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의 연인들 - 소설로 읽는 거의 모든 사랑의 마음
박수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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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8 읽다 중단. 저자:박수현

ㅎ은 댓글을 주고 받다 우연히 이어진 어느 시절의 친구였다. 내 독후감에 형광펜을 긋듯 마음에 닿는 구절을 짚어주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이런 허접한 글에서 무언가를 건져가는 게 고맙고, 부끄럽고, 신기했다.
그 무렵 내가 쓴 단편소설을 봐 주는 친구가 둘 있었다. ㅎ는 세 번째 독자가 되어 주었다. 조금 더 다듬으면 좋게 될 거라고 주로 칭찬을 많이 해줬다. 댓글로 말장난을 하며 서로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나눠 가졌다.
아직 나는 ㅎ의 동생 이름이 기억난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ㅎ을 실제로 본 날도.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 만나서 멕시칸 음식을 먹었다. 커피도 마셨다. 살던 집앞에 같이 가보기도 했다. ㅎ이 카페에서 이야기 나누면서 어떤 예술인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열정을 보였을 때 나는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ㅎ를 보았다.
ㅎ은 내 풀어진 신발끈을 묶어주려고 했다. 나는 정색을 하며 아직 신발끈 묶어준 남자 한 명 없는데, 여자한테 맡기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ㅎ과 나는 개천변을 따라 걸었다. 지하철 역까지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들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ㅎ의 얼굴도 하루 만에 장기 기억에 남기기란 쉽지 않았다. 그냥 그날의 분위기, 방문했던 장소들,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댓글들 정도가 ㅎ의 흔적이다. 나는 공부를 한답시고 독서와 독후감에 소홀했고, ㅎ도 어느 순간 방문이 뜸해지다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가의 연인들’은 ㅎ이 언젠가 읽는 중이라고 언급해서 마련해 둔 책이었다. 소설들을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론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었다. 첫 꼭지가 ‘백년의 고독’이라, 내가 여러 번 읽는 책은 흔치 않은데, 내 인생책 중 하나를 저자는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했다.
일단 프롤로그에서부터 막혔다. 문장의 장식이 내가 소화할 수준이 아니었다. 격하고 감정적이랄까. 그리고 ‘백년의 고독’ 속 사랑에 대한 관점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그런데 난 반댈세, 근친상간의 맥락을 쏙 빼놓고 두 사람의 사랑을 전투와 공격성으로 눙칠 수 있는가?
그리고 소설을 읽은 나는 등장인물들과 가계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그나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 이 책을 펼친다면 인물이나 서사에 대한 소개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대체 누구네 무슨 얘기냐 하고 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은 부분 중에 내가 읽은 소설을 다룬 글들만 골라 보기로 했다. 역시나 다회독한 인생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한강의 ’채식주의자‘ 두 가지만 남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었던(지금은 소설을 사랑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변주곡 같은 구성이 일품인 이 소설을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랑과 질투만 쏙 빼와서 줄거리를 소개하는 게 그야말로 이 서사를 뻔하게 전달하는 듯해서 탐탁치 않았다. 사비나를 ‘토마시의 분신’이라 일컫는 것도 놀랄 만한 해석이었다. 둘은 모노아모리가 아니라는 것 말고는 향하는 방향도, 사랑하는 방식도 정말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를 다룬 부분은 그 징글징글한 형부의 관점에서 욕망도 사랑에 포함시키며, 영혜와 인혜보다는 형부 이야기가 대부분을 이룬다. 이렇게 읽는 게 참신한 시각일 수도 있지만, 시각에다가 작품을 끼워 맞춘 듯보였다. 일단 그 형부의 역겨운 욕망에 이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라캉까지 들이미는 게 별로다 못해 충격이었다.

부제에 소설로 읽는 거의 모든 사랑의 마음, 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 책이 다루는 사랑의 범위는 독점적 이성애로 아주 좁았다. 그 사랑에 관한 틀마저 매우 주관적으로 여겨졌다. 모든 관계를 그런 틀에다가 맞추어 설명하고 해석하다 보니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굳이 꾸역꾸역 읽지 않고 놓아주기로 했다.

목차에 읽은 책이 겨우 세 권. 세상에 책은 너무도 많고 내가 본 건 티끌 수준도 안 된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렇게나 저자와 독해의 방식이 어긋나 본 적은 처음이었다. 사실 책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모두의 독서는 저마다의 오독이고, 책은 그럴 수 밖에 없도록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ㅎ이 나와 내 글을 아껴준 만큼 나는 되돌려주지 못했었다. 심지어 ㅎ이 인상깊게 읽었던 책마저 몇 년 만에 읽고는 까 까 까 안 봐를 시전하고 있다. ㅎ와 나는 서로를 오독해서 어느 시절 이야기를 나눴고, 그때는 옛날이 되었다. 나는 또다른 친구들과 또다른 오독을 나누며 살아간다. 지금의 내가 만약 ㅎ이 내 앞에 신발끈이 풀린 채 있다면, ‘도와줄까요?’ 묻고 고개를 끄덕이면 신발을 묶어줄 것 같다. 내가 받은 관심과 칭찬도 어떤 사랑이었을텐데. 그걸 받기만 하고 우리는 멀어졌다. 그렇지만 가끔 나는 ㅎ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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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을 발견하면서, 그는 이전에 몰랐던 제 고독을 깨닫는다. 나는 이토록 헛헛한 못난이, 빈 곳 투성이었구나. 사랑에 빠지기 전에 그럭저럭 온전해 보였던 그는 갈망과 결핍을 겪은 이후 치명적으로 부족해진다. 구멍이 뚫린다. 불구가 된다. (28, 어떤 사랑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서 선뜻 공감이 안 간다...는 나는 이 방향으로 흐른 건 ‘망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지금 이 순간 닥치는 행복은 ‘원래 없어야 하는 것’인 데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이므로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다.(34, 대체 얼마나 불행한 삶만 이어왔길래…)

-오죽하면 롤랑 바르트는 “여자는 칩거자, 남자는 사냥꾼, 나그네이다. 여자는 충실하며(그녀는 기다린다), 남자는 나돌아 다닌다(항해를 하거나 바람을 피운다).”라고 말했겠는가. (192-193, 뒤에서 상투적 정황이라고 가리키긴 하지만, 여자 남자를 저렇게 단정해 둘로 나눈 말을 인용한 게 맞나 싶었다. 심지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끼워 맞추기에도, 사비나나 프란츠 같은 주요 등장인물을 보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반대로 여성은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어도 단 한 명의 아이만 낳는다.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202, 진화심리학을 빌려와서 이와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다수와의 성관계를 통해 가장 강한 유전자를 얻으려는 전략-내용을 읽은 적이 없어서 이 단정적인 말에 빼애액 하고 말았다.)

-알몸이란 타인에 관한 지식의 마지막 보루다. 사람들은 알몸을 보면 그를 다 알았다고 생각한다.(206, 사람들은, 에서 나는 빼 줄래? 아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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