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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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5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이야기의 신은 이야기 안에서 전능하다. 누군가를 사라지게 하거나 새로 나타나게 한다. 살고자 하는 사람도 죽이고, 죽고자 하다가 다시 살려고 하는 사람도 죽인다. 가시덤불 숲 정도 태웠다가, 에라이 하고서 한 도시 전체를 불타게 할 수 있다. 사람을 철길 위에 네 토막 내는 것도 가능하다.

읽는 사람은 이야기 안에 있는 동안은 그렇게 끌려다닌다. 읽던 도중에 덮어버리는 것도, 기어이 끝까지 읽는 것도 둘다 이야기에 대항하는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왜 이야기랑 싸우려고 하죠? 한 인물이라도 이입하기 힘든 독자는 어떻게 하죠?

이번 소설은 마침표가 제법 후한 편이었다. 대신 마침표마다 초점 화자가 바뀌었다. 그걸 따로 말 안 해줘도 읽어나가다 보면 이번엔 또 이놈이군, 할 수 있게 잘 써 놨다. 다만 교수와 똥강아지는, 머리커는 어디로 갔을까? 자기가 여기선 신이라고 탱크로리 데려다가 (아마도) 기름을 마구 뿌리고 다 폭파시키고 끝내면 되는 거야? 모든 이야기의 끝은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딱히 더 나쁠 것도 더 나을 것도 없는 인간들, 평범하고 다양한 인간들을 줄줄이 시시콜콜 보여줘 놓고 다 날려버리는 건 너무 짓궃다. 정신 없는 영화 한 편 본 기분이었다.

한 편으로는, 소설은 이렇게 내가 만들고 싶은 세계를 만들고, 다시 다 부숴버리고, 모래성이나 블록집처럼, 찰흙놀이처럼, 그렇게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인데 난 잘 가지고 놀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모래밭에 파헤치고 간 흔적, 물웅덩이, 두고간 작은 삽, 불장난 뒤의 잿더미, 땅 속에 묻힌 시체, 남이 실컷 놀고 간 뒤에 얘들은 뭐하다 간거야, 하는 기분이다.

제목은 딱히 극적인 사건도 아니었다. 하찮은 사람이 다 망하고 다 늙어서 자기 죽을 자리 찾아온 걸로 호들갑 좀 떨었다가 온 도시가 멸망한다. 뒤좀 돌아봤다고 소금기둥인지 돌인지 만든 신만큼 이 이야기의 신도 잔인하다. 소돔120일의 결말이랑 딱히 차이점을 모르겠다. 오히려 더 심한 대량 학살… 이걸 무덤덤하게 읽도록 쓴 신이 나쁜 건지, 그렇게 읽은 내가 나쁜 건지 둘다 안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밑줄 긋기
-그냥 꼼짝하지 않고 누워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서 자신에게 말하길 오, 안 돼, 절대, 머리커, 다시 꿈꾸기 시작하면 안 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절대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237, 이번 소설은 제법 마침표가 많다. 벵크하임의 옛 사랑 머리커 할머니. 한국에서는 놀림 많이 받았을 이름...)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작자들, 이 불쌍한 말들은 존중받아 마땅한 것을, 하지만 저치들은 누구도 무엇도 존중하지 않아, 내 저들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겠어, 저 돼먹지 않은 어중이떠중이 놈들, 하나씩 모가지를 비틀어주마, 내가 농담하는 줄 알지, 두고 봐. (254, 일방적으로 말수레를 동원하라는 명령에 분노하는 마구간지기. 말에 대한 존중에 자신에 대한 존중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사람이 왜죽어야 하는지가 아니야,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가라고, 라고 벵크하임 벨러 남작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바깥을 보고 싶지는 않았고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이것이 그의 방식이었으며 어차피 도시를 썩 잘 볼 수는 없었던 것이, 바깥은 모든 것이 잿빛이었고 그가 있는 쪽 창문에는 뿌옇게 김이 서렸거니와, (494, 제목에 속았지만 사실 이 소설 주인공은 벵크하임이 아니라 폭주해서 총질하고 불지르고 다니는 미친 교수가 아닐까 싶다. 한쪽은 무기력에 에너지 과소, 한쪽은 에너지 과다에 생의 의욕 폭발)

-(…)질투를 거론하려거든 한국인을 생각할지며 위선을 거론하려거든 이번에도 한국인을 생각할지며 오만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든 교활한 아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든 잠재적 공격성을 거론하려거든 다시 한국인에게 돌아올지니 그대가 어떤 못된 습성을 떠올리든 한국인에게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으나 적어도 그대는 그곳에 있고, 그렇다면 적어도 한국인의 상투는 틀어쥘 수 있을 것이며 그냥 한국인은 똥구멍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기는 한데, 그렇더라도-누구에게 이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그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는 것이, 그에게 이 말은 술집에서 주먹을 부르는 한낱 모욕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그가 벽에 붙어 게걸음으로 나가 어둠 속에 숨어 앙갚음할 기회를 엿볼 것이거니와 그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는 것은 그 무엇도 그에게 진짜로 상처를 입힐 수 없으며 그러는 동안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자기연민에 빠질 수 있는바 그의 실체를 굳이 그에게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가망 없는 짓이기 때문이어서, 그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결코 파악하지 못할 것이고 결코 깨우치지 못할 것임은 이것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깨우치려면 한국인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나 그대는 한국인이고 지금도 앞으로도 영영 한국인, 용납할 수 없는 한국인일 것이요, 온갖 예외를 내게 들먹이지 말 것은 예외들이 내게 구역질을 일으키기 때문이요, 실은 예외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어서, 한국인은 누구든 나의 일가요, 한국인은 누구나 한 뿌리에서 나왔은즉 그는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는 무식하고 위험한 어릿광대이지만 그는 왕이 아니어서, 끊임없이 투덜대다가도 누가 자기에게 고함지를라치면 슬그머니 내빼니 내 진심으로 말하건대…(648-649, 자기 출신 민족을 셀프 디스 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간접 체험이라도 해 보려고 ‘헝가리인’하는 부분을 ‘한국인’하고 바꿔 적어봤는데 어느 나라가 들어가도 상관 없겠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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