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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헤드 - 익숙해 보이지만 결코 알지 못했던 미국, 그 반대편의 이야기 ㅣ 알마 인코그니타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3년 8월
평점 :
-20251228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이 미국 대중문화 비평서일 줄 알았다. 펄프픽션이랑 이레이저 헤드를 내 마음대로 조합해 버렸나 봄… 만약 영국 책이라고 했으면 펄프와 라디오헤드를 합친, 밴드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읽으면서 제목을 다시 보니 이 책 저 책 찢어 발겨 적셔 종이죽을 만들어서 빚어낸 머리 모양 정도가 떠오른다. 그건 아마도 내 대갈통.
미국인의 삶, 한국인의 삶, 이런 말은 대책 없고 무책임하다. 그러니까 이 책 한 권을 읽고 모든 또는 평균적인 아니면 대략의 미국인의 삶을 엿봤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제법 관찰력 있고 유머도 좀 칠 줄 아는 ‘어느’ 미국 출신 작가의 눈으로 그가 겪은 미국 일부 지역에서의 경험들을 조금 맛봤다. 글을 쓸 때 굳이 어느 국민이나 인종의 대표까지 될 필요는 없다. 한국 문학, 영미 문학 같은 말에서 조금 자유로워져도 될 것 같다. 언어나 작가의 국적으로 책을 가늠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은 쓰거나 쓰지 않은 한 권의 책. 다 다른 내용과 형식의.
책은 르포, 에세이, 아마도 대부분 논픽션인 온갖 주제와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차 있다. 딱히 주제가 정해지지 않은 종합 월간 잡지를 보는 기분이 든다. (나중에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니 다양한 소재의 이 글들이 대부분 정말로 잡지 연재글이라고 한다. 나도 여태 글을 허투루 본 건 아니었구만.) 그래서 글 한 편마다 대강 떠오르는 걸 씨불여보기로 했다. 독후감이 사실상 독중감이어서 매우 길어질 예정입니다… 다 안 읽어주셔도 여기까지 따라오신 것만도 감사합니다...
‘이 반석 위에서’는 저자가 크리스쳔록페스티벌 내지 대부흥성회 같은 곳에 가서 기독교인 젊은이들과 며칠을 보내면서 쓴 르포였다. 자신의 “예수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행사장 푸드 코너에서 갑자기 그의 발치에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은 남자를 묘사하기도 한다.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시냇물에서 잡은 개구리를 칼로 다듬어 버터에 구워주는 이야기가 제일 생생했다. 이쯤 쓰고 보니 이 책은 대체 뭘까 궁금한 사람이 생기지 않았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책 서두에 애도한 피위는 이곳에서 만났던, 그런데 어려서 세상을 떠난 (유대인 소녀들과 어울려다니던) 그 아이였던 것 같다.
‘연기 속에 잠긴 두 발’은 저자의 형 워드가 밴드 리허설 중 감전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회생한 이야기이다. 살면서 적지 않게 이런저런 마이크를 (가장 어렸던 때는 국민학교 1학년 학예회이다) 앞에 두고 노래를 했었는데, 내가 세팅하지 않았고 미세한 전류가 흐르고 있었던 그것들이 나한테 한 번도 전기 충격을 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했다. 형이 회복하는 동안 보인 뇌의 이상으로 인한 행동 내지 섬망 증세를 저자는 노트에 기록해 두었는데, 그건 무슨 환상 동화 같았다. 실제로 겪은 가족들에게는 고통이었겠지만.
‘미스터 라이틀:에세이’는 존이 앤드루 라이틀이라는 90대(90년대 아님 호호할배) 작가 문하생으로 있던 시절과 그의 장례를 지켜본 이야기를 적어 뒀다. 할배는 할배이면서도 여전히 완벽한 문장을 쓰고, 그 한 문장이 존의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할배는 존의 사타구니를 쥐는 바람에 존이 할배를 떠나게 만든다. 라이틀의 번역서가 있나 궁금해서 찾아보니 당연하게 없었다. 세상에는 내가 듣지도 못할 작가들이 차고 넘친다. 죽은 사람까지 합하면 말해 뭐해.
