애 감정과 뒤얽히게 되니 비극이 되었다. 나는 비극과 고통 받는 인물이 나오는 서사를 선호하긴 하는데 남들은 충격받는다는, 뒤표지와 띠지의 호들갑에 비해 소설을 너무 덤덤하게 읽어버려서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밑줄 긋기
-국가와 가정에서 만장일치로 공인된 이 어머니라는 지위는 종교재판장의 심문권과 총살집행자의 명령권을 동시에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6, 처음부터 세다. 패드립의 기미가 느껴진다. 기대대로 에리카는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뭉텅이로 머리카락을 뽑아 놓는다.)
-에리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한 번도 무엇인가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비에 젖은 마분지 조각처럼 무감각하다. (96, 슬픈 세 문장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늙어가는 육체의 감옥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녀는 이 쇠창살들을 줄칼로 잘라내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99, 휘어지는 창살이면 좋을 텐데.)
-그녀의 취미는 자신의 몸을 자르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 스스로를 자신에게 완전히 내맡기고 있는 셈인데, 다른 사람에게 내맡겨진 것보다는 어쨌든 이편이 훨씬 나은 법이다. 자신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자기 손의 감각에 따르면 되니까 말이다. (110, 자르지 마…)
-죽는 건 돈은 안 들지만, 삶을 지불해야 되고, 모든 것은 하나의 끝이 있지만 소시지만은 양쪽 끝이 있다고 말하면서 남을 잘 돕는 이 도축업자는 요란하게 웃는다. (122, 아버지이자 남편을 요양원에 데려다 놓고 온 모녀에게조차 유쾌한 푸줏간 주인)
-세련하다:서투르거나 어색한 데가 없이 능숙하고 미끈하게 갈고닦다. (124, ‘세련시키고’란 표현이 있어 찾아보니 동사도 있긴 했다.)
-그러나 더이상 매를 들기를 꺼리기는 하지만 에리카의 어머니는 거머리처럼 균을 감염시키면서 우엉뿌리처럼 에리카에게 달라붙어 있다. 어머니는 에리카의 골수를 빨아들인다. (125, 악!)
-그렇지만 그가 남자라는 점은 에리카가 그보다 십 년 연상이라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든다. 게다가 여성의 가치는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지적 능력이 뛰어날수록 떨어진다. (203,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데서 초점 화자가 장면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 듯도 하고, 전지적시점인 것도 같은데 이게 발터 클레머의 생각(아마도 이게 맞음)인지 작가의 생각인지 구분 안 되게 쓴 부분이 생각보다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