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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 - 작고 찬란한 현미경 속 나의 우주
김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6월
평점 :
품절
-20251204 김준.
예쁜꼬마선충에 대한 연구자들의 책은 ‘벌레의 마음’을 이미 갖춰두고 있었다. 얇고 표지 예쁘고 아마도 과학자가 쓴 에세이라는 것 말고는 책 정보가 별로 없던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를 먼저 폈다. 그런데 이 책이 예쁜꼬마선충 연구하는 과학자가 쓴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새치기 하고 만 책…
자신의 연구생활과 연구대상인 예쁜꼬마선충에 대해 애정을 담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책이었다. 주60-80시간 연구노동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연구 안 하길 잘했다가 아니라 난 잘 못했을 것 같다… 결과가, 성취가 가시적이지도 단기적이지도 않는 일에 오래 매달리는 일에는 아직도 미숙하다. 아마 평생 미숙할 것 같은 급한 성질의 나놈아…
일터에서 많이 힘들고 상처입었다. 내 말은 다 무의미했고 사람은 변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을 변화시키라는 요구를 받으며 나는 일을 한다. 잘못하는 사람들은 늘 자신만 그런게 아니고, 자기는 억울하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피해를 입고 상처 입고 울게 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그건 누구의 짓일까? 나는 무력감에 감정을 폭발하고 울었다. 더는 나에게 이 짐을 지게 하지 마소서. 누가 들어줄까. 이번 생은 망했다.
예쁜꼬마선충으로 태어난 것보다는 나로 태어난 게 더 나은 일인지 자신할 수 없다. 쟤들은 그냥 짧은 순간 열심히 알을 낳고 조금 살다 죽는다. 그렇게 무수히 벌레들이 이어진다. 사람 사는 것도 상대적으로 보면 찰나일텐데, 벌레들도 그 짧은 기간 나름의 고충도 고통도 있겠지. 그렇지만 짧게 겪을 거라 생각하면 나보다 못하다고 못하겠다. 한국 좋아졌다 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꾸준하고 끈질긴 과학자 책 읽어놓고도 왜 이런 마음인지. 오늘 하루가 힘들어서 아니 이번 한주가 한달이 한해가 그랬겠지. 모두가 힘들텐데 사람은 자신의 힘듦 말고는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이 책을 보면 남의 힘듦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 힘든 일일지라도 거기에서 재미와 발견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좀 부러웠다. 나는 내 일에서 재미도 감동도 없다. 도망칠 궁리하다가 실패했다. 다시 도망칠 길이 있나 이것저것 찾아봤지만 답이 없었다. 내 마인드셋의 문제인지 환경과 맥락의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다 문제겠지. 내 문제는 컴퓨터로 코딩해 돌리는 연구과제들보다 답이 없어 보인다.
다 읽고나서 과학자가 꿈이라 과학고에 가겠다는 한 어린아이에게 이 책을 주었다. 오늘 힘들어서 펑펑 운 내가 불쌍했는지 어린이는 주섬주섬 하리보 곰돌이 젤리를 꺼내서 내게 주려고 해서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찰나의 위로였지만 이게 내 일의 지속할 기운을 주지는 못했다.
+밑줄 긋기
-생물의 염색체는 대부분 양 끝이 노출된 실처럼 생겨서 이 양끝이 망가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책의 시작과 끝이 표지로 덮여 있는 것처럼, 염색체도 양 끝이 특정한 덮개(텔로미어)로 보호되어 있다.
그런데 때로는 이 덮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자연히 염색체 끝부분이 망가지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마치 표지가 뜯겨진 책의 낱장이 점차 흐트러지는 것처럼 염색체도 죄다 망가질 수 있다. (…) 다행히 표지가 뜯겨나간 뒤에도 염색체라는 책이 한 방에 찢겨나가진 않았다. 어떻게든 새로운 덮개를 다시 수선해서 붙이려는 시도가 생겨났고, 너무나 얇지만 끝을 덮을 수 있는 1만자가량의 얇은 덮개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걸론 부족했던 것 같다. 이 얇은 문자 덮개 끝에, 염색체 안쪽에 있던 20만자 정도 되는 좀 더 두꺼운 부분을 끌어다가 새로운 덮개로 삼으려는 시도가 다시 한번 있었다. 덕분에 이 염색체 끝은 표지가 한 번 뜯겨나간 흔적만 남긴 채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고, 그 뒤에야 다시 원래 쓰이는 튼튼한 덮개가 염색체 끝부분에 씌워지게 됐다. (157-158, 하와이출신 예쁜꼬마선충의 염색체가 다른 동네 애들과 다른 이유를 책에 비유)
-염색체란 정말 튼튼해 보이지만 사실 자주 끊어진다. 망가진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계속해서 끊어진 부분을 때우고 수선해서 회복시켰을 뿐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돌연변이가 생겨나고 다양성이 생겨나며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다.
사람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겠어? 인생이라는 실타래도 매순간 끊길 듯 위태롭지만 결국 어떻게든 이어지고,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어느 순간 성장할 수 있는 것 같다. 열심히 살기 정말정말 싫지만, 살아남으려면 별수 없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159, 으으으 가혹한 체험 진화의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