‘대피소에서(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간 뒤)’의 서두에 ‘허리케인이 할퀴고 간 지역 외곽의 모습‘을 묘사한 문단과 말미의 기름 전쟁을 보면, 나는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비극의 장면을 그리 많이 보지 않았구나 싶었다.
‘정말 리얼한 것의 차원으로’는 한참을 읽도록 미즈가 누구고 리얼월드가 무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아직 텔레비전 리얼리티 쇼가 사람들의 가장 큰 흥밋거리이고 모두가 공유할 만한 무언가가 있던 시절의 이야기 같았다(2011년에 나온 책이다! 겨우 14년! 이라기엔 겨우는 아니네...그때 태어난 애가 중2병을 앓는 중). 지금은 제각각 저마다의 최애 채널 ‘다수’를 끼고 사는 세상이다. 무한에 가까운 모두의 취향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젊은이들의 유행어나 밈을 따라 잡는 걸 드디어 포기했다. 그들과 나의 공통점은 릴스 또는 책을 스쳐가며 스와이핑 하고 있는 것 정도. 비슷한 듯 많이 다르다. 아니 비슷할 것도 같은 게 난 한 달도 채 안 된 이전에 읽은 책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문득 예전 독후감을 뒤적였다. 쇼츠의 수많은 깜빡이들도 그렇게 뇌를 스쳐 잊힐 것이다. 다른 점은 나는 그럴까 봐 메멘토 주인공처럼 몸에 문신 새기듯 이런저런 개소리를 박제해놨다 정도...
‘마이클’은 마이클 잭슨에 관한 소전기 쯤 되는데, 이 글로 내가 마이클 잭슨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할 만큼 그전에 내가 알던 바가 거의 없었다. 올리버 색스 박사가 자기 애인에게 ”마이클 잭슨이 뭐죠?“ 하고 물었던 에피소드 만큼 나에게도 아득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벤이나 빌리진의 그 목소리가, 전주가 머릿 속에 자동 재생 되는 거 보면 아예 모른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겠다. 끝까지 읽어도 이 글은 별 내용이 없다.
‘액슬 로즈의 마지막 컴백’은 내가 건스앤로지즈를 제대로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큰 감흥은 없었다. 그래도 액슬 로즈의 이름을 보는 순간 스윗차일드오마인 첫머리의 날카로운 기타 소리가 머리에서 울리는 걸 보면 역시나 아예 모른다고는 못하겠다. 여기까지 두 꼭지를 읽다보니 내가 이거 대중문화 비평서 아닌가? 했던 게 또 완전 틀린 건 아니잖아, 아닌가 인물 인상평서인가...기인열전인가...더 읽어보면 알겠지. 저자가 건스 앤 로지스 빠돌이인 건 알겠다. 그런데 후반부에 갑자기 너바나랑 건즈 앤 로지스를 비교해서 읭 했다. (‘그들은 옷을 괴상하게 입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좋은 곡과 쓰레기 같은 곡 사이의 차이를 잘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238) 둘을 견주는게 흔한 일인지, 나한테는 의외였다. 나는 너바나 쪽이다. 일찍 죽어서 추하게 늙는 걸 안 보여주는 게 더 예술적이라고 생각… 가혹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팬… 두 음악가의 에피소드를 읽고 나서 할배가 된 액슬과 재결성한 건스 앤 로지스의 최근 라이브 영상, 마이클 잭슨의 1990년대 공연 영상을 찾아 보았다. 그러고나서 자다 중간에 깨어 아, 이 책의 속표지에 있는 머그샷이 깁스한 채로 남의 엄마 아빠 두들겨 팬 어린 액슬이었구만, 하고 혼자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독후감 맨 뒤에 인디애나주 라파예트시 경찰에 체포된 로즈의 머그샷-저자가 발굴함-을 첨부하겠음. 팬들은 맞는지 확인해보슈)
‘아메리칸 그로테스크’는 미국판 태극기 아니지 성조기 집회(티파티)의 장면과 배경을 보여준다.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 확대 정책에 반대하는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노인들. 정책의 수혜자일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상한 상황. 정보: 저자의 친척은 전용기를 가진 부자들이다. 센서스 조사원의 죽음은 어떤 살인 사건 보다도 반전 넘치는 사회적 죽음이었다. 