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걸려온 전화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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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9 아고타 크리스토프.

적어도 13년 동안은 여름휴가를 가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더운데 너무 비싼 값을 들여 땀과 지친 몸을 사고 싶지 않았다. 여행은 주로 (방정환 선생님이나 부처님 덕분인) 5월 연휴나 추석 연휴, 겨울 중에 이루어졌고 그나마도 드문일이었다. 코로나 시절 2년에 붙여 수험생 모드 3년차까지 더해지니 이젠 멀리 가는 수고 자체가 겁이 나는 사람이 되었다. 덩달아 칩거 사람된 어린이들아 미안…

큰 각오 끝에 자리를 옮겼다 돌아오는 사람이라, 그런데 또 대중교통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뚜벅이들이라 장소 이동과 시간 계획과 사전조사에 미리 많이 고민하는 편이었다. 이거저거 다 정해두고 최대한 돈 안쓰는데 골몰하고 많이 걷는 건 개의치 않는 편 ㅋㅋㅋ매 끼니에 식비 안 들이는 편ㅋㅋㅋ 그런 내가 살던 중 계획도 거의 안 하고 내기준으로 비싼 밥도 먹고 그런 휴가를 보내고 왔다. 곁의 사람 회사에서 성수기 반값 정도에 인천의 호텔 예약을 ‘응모’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했고, 해당 일자 경쟁 많으면 갈 수 없을 수도 있다고 했고, 수험생인 나는 일박이일이라도 수능 백일도 안남은 무렵 공부를 놓는게 겁이 나서 대놓고 ‘제발 안 됐으면!’ 외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육대일의 경쟁률에 안 될 수도 있겠네, 하던게 되어 버려서, 할인이라면서 뭐 이리 비싸, 투덜대면서도 (나중에 찾아보니 할인 안 받았으면 진짜 비싼 시기더라…그런 장소더라…) 어린이들 놀릴 생각한 다정함 생각하며 그래…이번엔 가서 툴툴도 버럭도 최대한 자제하자…이러고 출발했다.

지하철로 오갈 수 있는 목적지라 좋았고, 첫날 둘째날 두번 수영하면서 어린이들은 새까맣게 타고도 즐거워했고, 그런데 큰어린이는 날더러 이번엔 엄마도 즐거워보여, 했다. 내가 구명조끼가 뒤집혀 균형을 잃고 어푸어푸거리니까 이녀석들 깔깔 좋아했다. (대대로 패륜아들) 큰어린이는 통크게 제일 비싼 우나기덮밥을 시켜서는 하나 안남기고 싹 잘 먹었고, 작은 어린이도 특별히 보채지도 않고 주면 잘 먹고 놀래면 잘 놀고 걷재면 또 걷고, 해가 뜨겁긴 해도 멀리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나 사는 도시보다는 덜 더운 기분이었다. 색다른 체험을 위해 제법 큰 돈을 쓰는 걸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구경도 하고 생각도 해보고 내가 지금 그 비슷한 걸 하는가 또 생각에 생각도 하고. 진짜 바다를 가까이서 본 적 없는 작은어린이를 위해 뻘밭에 더 가까운 서해 바다 해수욕장까지 삼십분 남짓 버스를 타고 아주 잠시 다녀왔다. 그 짧은 사이에도 모래밭에 발이 빠져 축축 엉망이 되어 돌아오는 길에 고생은 했지만. 망고빙수 안 사주는 대신 쮸쮸바는 오십개 사줄게, (실제론 두 개 밖에 안 사줘서 이제 집 가는 길에 하나 더 사줄 예정) 더운 길을 걸을 땐 다같이 아이스바나 쮸쮸바 빨면서 묵묵 바다도 보고 갈매기도 보고 그런데 진짜 바다는 쾌적한 리조트랑 달라 오래 머물 곳은 아니네, 하면서 금세 집 가는 지하철 탈 수 있는 곳까지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그리고 휴가 때 책쟁이가 그동안 못 본 책 하나라도 봐야 진짜 휴가지, 그럼 가장 얇고 짧고 그런데도 보고 나면 안 빡칠 거, 그냥 제일 가벼운 거, 처음엔 얇길래 앙팡떼리블(미쳤네) 가방에 넣었다가 치우고 다시 책꽂이를 살피다가 아고타 크리스토프 단편집을 집어 들고 가볍고 작고 좋다, 했다.

출발해서 공항철도 탄 중에 작가 소개 펼치고 어린이들한테 읽어주었다. 35년도에 태어나서 누나가 태어나던 해에 죽었대. 그럼 엄마가 태어난 해에는요? 살아있었지. 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가는 길에 조금 읽고, 자기 전에 또 읽고, 이상하게 어딜 여행가든 전날부터 잘 못 잠들고 가서도 못 잠들고 또 이튿날은 일찍 깨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큰어린이는 자고 싶은 눈치인데도 같은 침대 누워서 무척 좋아하는 선생님을 줄넘기로 죽여버리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는 위대한 작가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내가 일단 나의 책을, 나의 소설을 쓰기만 하면……. 내가 공무원직과 또…뭘 버렸더라?’(’작가‘ 중, 45) 이런 부분을 소리내어 읽어주며 미친놈인가? 아니 얘 나인가? 하기도 하고. “당신들은 버릇이 없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고. 왜냐고? 당신들은 거짓말을 하고, 친절한 척하고! 내가 크면, 당신들을 다 죽여버릴 거야!”(’아이‘ 중, 50) 같은 패륜아 부분도 읽어주다 드디어 졸음이 와서 열두시반 넘어 불을 껐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서 뒤척이는 큰어린이 덕에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책상에 앉으니 해가 떠서 그런데 비행기가 왜 내 눈높이로 날지? 하고 그걸 보는게 또 좋았다.

돌아오는 공항철도에서 책을 마저 다 읽고 오, 이번엔 하여간에 책 선택마저 찰떡이었다, 이제 다시 공부해야지…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깨알같이 독후감도 쓰고 큰어린이 너는 이제 세시반에 신도림을 지나고 있으니 네시반에 수학학원(이번 주 월요일부터 다니기 시작…)에 가세요… 엄마처럼 뒤늦게 수학 한다고 고생하지 말고 중1부터 다니는 학원이니 하여간에 놀러 갔다와서도 자연스럽게 가라고 등떠밀기 전 지하철역 내리면 쮸쮸바 사줄게 그거 물고 집까지 걸어가자…

+밑줄 긋기
-내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몹시 지친 상태일 것이다. 어떤 침대든 간에 아무튼 침대 위에서 잠이 들 것이다. 구름이 떠가듯이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는 방에서.
그런 식으로 세월은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악몽 같던 내 인생의 장면들이 눈에 선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들로 인해 아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늙고 혼자이지만 내 집에 있으니 행복할 것이다. (’나의 집에서‘ 중.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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