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1219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동명의 김영하 소설을 읽었다. 그러고나서 김영하 에세이에서 이 소설을 소개해서 관심이 갔다가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중고책으로 2002년 초판을 구했다. 책 상태가 깨끗했다.

번역이 이상한지 원래 서술이 그런 건지, 독백하듯 -이다, 체를 쓰다가 갑자기 샤미소에게 말을 걸다가 난리가 난다. 일인칭이긴 한데 중간중간 서간체로 돌아가는 게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몰라도 몰입을 방해하는 면이 있었다.

제목은 표지에 독일어로 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페터 슐레밀의 환상적인 이야기-해설에 원제대로 해석되어 있다) 하고 써 있는데, 겉표지를 넘기니 샤미소가 프랑스 샹파뉴 출신이라고 해서 엥? 했다. 귀족 집안이라 프랑스 혁명 때 독일로 망명을 했고, 이후 독일에 정착한 이야기를 마저 읽고 끄덕끄덕 했다.

나도 독일과 프랑스의 갈림길에서 고민한 적이 있다. 바로 고2 올라갈 때, 문과로 행로를 정하는 동시에 문과-독일어반인지, 문과-프랑스어반인지 택해야 했다. 나는 고민 없이 독일어를 골랐다. 프랑스어는 뭔가 느끼하고 나랑 안 맞는 듯해… 이름만 알지만 왠지 힙해 보이는 칸트, 니체, 비트겐슈타인 다 독일이름이니까 왠지 독일어를 배우면 나중에 그들의 철학책도 슈슉 읽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흠...밀란 쿤데라가 체코 사람이지만 내가 좋아하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체코어 아닌 프랑스어로 쓴 걸 알았더라면, 조금 더 고민했을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주로 읽는 지금은 프랑스어를 택해 조금이라도 어릴 때 맛이라도 보지 않은 걸 후회하지만...듀오링고로 프랑스어랑 독일어를 다시 좀 해 보려다가 무료 버전이다보니 매일 배터리가 부족해 그만 두었다. 대신 200일 넘게 아랍어를 하고 있다. 우힙앨키라아(I like reading).

저자는 왜 돈 받고 팔면 안 될 것으로 그림자를 꼽았을까? 슐레밀은 곧바로 영혼을 팔지 않고 그림자부터 팔았다. 회색옷 남자는 그림자를 돌려줄테니 대신 죽은 후 영혼을 넘기라고 한다. 슐레밀은 차마 영혼은 못 팔고 매매계약서에 서명을 거절한다. 슐레밀의 선은 그림자까지는 그럭저럭 넘길 만했고, 영혼은 아니다 싶었나 보다.

나의 존엄, 자유, 건강, 이런 건 돈이랑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인 걸 알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일터에 나가서 그것들을 조금씩 갉아가며 돈으로 바꾸고 있지 않냐… 대부분 볕 없는 곳에서 해 쨍 뜨기 전부터 해 저물 때까지 갇혀 일하고 있으니 돈에 팔려 그림자를 잃은 거 아니냐… 물론 달빛과 가로등이 우리를 비춰주지. 그림자는 아마도 저 존엄, 자유, 건강 이런 것의 은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깊이 공감가는 소재는 아니었다. 그림자 팔았다고 세상 사람이 인간 취급도 안 하는 게 더 놀라웠다. 악마에게 그림자를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되는 거 아니냐… 오히려 현실에서는 무슨 짓을 해서 번 돈이든 간에 사람들은 돈이 많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 사람을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19세기 초에 나온 자연과학연구자겸 문학인이 쓴 짧은 소설은 이렇게 기대보다는 재미가 없었다. 우연히 길을 걷다 회색 남자를 봐서 돈자루랑 그림자랑 거래한 것도 신기한 일인데, 슐레밀에게는 신기한 일이 또 생겨서 중고 시장에서 산 장화가 하필이면 세계를 휙휙 돌아다닐 수 있는 헤르메스의 신 같은 것이었다. 뭐 환상적인 사건은 얘만 쫓아다니는 거야… 그림자 없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빠른 발걸음으로 극복하고, 세계를 누비며 자연연구에 몸 바쳐 살아간다. 돈이 무한정 나오는 자루가 없어도 공간을 재빨리 넘나드는 재주로 세계의 이것저것 먹고 싶은 걸 먹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필요한 건 아프리카 상아 주워다 팔아 사고 말이다. 그런데 회색 남자는 어디갔어…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할 것 같은데 포기했나 어느 순간 안 나오고 끝에서도 슐레밀이 샤미소에게 훈수두며 그림자 팔지 마라, 하고 회색 남자의 행방은 묘연한 채 끝난다.