반대편 사람들은 그저 보험 사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라-휘-네-스-키: 괴짜 자연주의자의 경력‘에는 라피네스크란 자연학자 또는 박물학자의 소전기, 채집기가 담겨 있다. ’비글호 항해기‘ 저자나 ’말레이제도‘ 저자보다 먼저 북아메리카의 동식물을 조사하고 어떤 결론을 내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끔은 맞는 통찰도 했던(대다수는 서툰 영어로 끔찍한 시를 써서 못 읽게 만들거나 틀린 소리를 했던) 라피네스크를 저자가 소개해주는데, 읽던 중 제일 지루하고 쓸데 없이 긴 챕터였다. 이 부분은 번역도 매끄럽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예로 이런 문장 ’서로 다른 인식 사이의 이런 공백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무방비 상태에서 예리하게 포착한 라피네스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314, 나라면 한국어 문장 이렇게 안 쓸 것 같다. 지피티한테 다듬으라니까 이렇게 해 줬다. ‘라피네스크는 서로 다른 인식 사이에 벌어진 공백을 예리하게 감지했다. 무방비한 상태였음에도, 그는 그 공백 안으로 스스로 굴러 들어갔다.’ 한 번만 끊었으면 훨씬 나았겠구나. 이것도 킹받는 문장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할머니의 서재에 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미국으로 간다. 방법론과 개념상의 격변을 촉발시키고 거짓말이 시작되게한 무진장한 미분류 유기체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316, 확 씨-- 수정본:‘그의 마음은 아직 할머니의 서재에 있다. 그러나 그는 미국으로 간다. 그곳에는 기존의 방법과 개념을 뒤흔들고, 거짓말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는 수많은 미분류 유기체들이 있다.’ft.gpt )
저자가 왜 이렇게 라피네스크를 파고 들었나 읽다보니까, 자기 조상이 운영하던 하숙집에 그가 기거했던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라피네스크가 너무 많은 자연 분야에 호기심을 보인 것처럼, 저자 또한 소재 가리지 않고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심층 취재해서 글을 쓰는 성향이 있는 것도 영향이 있을 것 같다. 이건 나도 비슷한 부류의 호기심쟁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동굴들’은 오래 전 본 영국 저예산 호러 영화 ‘디센트’를 생각나게 했지만, 영화랑 큰 관련은 없다. 여기에서도 라피네스크를(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또 언급해서 작가 이 사람 진심이군...싶었다. 개척민들은 원주민들의 묘와 삶터 흔적을 파괴하고 부장품을 훔쳐다 파는 일에 미쳐서 북아메리카 원시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추정하는데 많은 지장을 주었다. 그렇지만 겨우 살아남은 유물이나 흔적들로 짐작컨데 저자는 백인들 오기 이전에도 북아메리카에 제법 발달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데 의견이 기울어진 듯보였다. 그걸 남부 컬트라고 부르는 연구자들도 있었다. 그렇게나 많은 생물학자, 인류학자, 고고학자들이 있음에도 아직 우리 지구에 대한 것은 물론 인류의 오래 전 모습에 대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점이 많다는 게 신기했다. 내가 죽은 뒤의 사람들은 내 시대 사람들이 알던 것보다 당연히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겠지.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에서 저자는 기시 와일리의 ’래스트카인드워즈블루스‘에 관해 궁금한 걸 묻기 위해 인간 문화재 같은-뮤지션들이 다 죽은 뒤에도 아직 살아 남아 그 시절을 회고 가능한-블루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존 페이히란 사람과 통화하게 된다. 노래 가사를 이렇게 저렇게 분석해보고, 잘 들리지 않는 노래 가사를 페이히에게 문의해 정확히 알게 된다.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는 그 노래는 한 번 들어 보긴 했지만, 컨추리블루스에 문외한이고 그 음악에 대한 미국인의 감상 같은 것도 전혀 와닿지 않아서 이번 글도 앞의 동굴들 만큼이나 막연하게 읽었다. 미국 민속음악은 커녕, 난 한국 민속음악도 너무나 몰라. 음악에 대한 관심 자체가 거의 사라졌지. 메마른 감성의 퍽퍽한 중년이여…사실 저자는 블루스를 음악의 한 장르 이상으로, 가사의 인용과 변주를 짚어가며 뮤지션들을 음유시인처럼 바라본다. 블루스에 관한 두 저서를 자세하게 비평한다. 시와 노래를 분리해 받아들이는 시절의 나는 그런 글을 그냥 본다. 덕후들의 세계란 넓고 깊다.
