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의 없음
배수아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20250729 배수아.
 
 책을 읽으면서 분노하다, 좌절하다, 던져버리고 싶다, 내탓을 하게 된다, 이런 감정을 느끼기는 흔하지 않다. 일 년에 백 권을 읽어도 그렇다. 누군가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혹은 자기가 먼저 공부하고 연구하고 탐구하고 정리한 것들을 친절하게 나눠주려고, 그것도 아니면 말맛이든 말과 글자의 놀이로 어떤 느낌을 전하거나 전하지 않더라도 내 마음대로 뭐라도 건져가라고, 아무튼 그러려고 글이란 걸 쓴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 듣고 그것 때문에 화가 날 지경이라면 그냥 그대로 덮어두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유해한 독서 아니겠니. 그런데 자꾸만 싸우는 기분으로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본다. 그냥 글자를 앞에 두고 꿈을 꾼다. 아마도 대낮에, 주로 움직이는 대중교통 안에서, 어떤 날에는 병원 대기실에서, 나는 남의 꿈을 꾸었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나와 주변의 산만함 때문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평온하고 조금 덥긴 하지만 귀마개를 살짝 귓구멍에 꽂으면 에어컨 실외기로 진동하는 저음 진동 소음도 차단할 수 있는 집에 있는 낮에 이걸 마저 읽겠다고 붙들고 앉았다가, 또 붙들고 누웠다가, 낮잠을 한숨 자고 눈을 떠서 갈증을 느끼다가,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의 끄트머리를 빨리 마주하고 싶어 안달하는 나는 불가해의 한국어로 쓰인 척 했지만 사실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오면서 조금씩 화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좌절한다. 나는 부족한데 누군가는 이걸 읽고서 화나 무력감 아닌 무언가를 느끼고 얻어냈을까? 해설이란 걸 쓰겠다고 나선 사람이 용감해 보이지만 그 해설도 무용한 것으로 보여서 그냥 술술 넘겨 버렸다. 파이트클럽에서 브래드피트였는지 에드워드 노튼이었는지 가장 싸우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에 간디,라고 답한 게 문득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2019년에 배수아 소설 ‘뱀과 물’을 읽고 아마도 이런 비슷한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었는데, 그걸 잊고 또 뭘 읽겠다고 덤벼들어서-아마도 유명한 사람들이 21세기 최고의 책 이런 거 꼽을 때 이 책이 등장하는 걸 보고 홀려서- 절판된 걸 보고 아 그럼 전자책을 사면 돼, 하고 사서 읽은 거 아니고 보고 화가 난 것이다. 음 나는 이걸 화가 났다는 것 말고는 다른 기분으로 설명을 못하겠다. 아이 씨발거. 왜 이런 걸 읽겠다고. 아니 왜 이런 걸 써 가지고 씨발년.
 
+밑줄 긋기(아니 근데 밑줄을 긋긴 그었어?)
-내가 일생 동안 두려워한 건 혼자가 되는 것과 글을 쓰지 못하는 것, 이 두 가지였답니다, 하고 화면 속의 남자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올빼미’ 중)
 
-종종 강하고 날카로운 인식 속에 있을 때면 특히, 그는 자살한 사람들의 글만을 신뢰했다. 자살하지 않은 사람은 인간의 절대적인 어떤 상태, 혹은 자유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리라. 그들은 어떤 해석으로든 타협자이며 공동의 방식의 선택자이기 때문이다. (‘북역’ 중. 언젠가 죽은 사람의 글만 읽을까, 그런 책의 독후감만 쓸까 잠시 생각한 적도 있었다. 자기 책 리뷰 찾아와서 괜히 긁히거나 좋아요 누르거나 따지거나 하는 사람이 그 글 뒤에 있다는 걸 새삼 느끼고부터 그랬다가 에라이 읽었으니까 굳이 읽어줬으니까 내마음이다, 가 되어 버렸지만…악성독후가머의 탄생)
 
-어느덧 그의 손바닥 아래에 마르고 딱딱한 여인의 손등이 있었다. 작고도 뜨거운 손등. 그것은 그의 손바닥 안으로 날아온 한 마리 새. 딱딱한 부리와 짧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뜨거운 배와 호박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평면적인 유리 눈동자를 가진. 그렇게 그들의 손은 산맥과 들판과 돌투성이 사막을 넘었다. 시간과 그 너머 모든 차원의 끝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의 손은 모세의 갈대숲과 이승과 저승의 해협 위를 날았다. 땅의 이쪽은 여인의 드러낸 젖가슴이었고 땅의 저쪽에는 그 젖가슴이 꾸는 꿈의 장면들이 펼쳐졌다. 그는 눈을 뜨고 눈앞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들의 손바닥으로 덮인 세상은 모두 어둠일 뿐이었다.
 
