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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쿠르초 말라파르테 지음, 이광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평점 :
-20260315 쿠르초 말라파르테.
일요일은 어느새 초조한 날이 되었다. 내일이면 다시 그곳에, 일꾼이 된 시늉을 하며, 에휴 또, 하는 마음에다, 종전을 앞두고 패배의 신호 같은 불길함을 느끼며 살짝 미치고 많이 늙은 것 같은 독일군의 마음을 슬쩍 가져다 대본다. 독일인들이나 이탈리아 권력층 앞에서 동조하듯 사실은 빈정대는 말라파르테가 글 속에 자주 등장하는데, 글로 치는 허풍이려니 한다. 실제 앞에서는 내색도 못하고 사바사바 했을 것 같은 놈인데, 글로는 온갖 정의로움, 휴머니즘, 반파시즘, 그렇게 쓰면 그렇게 남는다. 이 책을 전쟁 르포나 역사책으로 읽으면 안 될 것 같다. 전쟁 환상 문학에 가깝다. 잔혹한 풍경들을 미화해 놓았는데, 그게 전쟁이나 분쟁을 찬양하기 위한 게 아니라 전쟁 속에 부서지는 인간과 동물과 세계가 겪는 잔혹함을 더 강하게 느끼도록 하는 장치 같은 것이다.
불을 피해 호수로 뛰어든 수백마리 말이 머리만 내민 채 밤새 얼어죽어 다음 봄이 와서 썩기 전까지 단단하게 굳어 있는 장면, 선물이라고 자랑하는 굴이나 홍합 바구니가 사실 포로나 유대인들의 눈알 무더기였다는 끔찍한 에피소드, 군 위안소에서 고통받는 동시에 이십일 후에 집에 돌아가게 될지, 죽게 될지, 사실 너무나 끝을 잘 알고 있는 젊고 어린 유대계 여성들의 절망하는 모습, 쥐 취급 받고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유대인들, 독일어를 잘 읽는 똑똑한 포로들을 선발해 모두 죽여버리는 군인들,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미친 전쟁 속 장면들에 말, 개, 쥐, 새, 순록, 파리 같은 동물들의 이미지를 겹치면서 동물들의 수난, 동물과 다를 것 없이 겪는 인간의 수난, 전쟁의 고통은 아랑곳 안 하고 흥청망청인 상류층들의 추함 같은 모습을 그려 놓았다.
보나파르테의 반대로 나쁜 편, 이라는 ‘말라파르테’를 필명으로 쓰고, 파시즘을 지지하다 그들의 행태에 실망하고 조롱하며 반파시스트를 자처하고, 독일계 아버지 자녀이지만 자기는 진짜 이탈리아인이라고 자처하며 독일인들을 완전히 타자화해서 관찰하고 비꼬고 조롱하는 말라파르테라는 인물은 흥미로웠다. 그가 겪었든 상상했든 그리고자 하는 장면을 극적이고 비장미나 잔혹미 넘치게 꾸미는 솜씨는 그게 사실과 다르건 같건 간에 탁월했다. 문학과 허구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게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말라파르테는 종군 기자라기보다는 기레기에 가깝겠지만, 전쟁의 참혹상과 허무함을 직접 겪은 이들과 겪지 않은 후대에까지 남겨준 전령 쯤 되겠다. 이렇게 미친 짓인 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쟁은 계속 반복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후대에게 무슨 모습을 남기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전쟁 여파로 급등하게 될 원유 가격에 베팅하는 날파리떼들로 기억될까. 어떤 사람들의 삶은 불타고 절단되고 썩어가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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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트는 글자 그대로 하면 “망가진, 결딴난, 완전히 부서진, 폐허가 된”이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 지금 유럽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망가진 유럽이 어제의 유럽이나 이삼십 년 전의 유럽보다 좋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모든 것을 달리 어떻게 바꿔볼 수 없는 유산으로 물려받는 것보다 좋다. (10)
-“이탈리아는 참 아름답지.” 수잔나가 말했다.
“추한 나라라면 좋겠어.” 내가 말했다. “그냥 아름답기만 한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 (406)
-“제 피티에 데트르 팜므.” 루이제가 특유의 포츠담식 억양이 섞인 프랑스어로 조용히 말했다. “여자인 게 참 유감이네요.“ (414, 남자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여자들은 노동에 시달리고, 위안소로 끌려가고,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 총살당한다.)
-“제 말은 연어와의 전쟁을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는 말이죠, 라플란드 사람이건 핀란드 사람이건 다 연어 편이에요. 일전에 강가에서 독일 병사 몇이 죽은 채 발견됐어요. 아마 연어가 죽였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럴지도 모르죠. 연어가 승리한다면 그야말로 축하를 해주고 싶네요. 연어 문제는 인간과 문명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456, 모두가 연어를 응원해서 독일군이 아마도 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