Geeshie Wiley - Last Kind Words Blues
https://youtu.be/qIsbDzMRTf0
‘마지막 웨일러’는 이제 막 컨추리블루스의 악몽을 벗어난 참에 바로 붙여 읽다보니, 이젠 자메이카 음악이라고! 하고 시작부터 깝깝했다. 이 책은 확실히 하루 이틀 통으로 읽어 해치우기엔 볼륨이 너무 크다. 처음 절반 좀 못 미치는 곳까지는 도파민 터지면서 흥미롭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길고 전문적인 글들이 등장하고, 내 독서의 목표는 얼른 이 책을 벗어나기(그러나 난 영구히 덮는 쪽보다는 빨리 읽어 치우는) 쪽으로 전향한다. 조금씩 나눠 읽는 중도의 길도 있건만 극단적인 나놈은 나를 이렇게 몰아치고 책도 후려치게 만든다. 이 책은 영적인 부분에 너무 골몰한다. 난 유물론자인게 분명해. 아 그리고 번역가는 ‘여름이었다.’를 이 책에서 두 번이나 써 먹는다. 밈을 알고 그런 건지 저자가 정말로 It was summer를 글마다 쓴 건지 원서를 접할 길 없는 나는 알 수 없다. 밥 말리의 친구이자 생존 뮤지션인 버니 웨일러(책이 나온 2011년 이전에는 살아 있었고, 2021년에 작고했다)를 찾아 자메이카를 향한 저자의 여정을 건성으로 따라갔다. 중남미 많은 국가의 내전에 미국이 개입한 것처럼, 자메이카에서도 두 정당 사이에 주거 기지라는 기반을 두고 작은 냉전을 벌이고 있었다. 점차 반국가 세력에 가까운 조직들이 생겨나고, 마약, 총기, 병력, 정당까지 장악할 수준이 되었다. 검색해보니 살인율이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이 나라서도, 특히 수도인 킹스턴 인근은 출국권고 지역으로 지도 상에 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내가 갈 일은 없겠지만 그냥 찾아 봤다. 시작은 깝깝했는데 이 챕터에서 주저리주저리랑 밑줄 긋기를 제일 많이 해놓은 것. 나는 대개 뭘 잘 모를 때 밑줄을 좀 많이 친다.
’양들의 폭력‘에서 배운 점 하나: 가오리 꼬리침에 심장을 찔리면 죽을 수도 있다. 배를 간지르면 웃는 얼굴을 한다고 우습게 볼 어류가 아니다.
이것 말고도 동물이 인간을 공격한 사례들이 열거되는데, 사람 죽은 걸 흥미롭게 보면 안 되지만 아무튼간에 기이한 사건들이긴 했다. 저자가 다양한 사례를 접한 건 대학에 소속된 마크 리벤굿이라는 사람을 통해서였고, 리벤굿은 얼마 되지 않아 대학에서 잘렸다. 뭔 미스테리 극장처럼 리벤굿은 이후 존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대학에서도 그가 잘린 이유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히치콕 영화에서 새들이 사람을 공격하거나 혹성탈출의 영장류들이 지구를 장악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바이러스로 인류가 멸망하고 도시를 장악한 12원숭이들의 장면도.
