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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2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8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20260126 필립 로스.
예전엔 나를 죽이거나 다치게 할 사건을 아슬아슬하게 넘길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조상신이 돌보고 계시다고. 제사를 곡진하게 지내고, 묘를 살뜰히 돌보고, 필요하면 풍수지리 맞춰 증조부모의 이장에 합장까지 감행하는 할아버지 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상의 밥, 국, 전, 포, 과일, 알뜰히 차린 건 우리 할머니인데, 왜 불쌍한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맞아 죽어야 했을까요? 할아버지는 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그렇게 쉬쉬 묘 하나를 더 만들고, 묘 곁에서 눈물 지으며, 난 정말 니들 엄마 사랑했다, 가증스러운 말을 지껄일 수 있었나요? 조상숭배고 제사고 유교고 뭐고 다 꺼지라구요. 영혼이 있다면 다들 쫄쫄 굶고 괴롭고 외로운 영원을 보내시길. 묘지기 할배의 남은 생애도 그렇게 영원 같은 나날 되시길. 다들 지옥에서 만나요.
폭력적인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면서도, 그 아버지 반찬 떨어질까 절절매며 자기가 자기 아버지한테 할 효도를 마누라 괴롭혀가며 대리 수행하던 나의 아버지. 이혼 당할게 무서우면 술도 끊고 폭언 폭력도 안 했어야 할 건데. 머리 커진 자식이 자기 마누라를 데리고 도망칠까 봐 늘 두려웠겠지요. 그래서 돈도 다 빼앗고 학교 다니고 취업 준비중인 자식을 몇 푼 용돈 주는 걸로 쥐락펴락 하려고 애썼지요. 뜻대로 안 되서, 걱정하던 대로 되서 유감입니다. 당신 장례식에서도 만나지 말아요. 지옥이 있다면 꼭 거기로 가세요. 지금 이 순간도 산 지옥이길 바라요.
그 우울과 슬픔에 나도 젖어서, 내가 구해내고 나를 먹여 살린 만큼 나도 갚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기 기분에 나를 휘말리게 만들고, 자기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내 앞에서 남을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내 죄책감 버튼을 눌러대면서 모든 걸 희생한 사람처럼 구는 걸 저는 더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당신이 만드는 대부분의 한국 음식들, 냄새나는 청국장, 기름에 푹 젖은 부침, 주방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김치국물이 역겹습니다. 외로움을 덜기 위해 내게 기대지 말길 바랍니다.
핵물리학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경찰이나 군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위험 화학물질을 다루는 직군으로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한 명도 죽게 만들지 않아 다행입니다. 모두들 다행인 줄 아세요. 나는 누군가를 해치거나 다치게 할까 봐 늘 두려워서 불안에 떨고 내가 착해질 수 있도록 약물을 섭취합니다. 나를 만든 세 사람이 빨리 죽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더는 나를 비난하고 평가하는, 자기 속에서 나왔으니 자기 마음대로 굴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 질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 점점이 떨어진 사람들이 한날 죽길 바라느니 내가 사라지는 게 더 빠른 해결책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파괴는 나를 향합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파괴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메리처럼 핑계댈 베트남 전쟁도 없어요. 폭탄을 만들 줄 몰라요. 말을 더듬지도 않아요. 내 말은 글씨로나마 유창합니다. 이게 뭔가를 부수고 무너뜨리고 죽일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도 가족과 친족이 있고, 비극과 소극과 역할극이 펼쳐지지만 정작 각자 배우 노릇을 하느라 제대로 된 관객을 갖지 못합니다. 햄릿도 아니면서, 우유부단하고, 그래서 괴로움에 미쳐가는 시모어와, 파고들면 완전 결백할 수도 없는 시모어와, 미스 뭐시기로 자신을 규정하지 말라면서도 그걸로 발끈하고 정색하는 것 때문에 더욱 미스 뭐시기가 되어가는 돈과, 바뀐 시대 못 따라잡는 할매 할배들과, 평범한 속물이거나 평범한 술주정뱅이이거나 평범한 꼰대비평가들이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은 내내 괴로웠습니다. 위험한 거리의 위험한 방에, 물을 써서 씻지도 못하는데 자기 아빠의 토사물을 뒤집어 쓴 채 홀로 된 메리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소설이 끝나는 것도, 메리의 입 안에 시모어가 손을 넣어 벌리는 장면을 저녁 식사 모임의 사람들이 왈가왈부 하던 ‘딥 스로트’의 오마주마냥 그려둔 것도, 작가에게 영 못마땅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죽어서 먼지가 된 사람에게 따질 수도 없습니다. 종일 결말을 보겠다고 참고 읽어댄 내 탓을 해야겠습니다. 읽고 써서 만드는 폭탄은 늘 내 마음 속에서만 터지고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쓸데 없는 흠집만 늘어갑니다.
+밑줄 긋기
-그가 정말 놀라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존재가 바닥난 것처럼 보일 때였다. 그들을 그들로 만들어주는 재료가 바닥나 그들 자신이 다 빠져나가버리는 바람에 옛날 같으면 그들이 동정했을 법한 사람으로 변할 때였다. 그들은 삶이 풍요롭고 충만할 때는 은근히 그들 자신이 지겨운 것 같았다. 그래서 온전한 정신과 건강과 균형 감각을 몽땅 처분해버리고 어서 다른 자아로, 진정한 자아로, 완전히 착각에 빠져 좆같이 망가져버린 자아로 내려가고 싶어 안달인 것처럼 보였다. 삶과 조율되어 있는 상태는 가끔 운좋은 젊은 사람들에게나 생기는 우연한 일일 뿐, 대부분의 경우 인간들이 사실 별로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상태인지도 몰랐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는 정상적인 사람들,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던 그가 사실은 비정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든든하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외려 현실 생활과는 동떨어진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 자신이 얼마나 이상해 보이던지. (147-148)
-그의 딸은 뉴어크의 방바닥에 숨어 있는 미치광이 살인자였다. 그의 아내는 그들 가족의 부엌 개수대에서 옷을 입은 채로 그 짓을 하는 애인을 두었다. 그의 전 정부는 뻔히 알면서 그의 집에 참사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는 이렇고 한편으로는 저렇고 해가며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하고 있었다. (191-192, 스위드에게 너무나 가혹한 작가… 바닥 위 뭔가를 덮은 성조기를 들어 올리면, 그 아래 붕붕 파리 끓는 오염물이 잔뜩 나타난다. 그러니 부탁인데, 당신 앞의 그 천쪼가리를 들어 올리지 마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