해설은 돈만 우선시하는 세태를 비판한 작품으로 풀어갔다. 그러나 소설 속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림자 없는 걸 알고 나면 다들 그를 천시하고 몹쓸 취급했다. 그걸 보면 효과적인 비판 같지는 않았다. 아무도 돈을 그림자보다 우선시하지 않고, 슐레밀 자신도 매우 후회하고, 아무리 부자여도 그림자 없으면 사랑도 결혼도 안 되는 세상인 거 보면 그림자만 우선시하는 세상이잖아… 우연한 사고로 병에 걸리거나 장애가 생기거나 이런저런 정체성이 소수자인 사람을 차별하는 이야기에 더 가깝지 않나… 영화 ‘박쥐’에서 흡혈귀 된 현상현이 자기 괴물 취급하는 걸 억울해하던 생각도 나고… 슐레밀이 조금 더 뻔뻔했으면 미나에게 내가 그림자 있었으면 당신이랑 만날 수 있었겠어요? 내가 돈 뿌리고 다녀서 왕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기나 했겠어요? 하고 따질 법도 했는데...슐레밀은 그냥 질질 짜기만 한다. 어휴… 돈자루 나한테 내놔라 내가 아주 잘 쓸 자신 있다…

19세기에는 어쨌는지 몰라도 지금은 내 소중한 걸 내놓겠다 해도 그걸 마법 돈자루처럼 무한에 가까운 부와 바꿔줄 악마는 없다. 내 온갖 신체 부위와 영혼을 다 갖다 줘도 자본주의는 몇 푼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목숨은 살려드리고,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야금야금 돈과 바꿔주는 편이 뽑아먹기엔 더 유리하다는 걸 아는 영악한 악마 같은 시스템이 더 납득이 간다. 생존을 위해 야금야금 말고는 다른 선택지를 모르겠다. 그림자 한 방이 오히려 내 존엄을 지키는 데 지장이 없을 것 같은데, 내 윤리관이 이상한 건가 샤미소의 세계관이 허술한 건가 아무래도 둘다 맞겠지.

+밑줄 긋기
-그는 악수를 나누고서 지체 없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그가 놀라운 솜씨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 그림자를 풀밭에서 살짝 거둬들여 둘둘 말아 접어서 주머니 안에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시 일어나 내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장미 숲을 향해 되돌아갔다. 나직한 그의 음성이 들렸다. (29, 간편한 걸? 내 그림자도 사 가…난 후회 안 할 거 같아…얘들아 그림자 없어도 나 사랑해줄 수 있니?)

-그는 주저하면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머리카락을 끄집어내자 거기서 토마스 존의 창백하고 일그러진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창백한 주검의 입술이 다음과 같은 말을 힘들게 웅얼거렸다.
“신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나는 처형당했다. 신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나는 저주를 받았다.” (109, 회색옷 아저씨는 악마인데 영혼을 판 존 씨는 신을 들먹인다. 신은 어쩜 우리의 고통을 재미삼아 이런저런 시련을 주는 만악의 근원일지도. 반박시 니말이 맞음. 이 장면이 그나마 인상 깊은 묘사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