그러고나서 말미에서 반전이 있는데. 이건 논픽션을 기반한 픽션이었던 걸로. 그러니까 서프라이즈나 토요미스테리처럼 쓰인 글이었다. 이런 걸 진지하게 읽었다고 되새겨보면 좀 빡치는데. 기만하지 마. 이 책의 유일한 픽션?팩션? (맞지? 다른 것도 사실 다 지어낸 거냐?)
‘페이턴스 플레이스’ 드디어 끝이다!!! 난 이제 이 미국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졌어… 자세히 봐야 예쁘다는 건 거짓말이다.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오래 들여다 봐야 예쁘다. 이게 뭐야 이게 뭔데 하면서 한참 들여다봐야 환멸만 남는다. 이건 사실 짧은 시간 안에 500페이지짜리 논픽션을 통으로 꾸역꾸역 본 미련한 내 탓이고...
버블 붕괴 직전 아무한테나 모기지론 해주던 시절 공무원도 아닌 작가에게 대출해 준 금융 회사 덕에 저자는 태어날 아기와 살게 될 단독 주택을 사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모기지 금액과 비슷한 금액과 여러 편의 조건을 들먹이며 드라마 세트장으로 집을 빌리겠다는 영상 제작사의 제안이 들어온다. 와, 나라도 좋다고 하겠다. 촬영 중에는 힐튼호텔에서 살게 되고 호텔비(스위트룸이다)와 식사비와 일일 경비까지 내준다.
그렇지만 연극이 끝나고 난 후- 당신의 집은 윤동주 생가, 오죽헌, 양녕대군 이제 묘역 뭐 이런 비슷한 게 되어 당신 집을 속속들이 화면을 통해 잘 알게 된, 당신이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광지, 위락지, 구경거리 뭐 그런게 될 것이다. 비슷한 얘기를 우리나라에서도 들었다. ‘괭이부리마을’의 가난 사파리, 북촌한옥마을의 촬영객들(나도 거기 구경 가긴 했었는데 사진은 안 찍었지만 하여간에 빨빨 돌아다녔었다).
마지막 글이 가장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참고 읽은 보람이 있었다. 역시 글은 누군가의 구체적인 경험이 녹아 있는게 시시콜콜해도 훨씬 더 생생하고 흥미가 가는 법이다. 뜬구름만 잡는 추상적인 에세이를 난 싫어한다.
저자는 이 모든 이야기를 거의 직접 겪고 사람들과 만나고 열심히 조사해가며 글로 남겨놨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런 장르를 소설적인 저널리즘이라고 ’뉴 저널리즘‘이라 한단다. 요즘엔 뉴스도 거의(아예) 안 보지만 비슷한 기획 기사들-기자의 체험 수기형 기사-을 재미있게 본 기억도 있는데, 저자의 글만큼의 볼륨 있고 치밀하고 재치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책과 포털 사이트 뉴스라는 매체 차이가 큰 것이겠지. 책 광고에는 엄청 칭송해놨는데,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미국 친구 하나 만나서 이런저런 썰 듣는 거랑 비슷했다.
나랑 같은 공간에서 일하던 아일랜드계 미국인 존과 영어로 수다 떨던 시절도 생각났다. 존은 늘 나도 그거 해 봤는데, 나도 거기 가 봤는데, 이명박식 어법을 (이명박 정부 때였음) 자주 썼는데, 그게 기분 나쁘진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나 다양한 경험을 한 친구라 흥미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입원해서 사랑니 위아래 몇 개를 한 번에 다 뺀 이야기, 장인어르신과 술 마시며 정치 이야기 한 이야기, 천안함 사건이 벌어지자 나에게 전쟁이 일어날 것 같냐면서 자기 가족들은 당장 귀국하라고 난리라는 이야기, 나도 사실 밴드에서 기타를 치는데 하며 취향껏 공유해준 음원들, 그가 소개해준 마테차(지금은 마시지 않음)와 그가 소개해준 책 스터드 터클의 ’일‘을 읽은 것, 이회창의 아들인 연세대 교수에게 수업을 들었는데 엄청엄청 스키니한 사람이라고 몇 년 전의 대쪽뼈대설을 인증해 준 것도 기억난다. 존은 이제 미국으로 돌아간 것 같은데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하필 저자가 존이라 그 존 3세가 떠올랐다.
