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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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2 아고타 크리스토프.

나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 묶인 책을 읽지만, 사실 이 책은 ’커다란 공책(Le Grand Cahier)‘, ‘증거(La Preuve)‘, ‘세번째 거짓말(Le Troisième Mensonge)‘ 세 소설을 모은 것이었다. 번역 제목은 ’비밀노트‘, ’타인의 증거‘, ’50년간의 고독‘이 되어 버렸는데, 국경을 넘는 책이 겪는 숙명이고, 자국어 밖에 모르는 무식쟁이가 만나는 필터링이다. 나쁘다는 건 아니고, 어쩌면 소설도 번역도 다 거짓말일지도. 외국어를 몰라 무성영화관에서 아무말 잔치를 했다는 변사들이 괜히 떠오른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 좋은 소설들 읽게 해주셔서 감사한 번역가님들...난 고2때 프랑스어를 택하지 않은 걸 한 번 더 후회한다.

’잘못 걸려온 전화‘도 컵에 박힌 프랑스어를 가는 눈으로 가늠해 보면 ’틀린 번호‘ 같다. 작년 여름 휴가를 다녀오면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그 짧은 소설 모음을 먼저 읽었고, 좋았다. 난 이 작가 좋아하겠군...하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바로 다음 날 무려 5500원에 사 놨다. 가끔 난 금속 탐지기 아닌 종이 탐지기 같은 거 들고 헐값에 버려진 책들을 주우러 다니는 넝마주이 같다. 싼 옷도 같이 줍고 다니니 뭐 비슷하네… 그래도 이런 넝마주이라면 행복.

1부를 읽을 때는 악동 쌍둥이들이 서로를 두들겨패며 단련시키는 것처럼 내가 얻어 맞는 기분이었다. 와. 세게 팬다. 어디선가 이 소설을 자기 앞의 생 비슷하다고 한 걸 들은 듯 한데 로맹가리 먼지네, 싶었다. 로맹가리 팬들께는 죄송합니다…
1부에서 우리, 였던 아이들은 국경을 두고 분리되어 2부에서는 3인칭으로 지독히 형제를 그리워하고 여기저기에서 애착을 갈구하지만 끝내 사랑하는 이들을 다 잃어버리는 루카스 이야기가 절절했다. 독립된 소설이지만 둘이 세계관이나 인물들이 딱 들어맞았다. 그러다가 3부에서 1인칭 나, 클라우스의 가족사와 형제 이산을 따라가는 순간 조금 혼란에 빠진다. 뭐여 소설 속의 소설이었던 건가...구운몽인가… 소설은 사실 다 만들어낸 이야기니까 저 세계에서는 폭격에 내장 터지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 세계에서는 욕설 퍼붓는 할머니처럼 살아 있기도 할 수 있다. 유럽은 기차가 많으니까, 안나 카레니나도 그렇고 가엾은 루카스도 그렇고 마지막은 기차로구나, 스크린도어는 많은 생명을 살렸지만 지하철에서 죽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죽였겠다 싶었다.

오랜만에 푹 빠져 읽을 소설을 만나서 신이 났다. 뭔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괴로울수록 그 세계가 가혹할수록 내가 후해지는 느낌이다. 소설 속 전쟁과 국경과 죽음들도 가혹하지만, 현실의 이야기조차 못 남기고 고통 받다 사라진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을 것이다. 좀 더 어릴 때 국경 근처에서 다람쥐 쫓다 총에 맞아 다리를 절게 된 형의 저항을 답답하게 바라보는 동생과, 통제된 세상과, 국경을 넘는 책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비슷한 느낌적 느낌으로다가 명작들이 나도 모르는 새 이미 너무 많이 나와버렸으니 나는 열심히 찾아서 감사히 읽고 독후감이나 쓰자… 그리고 지난 번의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에 이어 또다시 까치 홍보대사를 해야겠다. 여러분 헝가리 노벨상 받은 할아버지 소설도 뭐 멋지긴 한데 아고타 크리스토프 할머니 소설도 너무 좋아요. 야 이 정도인데 왜 노벨상 안 줘? 했는데 이미 14년 전에 돌아가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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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허가 없이 연대를 떠났거든. 도망친 거야. 난 탈주병이란 말이야. 잡히면 총살형이나 교수형이야.”
우리가 물었다.
“살인자처럼요?”
“그래, 꼭 살인자처럼.”
“그렇지만, 아저씨는 아무도 죽이려고 하지 않았잖아요. 다만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인데.”
“그래, 난 집에 가고 싶을 뿐이야.” (48)

-“그러면 ‘십계명’도 알겠구나. 너희들은 그걸 지키니?”
“아니요, 신부님. 우리는 지키지 않아요.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거기에는 ‘살생하지 말라’고 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죽이기를 일삼고 있어요.”
신부가 말했다.
”그렇구나...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90)

-한 남자가 말했다.
”당신, 입 닥쳐. 여자들은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 여자가 말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바보 같은 소리! 온갖 궂은 일, 온갖 걱정에 빠져 지내는 게 여자야. 아이들 먹여 살려야지, 부상병들 돌봐야지. 당신들은 일단 전쟁만 끝나면, 모두 다 영웅이 되잖아. 죽었으면 죽어서 영웅, 살아남았으면 살아서 영웅, 부상당했으면 부상당해서 영웅. 전쟁을 발명한 것도 당신들 남자들이고, 이번 전쟁도 당신들의 전쟁이야. 당신들이 원해서 그렇게 한 거야, 개똥같은 영웅들아!”(106,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자들을 짓누르고 짓이긴다.)

-“너희는 너무 예민해. 너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희가 본 것을 모두 잊어버리는 거야.”
“우리는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거예요.” (117, 이 책의 많은 장면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듯해.)

-아이가 물었다.
”왜 늦게 크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지. 넌 다른 사람들만큼 크지는 않겠지만, 영리하잖아. 키는 중요하지 않아. 영리한 게 더 중요하지.“ (242, 전국의 키작인들이여 단결하라)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302)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나는 그가 더 좋은 처지에 있고,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비-신의 악의가 만들어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545)

-기계의 리듬에 맞춰서, 작품을 끝냈을 때의 기분은 허탈했다. 완성된 작품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쓰는 행위를 정신 분석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거기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이다. 쓰면 쓸수록 병은 더 깊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나는 쓰는 것 이외에는 흥미가 없다. 나는 작품이 출판되지 못하더라도 계속 쓸 것이다. 쓰지 않으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쓰지 않으면 따분하다. (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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