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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급자족한다
오한기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20260502 (저자: 오한기)
많은 걸 살 수 있다. 남들의 상상력과 이야기마저 돈과 바꿔 온다.
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고 또 읽고 몇 년이 지난 뒤 또 읽으며 이런 일이 있었군, 이런 감정이었군, 한다. 돈이 된 적 없고 내 스스로 지어내 읽고 있으니 이거야 말로 자급자족이다.
내가 오한기를 또 읽다니. 물론 이건 삼천원에 중고로 구매했는데 완전 새 책인데 이 값이라니, 수상한데...싶다가도 백년 동안의 고독도 천사백원인데 역시나 명작이었잖아. 자본주의에 속지 말자. 작품을 보자, 했다.
120페이지쯤 읽었을 때, 파이트클럽을 생각했다. 어쩌면 미아 모닝스타는 화자가 만든 환상이고, 사실 자급자족단은 화자가 두목인데 그 폭주를 막으려고 반대편을 설정해놨다 뭐 그런…내 상상력이 빈곤해서 그렇게 예측했다. 일단 마저 읽어보는 거지.
다행히 예측은 틀렸다. 명작일 가능성도, 상상 속의 전개도...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실제 전개는 여기서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이 문장과 비슷한 표현이 소설 속에 자주 등장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같은 거...)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갖다 붙이려 들면 자급자족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자급자족을 자본주의의 대척점으로 그려 놨다. 사실 내 보기에 자급자족이란 말은 틀렸다. 자연주의 마을도, 비비와 볼키도, 미아와 헤밍웨이도, 카프카와 해인도 관계의 구성원끼리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서로 끝없이 떠먹여주고 있었다. 대놓고 반자본주의 하면 너무 유치하니까 네 글자 맞추느라 택한 조어 같았다.
스파이물을 많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존 르 카레의 ‘리틀 드러머걸’,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아, 처음 읽은 건 아주 오래전 베를린 느와르 ‘4월의 제비꽃’이었나 그랬다.
그래서 이 한국적이고 특정 시대(2018년 언저리)를 배경으로 한 스파이물이 제대로 쓰인 건지 그냥 개허접인지 판단할 능력이 안 된다.
딱히 재미있지는 않은데, 괜시리 두껍고, 그런데 읽는 게 더디지는 않았다 정도였다.
CIA니 국정원이니 트럼프니(아 그런데 이 소설 나오고 7-8년 지난 지금도 왜 트럼프일까…) 재벌 총수니 평창올림픽이니, 이름 번듯한 조직이나 기관, 인물과 사건을 다 때려 넣고 B급 코미디 같은 걸 하고 싶었던 건지, 사회 풍자라고 해야 할지, 이 장르물 자체에 대한 조롱인지(이렇게 물으면 아니라고 할 것 같다) 읽는 내내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전까지 시간은 꽉 채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시간은 무엇이든 아무거나 하면서 보내는 거라고. 채우는 것이 보내는 것으로 바뀌니까 여유가 생겼다. 자기계발 중독자, 성취지상주의자가 드디어 체념한 것이다. 책이라도 빈 시간 속에 욱여 넣었는데 이젠 안 읽어도 시간은 잘 간다. 지난 달에 11권을 읽어 놓고 안 읽었다고 하면 거짓말 같지만…
대충 이거저거 쓰고 읽고 하면서 보내고 있다. 자급자족을 하면 확실히 소비는 덜 하게 된다. 돈 안 되는 글쓰기야 말로 확실한 반자본주의일지도 모르겠다.
+밑줄 긋기
-그러나 대책은 공정거래, 4차 산업혁명, 정의, 욜로처럼 공허한 단어였다. 우리는 가난한 데다가 공허하기까지 했다. 확신하는데 빈곤은 100년 뒤에도 모든 글의 소재거리가 될 것이었다. 빈곤은 현재를 넘어 과거를 돌아보게 했고, 미래를 예견하게 했다. 빈곤만큼 고전적이고 동시대적이며 SF적인 건 없었다. (19, 흙으로 만든 수저는 밥 한 술이나 뜰 수 있을까.)
-스파이는 경계해야 한다.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을. (59, 모두가 경계해야 할 것 같은 욕망)
-나는 주온에게 막연한 동질감을 느꼈고, 주온이라면 해인과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걸 목격해도 질투가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102, 뜬금 없이 처용하는 화자)
-마지막으로 형식. 혹자는 형식이 껍데기일 뿐이라고 하지만, 형식만큼 어필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특히 보고서에 있어서는요. 상사들은 형식에 눈이 멀기 마련이거든요. (148)
-내가 물었다. 사랑을 위해 죽음으로 뛰어든 양완규. 그 행위는 상상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생각보다 비참했고, 예상보다 처참했다. 해인이 위기에 빠졌다면 나 역시 비참하고 처참해지리라. 갑자기 한기가 몰아닥쳤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213, 나는 오한기가 오기나 한기 같은 단어를 쓸 때 심상할지 궁금했다.)
-책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책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270, 적어도 시간을 보내는 걸 해결해주긴 한다.)
-한때 좋아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당신의 작품을 좋아했던 게 후회되네요.
잘됐네. 나도 너 같은 독자는 필요 없으니. (277, 좋아하던 작가들과 내가 나눌 법한 대화였다.)
-미아는 불법으로, 아니, 진짜 미쳐 있었지만, 주는 합법적으로 미쳐 있었다. 이 세상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우기면서 운영되는 것이었다. 이게 세상의 비밀이었다. (325, 나의 미침은 불법인지 합법인지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