+밑줄 긋기
-여기에 그 사내가 있다. 그는 약함에서 아름다움을 봄으로써 돌파구를 찾아냈다. 성스러움은 정복자나 그의 영광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약하고 고통받는 존재들 안에 있었다. 구원 또한 마찬가지다. “권력을 가진 자들로 하여금 그걸 포기하게 하라.” 그는 말했다. “너희들의 아버지는, 너희들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모두에게 자비롭다.” 이게 그가 자신을 아는 이들에게 말한 방식이다.
그런 그가 왜 사람들을 괴롭히겠는가? 그의 영이 좀 더 친절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59,저자의 사랑 고백.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하늘에 아버지와 계실 그대여, 잘 보이나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항상 뇌의 한가운데는, 만약 그곳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무척 어두울 것이고, 인간에게 선하거나 아름다운 면이 있다면 그건 우리의 선천적인 모든 것, 육체적으로 타고난 모든 것에 대항해 싸워온 우리의 투쟁의 결과일 거라고-이를테면 유사 홉스주의자적으로-생각해왔다. 형은 내 그런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여기에 물질의 차원으로, 말라서 갈라지는 시냅스 덩어리 차원으로 축소된 의식이 있었다. 형은 단어들의 사용법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사물과 제대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그 사물들과, 에너지장처럼 다가왔다가 멀어져가는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형은 새로운 이름들을 발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형의 자리는 나무랄 데 없는, 심지어 시적인 자리라고 부를 수도 있는 곳이었다. 형은 죽음을 만져봤지만, 혹은 죽음이 형을 건드렸지만, 형에게 삶이란 심지어 그런 것도 가능한, 여전히 흥미로운 어떤 것인 듯이 보였다. (85, 뇌혈관 스트로크로 재활을 거친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와 존의 형이 보인 행동이 많이 유사했다. 내 혈전은 머리 쪽이 아닌 심장과 폐동맥 사이에 끼었어서 무척 다행이다. 안 그랬다면 내가 무슨 말을 지껄여댔을지 어휴.)
-하지만 내게는 그 한 문장이 그와 함께 산 그해의 핵심이었다. 그가 가장 허약해져 있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해낼 수 있었던 걸 나는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말이 더없이 지루할 때조차, 더 열심히 경청하기 시작했다. (107-108, 책을 읽는 일과도 비슷한데, 나의 이 수천 수만권의 선생들에게 단 한 문장이라도 건지려고 지루함을 견디거나, 끝내 하나도 못 건지고 욕하고 지팡이로 두들겨패고 돌아선다. 그래 나 패륜아다.)
-라이틀이 태어났을 때, 라이트 형제는 아직 제대로 된 비행기 디자인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가 죽었을 때는 보이저 2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이런 구체적인 일들이 공존하는 걸 목격할 때 우리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은 그에게 무거운 문제였다. (117, 내가 상상 못했던 먼 미래까지 살게 된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꼭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랜덤이니까)
-그의 육체는 미국의 포스트모던 조형예술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아니 그렇게 주장할 필요조차 없는 독보적인 작품이다. 그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보존되어야 한다. (180, 자기조형의 예술에 대해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새로운 관점을 주네…마이클 잭슨의 몸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다.)
