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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20250808 앤드루 포터.
초판을 사 두고도 펼치는 데는 좀 걸렸다. 근래 지나간 여름과는 다른 감각으로 보내고 있어서. 읽고 싶지만 눈으로만 책등을 훑는 처지가 더 이상 아니다. 수험생활 3년은 나에게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놀랄 만큼 빨리 휘발되었다. 수많은 지식과 문제들이 너무 짧은 기간 너무 빨리 잠시 스쳤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그 이전의 한참 맴돌이하던 오랜 기억들도 슬쩍 같이 가져간 것 같다.
나쁘지 않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두 번 읽었다. 재독이 드문 나에겐 드문 일이다. (드문드문) 신작 소설집 나왔다는 소식에 많이 궁금하긴 했지만, 꽂아 놓고 못 읽는 게 안타깝긴 했지만, 또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오늘 펼쳐 읽고 보니 예상과 달리, 라고 할 만한 감흥은 역시나 일지 않았다. 그냥 나쁘게 말하면 와, 이렇게나 자기 복제를, 좋게 말하면 비슷한 시절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나 많은 변주를, 싶었다.
이성애자 중년 아저씨가 나오고, 그의 배우자나 연인이 나오고, 대부분의 그들은 뭔가 위태위태하다. 아이를 낳았든, 낳지 않기로 했든, 낳고 싶은데 못 낳았든, 회한, 노스텔지어, 회상이 무성하다. 예전의 난 몰랐어, 지금의 내가 이렇게 살 줄은, 이런 마음의 사람들은 현재가 행복하지 않은 거겠지. 문학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읽는 사람한테 위로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이런 위로가 씨알도 먹히지 않는 건, 내가 살만하다는 얘기겠다. 다른 의미로 예전의 난 몰랐어, 지금의 내가 이렇게 살 줄은. 내가 잃은 것들을 떠올려보려 해도 당장 짚이는 게 없다. 점점 많은 걸 얻기만 했고, 그게 다 아직은 나한테 있다. 작품 속 사람들은 자꾸만 지나온 날들을 떠올리지만, 나는 오히려 다가올 날들을 짐작한다. 아마도 지금 같은 날들이 한동안 이어질 것이다. 그렇지 못한 날들이 오면 지금의 나를 부러워하고 그리워 할 것이다. 손을 뻗으면 읽고 싶은 책이 당장 잡히지. 그립고 좋은 것들이 그렇게 가까이에 둘러싸고 있지. 내가 소설을 잃은 이유도 짐작이 간다. 굳이 사라진 것을 찾는다면 쓰거나 읽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 정도. 레스트 인 피쓰.
+밑줄 긋기
-“이렇게 늦게 전화해서 미안해.” 나는 말했다. “그냥 네 남편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살아는 있니?”
“아주 간신히, 하지만 살아 있어. 지금 내 소파 위에서 기절했다.”
“전화해줘서 고마워.”
“너 괜찮아?”
“잠이 안 와.”리베카가 말했다. “뭔가 정말로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 넌 그렇게 느낀 적 없어?”
“항상 느끼지.”
“그러면 어떻게 해?”
“무시하려고 노력해.”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117, ‘라인벡’ 중. 정영수 소설의 ‘우리들’과 조금 비슷한 느낌. 다정한 듯 위태로운 삼각형.)
-알렉시스는 시내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다 해고된 날 밤에 몹시 취하고 화가 난 채로 집에 돌아왔다. 나쁜 소식을 들은 후 몇몇 동료들과 함께 술집에 갔는데, 거기서 동료들이 알렉시스에게 잔술을 연거푸 사주었고 그후에 그녀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냈다. 알렉시스는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을 새도 없이 욕실로 들어가더니 거울을 주먹으로 박살내고 밖으로 나와 카펫 위에 피를 뚝뚝 흘리면서 머리가 떨어져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 행주를 몇 장 가져다 지혈하고 아내를 진정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이제 그녀는 웃고 있었다. 비명이 아니라 웃음소리를 내지르며 나를 끌어당겨 키스하려고 했다.
“당신 취했어.” 나는 아내를 밀어내며 말했다. “다치기도 했고.”
“별로 많이 취하진 않았어.” 알렉시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 채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마치 내 안을 빤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알아, 당신은 이걸 좋아해.” 알렉시스가 말했다.
“뭘?”
“이거.” 알렉시스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당신이 나와 결혼한 이유라는 걸 알아. 당신은 이걸 좋아해.”
나는 아내를 밀어내고 부엌으로 물을 가지러 갔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내내 나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아내가 우리 둘 다 말하지 않았던 우리 사이의 수치스러운 비밀을 정통으로 찌른 것 같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녀의 어떤 측면에 나는 또한 이끌린다는 사실을. (227, ‘벌’ 중. 미친 사람과 결혼하지 맙시다… 이미 했다면 미안해요.)
+책갈피 사이에 한국 독자들에게 영어로 쓴 엽서가 있는데 읽다보니 이거 쓰기 싫은데 출판사에서 쓰라니까 겨우 쓴다 싶게 느껴지는 글씨와 문장이었다. 쓰기 싫음 쓰지 말지 그랬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