-성인이 되어 여인들을 가까이 했을 때, 그는 여인들 자체가 아니라 그런 내밀한 관계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독특한 감정의 인식을 더욱 즐겼다. 오랜 독서로 세상을 경험한 자의 습관이었다. 쾌락이나 관능조차도 단순한 향유뿐 아니라 특별한 노래를 불러일으키는 귀한 대상일 수 있기에 더욱 소중했던 것이다.
 
-나는 꿈이 상상과 문학이라고 굳게 믿는 반면, 너에게 꿈은 자신의 누설이자 철저한 분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너는, 내가 단지 나 자신의 꿈으로만 이루어진 책을 쓰고 싶다고 하자 즉시 조목조목 근거를 들며 문학작품으로서의 형상화에 대한, 그리고 작가 개인의 섣부른 심리노출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가, 내가 마음 상해하자 다음 메일에서 훨씬 더 부드러운 어조로 그 비판을 완화시켰다. (‘올빼미의 없음’중)
 
-‘한 여자가 노벨상 수상자이든 아니면 상점의 판매원이든 간에, 육신을 내세우고 시장에 등장해야 하는 입장이란 점은 동일하며, 나이 먹음에 따라 그 가치가 무섭게 하락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페터 한트케와 나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두 개의 상극이다. 한트케는 우리의 일상에서 영감을 추구하고, 그와 반대로 나는 그 모든 것이 한낱 재로 사라질 것임을 이미 알고 있을 뿐이다.’ ‘삶과 글쓰기, 이 두 가지는 결코 병행하지 않는다.’(그럼 죽어…)
 
-모든 직업은 우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직업은 우울하며, 필연적인 우울을 유발한다. 은퇴와 죽음 말고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울. 예를 들어 우리가 알고 있는 이들, 사무원, 부동산업자, 철도승무원, 컴퓨터 판매원, 정원사, 화가, 새몰이꾼, 길거리 광대, 웃음의 선동가, 나이 든 배우, 뚱뚱한 배를 가진 경찰, 의사, 교회 문지기, 박물관 매표원, 공업학교 교사, 실업급여 신청자 그리고 ‘아직은 내가 아니야’ 혹은 ‘더이상 내가 아니야’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구직자들까지도. 자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운명적으로 음침하며 회색인지 그들이 알고 있다면. (‘빠리 거리의 점잖은 입맞춤’, 그냥 모든 인간은 우울하다고 하지 왜 굳이 열거를…굳이 열거하는 게 글이긴 하다만)
 
-서점에서. 어떤 낯선 사람이 스쳐지나가면서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것은 내게 오래 남아 있을 거예요. 얼마나 오래? 영원에 사흘을 더한 만큼. 그 사람은 원숭이처럼 구부정한 등을 보이며 서가 사이로 멀어져갔다. (유통기한 만년 같은 건가)
 
-속삭임: 너의 생은 네가 모르는 것과 네가 망각한 것으로 이루어졌다. 네가 살지 않은 것들로, 네 외부의 잠으로. 너는 네가 경험한 것을 낯설어하며 꿈꾸고 상상한다. 그렇게 너의 생은 너를 향해 나아간다. 모든 결정된 것에서부터 결정되지 않은 낮잠 속 하나의 표정을 향해.
 
-이름도 다르고 사진도 다르다면, 즉 당신이…...부인이 아니라면, 그리고 이 사진도 당신의 것이 아니라면, 뭔가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겠군요. 하지만 이런 행정적인 문제는, 더구나 지금처럼 당신이 외국에 있을 때는,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 보통일 겁니다. 상당히, 불필요하고 무의미하게 기나긴 시간이. (카프카 따라하지 마)
 
-깨끗하게 빨아 다림질한 잠옷과 어젯밤에 마시다 만 식은 차 냄새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잠의 냄새가 침상에 고여 있었다. 그런 냄새 속에서 김씨의 부인은 누운 채 천천히 글자를 써 나간다.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중)
 
-그러나 절망은…...그것은 피부가 없는 몸이었다. 일부러 자극하지 않아도 우주 자체가 고통이 된다. 그것은 마비된 느낌과 호흡, 사무치는 무력한 갈망이 지배하는 검은 회화였다. 육지로 올려진 물고기가 인간의 언어를 말할 줄 알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것에 대해서 알려주었으리라. 어쩌면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그것에 대해, 하고 김씨의 부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물고기는 말을 할 줄 모를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할 테지.
(그게 선생님께서 제게 한 짓이고 저한테 한 지도 모를 짓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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