-쇼의 전체 플롯은 아주 단순하다. 여기에서 진실을 말하기 위해 동원되어야 할 단어는 ‘끔찍함’이다. 그것은 건즈 앤 로지스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이들이 액슬과 함께 펄펄 뛰면서 건즈 앤 로지스의 노래들을 연주하는 걸 지켜보는 것-이것 역시 정이 안 가는 것과 보고 있는 게 괴로울 정도로 기묘한 부조화 사이에 위치해 있다-과 세월을 견뎌내는 곡들 자체의 수준 사이의 부조화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다. (207, ㅋㅋㅋㅋㅋ나도 락스타들의 늙음과 맛이 감으로 내 늙음을 돌아보는 게 싫어…)
-랩록은 아주 후진 록음악에 머리를 짧게 자르고 팔뚝에 문신을 한 과체중의 백인 사내가 짖어대는 아주 후진 랩을 얹으면 그 결과가 의외로 그럴듯하게 나온다는 점에서 그 존재를 합리화할 수 있다. (230, 랩록 싫어하는 구나…문득 랩록 랩메탈 하드코어록 세 개가 다 다른 거냐? 비슷한 거 같은데? 하고 챗지피티에게 물어보니 다 다르다면서도 세 가지 특징을 가진 한 팀으로 RATM을 꼽아주었다…)
-“모든 종은 한때 변종이었을지도 모르며, 많은 변종은 지속되는 특정한 특성을 취함으로써 서서히 종이 되어간다.” (311, 다윈이 못마땅해하면서도 인용하게 된 라피네스크의 한 문장)
-“...체로키족에게는 동굴 안을 드나드는 게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에요. 지하 세계는 모든 것들이 뒤섞여 있고, 혼돈이고 나쁜 곳이에요.” (355)
-우리는 매 순간이 끝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지나간 시간들의 심연에 너무나 밀착된 채 살고 있다. 러시아 작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는 예술이란 “돌을 돌처럼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녹음들은 우리에게 시간의 시간스러움의 어떤 면, 갑자기 깨닫게 되는 시간의 회복 불가능성 같은 걸 느끼게 해준다. (409-410, 고음반 수집광들 덕에 복각해 낸 음악들을 담아낸 앨범 ’프리워 레버넌츠‘를 들은 작가는 퍽퍽한 나와 달리 이렇게 감성 터지고 철학적인 예술론과 인생론 같은 걸 적어냈다.)
-“내가 ‘대통령을 건드리지 마라’라고 한 건,” 버니가 말했다. “두더스를 제거하고 나면 또 다른 두더스가 나타날 거라는 얘기였어요. 원천을 제거하기 전까지는요.” 원천이란 정부의 부패를 말하는 것이었다. (443)
-루이스와 나는 다시 대책을 논의한 뒤, 아까 구입한 대마초를 우리가 먼저 좀 피워보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마초의 품질이 좋다는 걸 확인해야, 의도와는 다르게 버니를 모욕하는 불의의 사태를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이를테면, 왕의 음식을 미리 맛보는 자들의 역할을 우리가 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에 가야 이 임무를 안전하게 수행할 수 있을까? 당신이 막연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자메이카는 공원에 드러누워 하루 종일 마리화나를 피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453, 세상에 그런 곳이 있긴 합니까?ㅋ 기다리기 지루해서 그래 놓고는 웃기라고 핑계를 주저리주저리)
-마치 며칠이고 사막을 헤매고 다니다가 작은 덤불을 만났는데, 거기에서 말도 못하게 단 과일을 따먹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인생에는 꼬랑내 나는 발가락(웨스트 인디언 로커스트 나무, 히메나이아 쿠르바릴)을 한입 먹고 나서 그 과일의 윌리 웡카적인 기이함을 경험하고 있는 내 표정을 지켜보면서 키들거리던 버니가 들어 있는 한 페이지가 있다. (463, 이 뒷부분에는 이 과일이 흥분제라 단단하게 설 거라고 지껄이는 버니가 있다. 더 뒤에는 촬영 문제로 결국 돌이킬 수 없이 틀어진 존과 버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파멸을 불러올 재앙의 가능성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현재 인간이 처한 상태이며, 그것이 곧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의 대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앞으로는 좀 더 마음을 놓고 살아가기로, 누구도 미래에 대해 나를 겁주지 못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왜냐면, 우리에게 일어날 최악의 사건은 죽음인데, 이 사건은 우리가 아무리 걱정하고 어떤 노력을 해도 닥쳐오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좆까라 그래”라고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472, 미래에 대한 취재 후, 어차피 언젠가는 다 죽으니까 미리 걱정하지 말자는 긍정 한 톨 나눠주는 저자)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면 진화가 빨라진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대학 생물학에서 배우는 내용이다. 적도 근처에서는 진화의 속도가 더 빠르다. 열은 분자의 활동을 더 빠르게 만든다. (491, 전 처음 들어요! 대학 생물학을 배운 적이 없다고…)
-“...땅에서는 침팬지, 바다에서는 돌고래인 거죠. 그놈들이 지금 서로 간에 소통 가능한 일종의 신호체계를 만들고 있을 거라고 봐요. 그리고 그 장소는 서부 아프리카 해안일 가능성이 커요.”
나는 그(리벤굿)가 말하는 이 ‘종간 협력’에 대해 물었다. 내게는 언제나 어느 정도는 공상과학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510, 우리보다 더 머리 좋은 애들이 우리를 조지려고 들면 뭐 멸종하는 수 밖에. 그 주장의 근거가 미약한게 문제지.)
-영화 <롤리타>-제러미 아이언스가 출연한 버전-에 나오는 롤리타의 집이 우리 집과 같은 길 선상에 있다(그 집은 정말 예쁘다). 우리 거실에 페인트칠을 하러 온 미술팀 직원-작달막한 키에 바이커 콧수염을 기르고 모자를 쓴 엄청난 근육질의 사내로, 윌밍턴에서 촬영한 영화들의 소소한 일화들을 꿰고 있었다-말로는, 데이비드 린치가 이 동네에서 만든 영화 <블루 벨벳>에 우리 집이 등장했다고 했다. 영화를 찾아봤다. 정말이었다. 몇 초에 불과했지만. 자동차 추격 장면으로, 제프리는 사이코인 프랭크(데니스 호퍼가 불멸의 연기를 보여주었다)가 자기를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구….(529, 오우 내가 아는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동네라고 생각하니 잘 읽히는 부분이었는데, 비밀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 지금 동네 이사온 초기에 그러니까 10년 전쯤에 봉준호가 우리집에서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고바위 비탈길에서 영화 ‘옥자’의 한 장면을 찍었다. 일부러 극장에 가서 그 영화를 봤는데 그 장면 하나 찍는데 한 동네도 아니고 여러 동네를 오가며 짜깁기한 것 같았다. 우리 동네 같기도 아닌 거 같기도. 그 비탈을 가끔 지나는데 아무도 봉준호가 거기서 영화 찍고 간 걸 모르는 것 같다. 일단 옥자 자체가 좀 망한 영화이ㄱ…)
-다음 장면은 없었다. 촬영이 끝났고, 그들은 빠져나가고 있었다. 자정이 됐을 떄는 모두 철수했고, 차량 통행을 막기 위해 세워두었던 차단기도 사라졌다. 도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도시는 이십 초 분량의 필름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534, 대규모 드라마나 영화는 저렇게 왁자지껄 티가 나지만, 요즘엔 셀카봉에 휴대전화 끼워 찍고 다니는 유튜버들도 항성 수 만큼이라 나도 모르게 내가 배경으로 포함된 영상을 슝 찍고 튈 수도 있다.)
-이 숙식 패키지를 쓸 때마다 나는 유령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호텔에 묵는 기분은 무척 묘했다. 우리는 이 도시로 이사 와서 여기 있는 집을 샀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그 집에 머무르지 않는 대가로 우리에게 돈을 주고 있었다. 우린 마치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로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오셨나요?”라고 묻곤 했다.(…)
우리는 우리 집에 대해 기억이 아닌 기억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온전히 TV를 통해서 우리 집을 경험했다.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일이, 우리가 그곳에 사는 동안 일어났다. (539, 이 마지막 에세이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결말도 좋았다. 흔하지 않은 경험이기도 하고, 현재-과거-그 이후 이런 식으로 집과 관련된 삶의 변화? 붕괴? 이런 걸 계단참 벽지 사건, 텔레비전에서 보게되는 우리 집, 폭력적인 장면을 촬영해 공간 자체가 트라우마가 된 일 등으로 잘 그려 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